해병대 창설기-창설기의 기합
어느 타군보다도 기합이 센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해병대는 그 전통의 연원지대인 창설기 때 과연 어떤 기합을 가했던 것일까?
병1기생들을 일기당천의 강병으로 길러 낸 창설기의 훈련 가운데 가장 혹독한 훈련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 훈련병들의 팔꿈치와 무르팍을 성치 못하게 했던 그 덕산비행장의 거치른 시멘트 활주로에서 실시한 포복훈련이었고, 기합의 종류 가운데 주조을 이루었던 것은 '빳다'였다.
그리고 쌍벽을 이룬 그 혹독한 훈련과 기합으로 해병대의 주춧돌이 된 병1기생들을 일기당천의 강병으로 길러낸 실직적인 주역들은 맹수의 조련사와 같기도 했고, 대장간의 쟁이들과도 같은 신병교육대(1, 2중대)의 분대장과 소대장들이었다.
훈련병들에게 하루 15대 정도의 규정량을 가격했던 그 분대장과 소대장들은 1호에서 3호까지의 빳다를 만들어 훈련병들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가격했는데, 1호 빳다는 야구방망이 보다 훨씬 큰 몽둥이였고, 2호는 그 보다 약간 작고 3호는 야구방망이 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빳다에는 '이순신 장군의 얼' 또는 '삼천만 동포의 눈물' 이니 하는 따위의 글자가 먹글씨로 쓰여져 있었다.
그 빳다 기합은 일본 해군의 전력자들이었던 그들(분대장과 소대장급 하사관들)이 일본 해군에서 전수 받은 것이기도 했다.
그들 중 가장 무서운 존재로 알려졌던 분대장은 8.15후 일본으로부터 귀국한 한국말을 잘 할 줄 모르는 명 모 3등 병조 였는데 무식한데다가 포악한 성격을 지니고 있던 그는 1호 빳다를 들고 마치 개를 패듯이 가격을 하는 바람에 특히 그가 당직을 서는 날에는 그가 소속된 3소대의 모든 분대원들은 전전긍긍했다. 그 잔인한 성격의 분대장은 결국 해병대에서 쫓겨나 육군에 입대했으나 전쟁때 전사를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렇다면 빳다로 인해 생겨 난 훈련병들의 상처는 어떠했던가? 그 상처는 시퍼런 멍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빳다질이 겹쳐짐에 따라 그 멍들은 푸르죽죽한 문양으로 자리를 넓혀갔고, 종내는 여러군데의 중심부에서 화농 작용을 일으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따라서 1기신병들은 빳다 기합이 가해진 입대식 바로 그 첫날부터 취침시간이 되면 으례 무언의 작업처럼 서로 옆사람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살며시 어루만져 주고 주물러 주는 습성을 지녀 왔고, 또 일주일에 두어 번씩 진해 시내에 있는 민간 목욕탕에 들였을 떄는 동병상련, 서로가 끔찍스런 상처들을 대하면서 탕 밖에서 안마도 해 주고 바늘 끝으로 화농의 부위를 따서 그 속에 응어리져 있는 시커먼 피와 고름을 짜내 주기도 했다. 그런 상태에서도 그들은 계속 빳다를 맞아야만 했으니 이열치열, 상처를 다스린 것은 오로지 빳다 뿐이었다.
분대장들 중에는 바케쓰에 물을 잔뜩 떠놓고(까무러치면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해) 여러 명의 대원들에게 99대씩을 계속 가격한 무서운 분대장도 있었고 '어머님의 눈물', '형제의 눈물' 이라며 빳다를 맞을 때 "충무공 하나', '충무공 둘' '셋...' 하며 대수를 외치게 한 분대장도 있었다.
다음은 기합의 공(功)과 과(過) 대한 얘기가 되겠는데 그러한 기합들로 대부분의 1기생들은 30대에 들어서서 성한 이빨을 가진 사람이 드물었고, 특히 빳다로 인해 대부분의 1기생들은 골병이 들거나 관절을 앓고 있어 비가 내리는 날이면 환부가 쑤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측면과는 달리 대부분의 1기생들은 태형을 방불케 한 그 빳다 기합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맹수의 조련사들 같은 그 분대장과 소대장들을 대장간의 쟁이들에 비유하고 자신들을 그 대장간에서 달구어지고 치여진 강인한 쇠붙이에다 비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훈련을 마치고 수료식을 거행하던 날에 소감을 피력하면서 가슴이 얼마나 뿌듯하고 자신감이 솟아나는지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그처럼 혹독한 훈련과 기합이 없었더라면 그런 생각이 들었겠느냐고 반문하듯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한편 휴전이 된 후 특히 해병교육단과 보급정비단이 있는 진해지구에서는 장병들과 문관들의 입을 통해 이런 말이 전해지고 있었다. 즉 "강복구와 이광수의 기합이 빠지면 해병대의 기합이 다 빠진다." 라는 말이었다. 말하자면 이 두 사람을 기합의 대부라고 하는 상징적인 인물로 자리매김을 한 셈이었다.
창설기의 모병비화에 등장했던 그 화재의 주인공인 강복구씨(함남 북청 태생, 일본 해군 징병1기, 1924년생)는 특히 924고지(일명 김일성 고지) 탈환작전때는 다음과 같은 화제를 남겼다. 즉 당시 3대대 9중대장이었던 그는 9중대가 고지정상을 공격하던 중 적이 투척한 수류탄 파편에 부상당해 쓰러졌는데, 그 때 후송되기를 거부한 그를 위생병과 전령이 억지로 들것 위에 뉘여 하산하려고 하자 그는 중대원들을 지켜보기 위해 들것 위에 꼿꼿이 앉아 시선을 고지 위에 못박은 채 후송을 당함으로써 '지독한 독종, 지독한 해병정신의 소유자'란 말을 듣게 되었다.
해방 후 일본으로부터 귀국하여 해군 2기와 3기 어간의 특별기수로 입대한 후 해병대가 창설될 때 3등병조의 계급으로 해병대로 전입했던 이광수씨(경남 마산 태생, 1930년생)는 해병대의 1기신병들을 교육시킬 때는 분대장으로서도 이름을 떨쳤지만 분대장으로서 보다는 북진기간 중인 1950년 11월 그가 해병대 간부후보생 3기로 선발되어 육군 종합학교를 수료한 후 견습사관의 계급으로 해간 4, 5, 6기생들이 육군보병학교에서 순차적으로 위탁교육을 받을 때까지 그들을 관리하고 있던 사관교육대(장, 김용국 대위)의 구대장을 역임한데 이어 해간 7기부터 11기까지는 교관으로서 근무했고, 12기와 16기부터 21기까지는 중대장으로 근무한 사실들이 훨씬 기합의 화신같은 그의 성가를 높여 준 계기가 되었다.
해병학교의 구대장 또는 중대장 근무를 하는 동안 그에게는 '둘도 없는 명 구대장' '둘도 없는 명 중대장'이란 말이 따라 다니고 있었고, 심지어는 '해병학교의 구대장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극찬의 말을 아끼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가 그러한 평과 명성을 얻게 된 것은 그의 뛰어난 통솔력 때문이었다. 신장 172센티의 건장한 체구에 피통솔자들을 위압하는 부리부리한 형안의 소유자인 그는 임무 수행를 위한 왕성한 책임감과 강한 통제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통설(내지는 정설)과는 달리 자신을 '해병대의 기합의 원조'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예비역 중장 김연상 장군이 그 장본인이다. 김 장군의 입대배경은 창설기의 비화 속에 언급이 되어 있다. 그 당시 3등병조의 계급으로 1기 신병교육대의 분대장으로 임명이 되었던 그는 그 해7월 해간(해병대 간부후보생) 1기생으로 선발되어 육군사관학교에서 6개월 간의 위탁교육을 (육사 9기와 함께) 받은 후 임관과 동시에 하사관교육대의 전술교관으로 임명이 되었는데, 김 장군의 말에 따르면 바로 그 전술교관 근무기간 중에 장차 전투력의 지도적인 역량이 될 우수한 분대장급 하사관의 육성을 위해 심혈을 다했고, 또 6.25전쟁이 발발한 직후 해병대사령부(제주도)로 복귀한 해간2기 보충교육대의 구대장 근무를 할 때 그만큼 피교욱자들을 빳다로 다스렸다는 얘기가 되겠으나 그 정도의 실적만으로는 '기합의 원조'라는 영예로운 타이틀을 취득할 수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해간 2기생들이 사령부로 복귀하여 1개월 간의 보충교육을 받게 된 것은 1950년 1월 27일 시흥에 있는 육군보병학교에 입교하여 4개월 간의 교육과정을 수료한 후 해군사관학교 9차 특교대에서 2개월 간의 보충교육을 받고 있던 중 6.25전쟁이 발발하여 교육이 중단되었기 때문이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傳統과 秘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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