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고 돌아오라!" 1968년 1월22일 부산의 제3부두.
1968년 1월 이후 해병대 청룡부대의 전술지역(호이안)
“돼지는 왜 키우는가?”
해병학교의 사관후보생에서 막 소위로 임관을 하고 일주일 간의 휴가를 마친 후 다시 기초반 훈련을 시작했을 때 중대장이 우리들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마치 “웨스트포인트”라는 미국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에서 갓 입학한 생도를 상급생이 “귀관! 소의 정의는?” 하고 묻는 질문이 언 듯 떠오르기도 했지만 나는 수면 부족에다 보리밥 먹고 늘 상 빳다 맞고 뛰던 사관후보생 시절이 생각 나 임관 뒤의 기초반 교육도 결코 만만하지는 않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중대장은 자문자답을 했다.
“돼지를 키우는 것은 잔칫날 잡아먹기 위해서 키우는 거야!”
갓 임관한 초급장교들을 매우 비하하는 말이었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토록 우리를 비하함으로써 끈질긴 잡초처럼 풋풋하게 잘 자라라는 당부의 말로 여겼다.
세간에서는 흔히들 소대장을 “소모품”이라는 표현으로 또는 “제일 위험한 직책”이라는 말로 표현을 하지만 그것은 무모했던 옛날 옛적의 전투가 그러했기 때문이고 지금에야 전쟁도 많이 달라져 마치 예전의 일본군 소대장처럼 대원들 앞에 서서 일본도를 쳐들며 적진으로 돌격 하는 그런 무모한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모품이라는 말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만 수십 명의 생명을 책임지는 바로 그 책임감 때문에 전투 시 동분서주를 하다 미처 자신을 은폐 시키지 못 한 채 총알이나 포탄에 희생 되는 경우와 적에게 지휘자로 노출되어 적으로부터 저격을 당하거나 집중사격을 당해 희생이 되는 수는 더러 있다고 들었다.
기초반 과정을 수료한 우리는 병과를 정하고 모두가 명령을 받은 임지로 각 각 흩어졌고 보병 병과의 초급 장교가 된 나는 처음 도서부대 백령 중대의 소대장이라는 직책에서부터 초급 장교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6개월 후에는 도서부대 인사 장교가 되었고 얼마 후에는 다시 명령을 받아 영천에 자리했던 육군 헌병학교에 위탁교육을 가 몇 개월 후에는 범죄 수사반의 과정을 수료한 헌병장교가 되어 있었다.
1968년 그 해 1월은 유난히도 추웠고 이른 새벽 해안가의 행군은 강한 동해안의 강풍으로 흩날리는 모래에 뺨을 맞아가며 걸어야만 했다.
포항에 위치한 해병대 제 1상륙사단 예하 “월남전 특수교육대”에서의 약 한 달간에 걸친 엄동설한의 훈련은 앞으로 싸우게 될 열사의 환경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었다.
1월 22일 새벽 우리는 드디어 북을 치고 나팔을 부는 환송식을 마치고 월남의 전쟁터를 향해 포항 역을 떠났다.
장교용 객실이 한 칸 주어졌지만 인원이라고는 보병소령 1명, 보병대위 4명, 포병대위 1명, 보급대위 1명 그리고 나를 포함한 소총소대장 요원인 보병중위 8명과 보병 소위 1명이 고작이었으며 모두를 합해야 16명에 불과한 인원이었다.
그리고 나의 경우는 비록 헌병대 수사과장이라는 직책의 발령을 헌병감실로부터 받았으나 현지의 사정은 그렇지 않다는 말을 이미 들은 바가 있었다.
말하자면 그 당시는 경험이 부족한 소위들은 되도록 소대장 요원으로 파월을 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청룡부대에서는 소대장을 해야 할 중위들의 수가 너무 부족해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였으며 중대장을 해야 할 대위들 역시 수적으로 그렇게 여유롭지 못한 형편이라 비록 헌병장교라 할지라도 중위는 소총소대장 그리고 대위는 전투 중대장을 마쳐야 헌병대로 원대복귀를 시켜주어 내 스스로의 각오도 이미 소총 소대장을 하기 위해 전쟁터로 간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바깥 공기와는 다르게 후끈한 열차안의 난방이 그 동안에 얼었던 마음과 육신을 한꺼번에 녹이듯 우리 모두를 나른하게 만들었다.
전쟁터로 향하는 전사들의 객실은 계속 침묵만 흐를 뿐이었고 혹시라도 옆 사람과의 꼭 필요한 대화가 있을 때도 매우 낮은 목소리로 잠시 소곤거릴 뿐 모두가 조용히 있기를 원하고 있었다.
잠시 후 객실의 출입구 쪽에 앉은 한 장교가 어떤 물건을 챙기는지 포장지 뜯는 소리를 내자 내 뿐만 아니라 여러 장교들이 나무라듯 눈살을 찌푸리며 그 쪽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생과 사의 주사위가 던져진 전사들의 신경이 이미 극도로 치달아 올라 있다는 증거였다.
차창 밖으로 눈을 돌려도 아직은 어두워 내가 앉은 반대편의 실내가 거울에 반사되듯 눈에 들어 올 뿐이었다.
“만약 내가 불구가 되어 돌아온다면? 아니야, 그렇게 된다면 차라리 죽어 서 돌아오는 것이 더 낫겠지.”
멀쩡히 살아서 돌아온다는 생각보다는 내 스스로 최악의 경우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가 큰 고민이었다.
곧 차창 밖으로는 웅크린 산들의 모습과 오기종기 모인 마을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떤 집들은 식구들의 아침밥을 짓는 듯 굴뚝에 진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것도 눈에 띄었다.
“아~내 조국, 내 나라의 산하여 모습이여! 이것이 내 영혼에 실릴 너의 마지막 모습이 될지도 모를 일이구나.”
나는 새삼 왜 예전에는 이토록 마음에 와 닿는 내 조국의 풍경들을 예사롭게만 보아 왔던가? 하는 후회스러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부산항으로 향하는 동안 잠시 열차가 서는 역에서는 의례 환송의 프랑카드와 무운을 바라며 잘 다녀오라는 고마운 사람들의 물결이 따랐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 6.25사변이 터졌다.
며칠이 지난 후 나는 아침 등교를 하다가 태극기를 접어 어깨띠를 한 채 도시락을 들고 전쟁터로 가기 위해 학교로 집합하는 나이 든 형들의 모습을 보고 너무나 부러워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같은 동네에서도 많은 형들이 전쟁터로 나갔다.
그러나 몇 개월이 지나자 잠시 휴가를 다녀갔던 방앗간 준이 형은 영영 돌아오지를 않았고 철공소의 외아들인 철이 형은 한번도 집에 다녀 간 일 없이 전사 통보만 날라 왔다. 다리를 약간씩 절름거리는 방앗간 아저씨는 그로부터 말문을 닫다 시피 했고 철이 아저씨는 오히려 말소리가 커지고 술을 찾는 일이 잦아졌다고 동네 어른들은 수군거렸다.
그로부터 18년 후 이제 나는 내 스스로가 방앗간 준이 형처럼 그리고 철공소의 철이 형처럼 총을 잡고 전쟁터로 나가야하는 입장이 되었다.
열차 속의 내 결심은 “사지를 잃는 불구가 되느니 차라리 죽어서 동네 형들처럼 영원히 모습을 감추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는 비장한 각오를 다시 한번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