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4대사령관 김성은

국방의 멍에 - 16. 재출진(再出陳) (12) 심야(深夜)의 경무대전화(景武臺電話)

머린코341(mc341) 2014. 8. 16. 19:47

국방의 멍에 - 16. 재출진(再出陳)

 

(12) 심야(深夜)의 경무대전화(景武臺電話)

 

  세모에 접어들고 있던 1952년 12월 하순경이었다.

 

  어느 날 밤 나는 경무대로부터 걸려온 뜻밖의 전화를 받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나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경무대 경찰서의 곽영주(郭永周)경위였고, 그가 나에게 한 말은 잠시 전 광화문 앞에서 술에 만취한 해병대 대원 2명이 불경스럽게도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승용차를 정차시켜 승용차의 앞 유리창을 박살을 내는 등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행폐를 부렸다는 것이었다.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 상태에서 그러한 말을 듣게 된 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충격을 받았으나 냉정을 잃지 않고 그러한 행패를 부린 군인들이 분명히 해병대 대원들이냐고 묻고, 그들이 지금 어디에있느냐고 했더니 그 승용차의 기사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총을 들고 차를 세운 군인들이 입고 있는 휠자켓 왼쪽 가슴에 해병대의 마크가 찍혀있다고 했고, 운전기사가 대통령 영부인의 승용차라며 극력 제지했는데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로 승용차에 올라타고 종로 3가로 가자고 한 그들의 말을 선뜻 들어주지 않자 구ENT발로 승용차의 윈도우를 깨뜨려 버렀다는 것이었다.

 

그런 말은 듣고 보니 나로서는 그 이상 꼬치꼬치 물어볼 말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대원들이 그런 사고를 저질렀다고 하니 정말 면목이 없고 송구스럽다는 말로써 사과를 한 다음 내일 아침 직접 찾아 뵙겠다고 했다.

 

  그 당시 경무대 서장으로 있던 김장흥(金長興)씨와 그날 밤 전화를 건 곽영주 경위는 나와 전혀 생면부지한 분들이 아니라 서로 면식이 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직접 찾아가서 사건의 진상을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고 정중하게 사과를 하고 용서를 빌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오전 11시경 경무대 경찰서를 방문하여 김장흥 서장과 프란체스카 여사의 경호담당관인 곽영주 경위를 직접 만나본 나는 그 전날 밤 전화를 통해 전해들은 이야기 외에 보다 소상한 이야기를 전해듣고 민망스럽고 송구스런 마음이 갑절 더 했다.

 

  즉, 그들의 말에 따르면 차를 세운 다음 한 사람은 운전대 옆자리에 올라타고 한 사람은 뒷 좌석에 탔다고 하는데, 그 뒷 자석에 앉은 대원이 "종로 3가로 가자!" 고 하는 말을 기사가 안된다고 말하면서 묵살을 하자 운전대 옆에 앉은 대원이 "안되기는 뭐가 안돼!" 하며 두 구둣발로 앞 유리창을 차서 묵사발을 만들었고, 그런 다음 "우리는 수도 서울을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데 무슨 놈의 차가 이렇게 번들번들해!" 하면서 차에서 내려 어디론가 가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를 더욱 놀라게 했던 것은 그 승용차가 새로 구입한 지 불과 1주일밖에 안되는 '1953년형 캐딜락' 이라는 데에 있었다. 세계 굴지의 자동차 메이커로 알려지고 있던 GMC에서 제작한 캐딜락승용차의 앞 윈도우는 1952년형까지는 2매의 유리로 만들어져 있었으나 1953년형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1매의 유리로 제작된 세계적인 신형승용차였다.

 

  한편 술에 취한 해병들에 의해 저질러졌던 그와 같은 사고에 대해 부대장인 나로서는 백배사죄하며 용서를 빌 수밖에 없었는데, 결국 그 문제는 그날 아침 나를 맞이할 때 수도 서울의 관문을 지키고 있는 우리해병대의 공헌에 찬사를 표한다고 했던 김장흥 서장의 관대한 선처로 아무런 말썽이나 나에 대한 문책도 없었는데, 그 김 서장이 "내가 알아서 처리할데니 염려말고 부대로 돌아가라" 고 했을 때 나의 심정은 솔직히 말해서 마치 죽었다 살아난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내가 무사할 수 있었던 그 일에 대해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위로한 적이 있었다. 즉, 그날 인사를 할 때 김장흥 서장이 우리 해병대에 대해 그러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것처럼 특히 우리 해병대가 경인작전(京仁作戰) 때 빛나는 전공을 세웠고, 또 그 당시에도 수도서울의 관문을 믿음직스럽게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 그런 일을 저지르고서도 용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