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16. 재출진(再出陳)
(4) 작전지역(作戰地城)의 특성(特性)
내가 위치하고 있던 전투단 CP는 자유문교(自由門橋) 동남방 약 70O~800미터 떨어진 지점이었는데, 그 CP 바로 옆(西)으로 뻗어 있는 경의선(京義線) 철로 옆 문산-개성간 도로상에는 휴전회담이 열리는 날 아침이면 매우 인상깊은 차량행렬이 지나가고 있었다.
유엔군 협상대표들과 취재기자단이 탄 3~4 대의 승용차와 10여 대의 지프차로 구성된 차량행렬은 유엔군측 협상대표들과 취재기자단의 숙소와 사무실이 있는 문산역에서 휴전회담장이 있는 판문점까지 갔다가 오후 두 세시경이 되면 다시 되돌아오곤 했는데, 미군 헌병들이 탄 그 맨 앞창에는 언제나 조그마한 백기(白旗)가 나부끼고 있었다.
미처 언급을 하지 못했지만 그 해 1952년 봄날(3.17) 한·미 해병대가 중동부전선으로부터 서부전선(장단지구)으로 이동하게 된 것은 휴전회담의 진전에 따라 이루어진 수도 서울방어에 역점을 둔 미 8군의 전투부대 재배치계획에 따른 것이었는데, 그러한 계획 수립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특히 한·미 해병대의 주력부대를 수도 서울의 관문지역인 장단지구에 배치해 줄 것을 희망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판문점 동북방에 배치된 미해병사단도 그러한 기동상의 제약을 받았지만 특히 육군 1사단 15연대가 배치되어 있던 판문점 남쪽의 사천강 전초지대는 동(東)과 남(南) 양면은 임진강, 서쪽은 사천강에 접해 있을 뿐더러 북방에는 판문점을 두고 있어 역사상 유례없는 작전상의 제약을 받고 있는 지역이었다.
즉, 판문점을 중심으로 반경 100미터 이내의 이른바 중립지대로 선포된 그 지역과 문산과 개성을 중심으로 한 각 반경 3마일 이내, 그리고 이른바 평화도로로 명명이 된 문산-개성간 도로 양쪽 200미터 이내 지역에 있어서는 어떠한 적대행위(敵對行爲)도 금지했을 뿐더러 심지어는 탄착(彈着)까지 금하도록 조처한 것이었는데, 이와 같은 제한조처는 물론 양측에 다 적용이 되는 것이었지마는 야간을 이용해서 수송해 온 야포나 탄약 및 병력 등을 중립지대나 평화도로 근처에 방렬하거나 저장 또는 은닉해 둠으로써 아군의 포격과 폭격을 최대한 피할 수 있었던 중공군측이 휠씬 득을 볼 수 있는 조처들이었다.
또한 사천강을 사이에 둔 작전지역은 아군 정면의 적이 그 배후에 평지와 나직한 야산으로 연결된 아군진지를 철저히 감제(瞰制)할 수 있는 덕물산(△288), 천덕산(△203), 군장산(△213) 등의 고지를 두고 있어 포병부대의 관측을 용이하게 했으므로 아군측에 매우 불리한 지역이었다. 그리고 1사단 15연대가 배치되어 있는 동안에는 소강상태를 유지해왔던 그 사천강 전초지대는 해병전투단이 배치된 후부터 중공군에 의한 대대적인 공세가 취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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