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창설기-장개석 총통이 남긴 말
그 해(1949년) 8월 초 해병대 사령부에서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과 회담을 하기 위해 진해를 방문하는 장개석 총통과 수행원 일행을 영접하기 위해 의장대도 편성하고 예포 발사준비를 갖추는 등 의전행사 준비를 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 당시 우리 정부나 군부에선 의장대를 갖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으므로 부득이 덕산비행장에 주둔하고 있는 우리 해병대에 그 임무를 부여한 것이었다.
그 일을 맡게 된 참모장 김성은 중령은 7월 초순경 신병교육대를 수료한 1기생들 중에서 신체가 건강하고 똘똘하게 생긴 약 40명의 적격자를 선발하여 열병분열행사 준비를 했고, 일제 때 신경 군관학교를 나와 만군 고사포부대에서 근부했던 작전참모 김동하 소령은 1기 신병 중에서 약 30명을 선발하여 통제부 고문단에서 가지고 온 37밀리 포로 예포 발사준비를 했는데, 그 37밀리 포는 공포탄이 없어 실탄을 발사해야 했으므로 김동하 소령은 포신을 수평으로 유지하여 동네산(△43)에 세워 놓은 표적을 겨냥하여 발사준비를 하고 있었다.
장개석 총통이 진해를 방문한 날짜는 8월 6일 이었다. 이날 2시경 자신의 전용기(미령호)를 타고 덕산비행장에 도착했던 장 총통은 출영한 이승만 대통령과 악수를 나눈 다음 이 대통령의 안내로 사열대에 도착, 21발의 예포가 발사되는 가운데 열병을 했고, 의장대의 분열행진을 끝으로 의전행사가 끝났는데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하오"(好)를 연발하고 있던 장 총통은 행사가 끝난 후 온 몸이 구릿빛 그대로인 행사부대 장병들의 불사신 같은 표정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지 독백을 하듯 "나에게 저런 병사들이 1개 사단만 있다면 대만으로 가지 않아도 될텐데..." 라고 했는데, 장 총통이 한 그 말은 귀빈들이 비행장을 떠난 뒤 삽시간에 전 병영에 전파되었다.
그 때 장 총통의 제의로 개막된 2일 간에 걸친 양국 반공지도자의 진해회담의 목적은 태평양반공동맹 결성문제를 타진하는데 있었으나 결국 그 일은 성사가 되지 못했고, 그 때까지 중경에 위치하고 있던 장개석 총통의 국민당 정부와 정부군은 그 해 12월 말경 중국 본토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그 중경으로부터 대만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그리고 대만에서 절치부심하며 대륙반공을 도모했던 장개석 총통은 진해를 방문한 지 1년 후 향년 77세를 일기로 파란 많은 생애를 마쳤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傳統과 秘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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