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16. 재출진(再出陳)
(9) 청음초(聽音哨)
중공군의 콧대를 납작하게 꺾어 놓고 말았던 3차 추기공세가 있은 후 나는 좌·우일선 대대의 각 전초진지 전방 300~5OO야드 지점에서 2~3개의 청음초를 설치 운용했다.
통상적인 방어개념상 1개 소대 규모의 병력으로 보병대대의 주진지(주저항선) 전방 500~l,000야드 지점의 관측이 용이한 지형에 설치 운용하는 전초진지는 유·무선 통신수단을 이용해서 적의 작전기도를 조기에 발견하여 주진지에 경보해 줌으로써 주진지로 하여금 시간을 획득하게 하는 임무와 적의 활동을 지연시키거나 저지시키는 역할 등을 수행하다가 적이 공격해 올 시에는 전초진지를 포기하고 철수하는 것을 기본 임무로 삼고 있는데, 휴전회담이 한창 진행중에 있던 그 당시의 한국전선에서는 그러한 방어개념에 변화가 초래되어 전초진지를 포기하지 않고 고수(固守)하거나 사수(死守)하는 개념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그와 같은 결과가 초래된 근본 원인은 휴전을 앞두고 조금이라도 유리한 고지를 점령 확보함으로써 군사분계선(軍事分界線)의 설정과 휴전후의 진지방어 및 전쟁재발시의 작전에 그만큼 유리한 영향을 미치게 하려고 했던 쌍방의 촌토(寸土)를 다툰 결사적인 대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시기에 나는 중공군의 2차 공세를 물리친 좌·우일선대대의 전초진지 전방 2OO~300야드 지점에 청음초라는 이름을 붙인 제2의 외곽전초를 설치 운용했다.
그러한 초소를 설치하게 된 목적은 조기에 발견한 적의 작전기도를 유선통신수단으로 전초진지에 알려 아군의 정확한 탄막사격을 유도하여 적의 작전기도를 원천적으로 분쇄함으로써 아군의 전초진지를 보호하려는데 에 있었다.
야간에 한해 운용했던 청음초에는 1개 화력조(火力組)를 배치했고, 탄막사격을 유도한 뒤에는 즉시 후방으로 철수하게 되어 있었다.
한편 청음초를 구상할 때 나는 쌍안경의 필요성도 느꼈다. 내가 그러한 생각을 했던 것은 함정근무를 할 때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칠흑같은 밤에는 쌍안경이 까막눈 안경같은 물건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별이 있는 밤이나 달밤의 경우는 비단 해상 뿐 아니라 지상의 먼 곳까지 관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특히 1, 2차 공세때 만월야를 이용했던 중공군의 습성을 익히 알고 있던 나로서는 쌍안경이 곧 청음초의 중요한 장비가 되리라는 것을 처음부터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령부에 연락을 취하여 쌍안경을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는지를 알아보았더니 재고가 전혀 없다기에 해군본부에 긴급히 요청하게 한끝에 30개를 공급받아 각 청음초에 1개씩 공급하고 나머지는 각 전초진지와 OP 등에 추가 공급을 해 주었다.
그런데 청음초를 운용한 후 중공군의 기습공격은 번번이 분쇄당했고, 또 그들의 활동이 눈에 띠게 위축되자 미 해병사단에서는 청음초(listening point)라는 명칭과 기능 모두가 마음에 들고, 또 그 역할이 만족할 만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고 평하면서 미 해병사단에서도 청음초를 설치할 계획을 추진했는데 미 해병사단에서 그러한 것을 설치한다고 하자 미 1군단과 9군단 및 10군단 등 미 8군의 전 전투사단에서 청음초를 설치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그 당시 미국의 시사주간지인 뉴스위크지에까지 소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무렵부터 미 해병사단에서는 사단장의 특별지시로 사단에 전입하는 대대장급 이상의 지휘관과 참모장교들을 우리 전투단으로 보내어 상황을 청취하게 하는 등 전투단의 실정을 파악하게 했는데, 전투단을 방문했던 지휘관과 참모장교들은 해병전투단에서 설치했다는 청음초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말하면서 깊은 관심들을 표명하고 있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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