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장교 글/해간35기 구문굉

"불꽃처럼" (나의 해병대 일기) (2) 부산의 제3부두

머린코341(mc341) 2015. 1. 15. 09:22

"불꽃처럼" (나의 해병대 일기) (2) 부산의 제3부두

 

배에 승선하는 해병대 용사들

 

우리를 실은 열차는 부산의 제 3부두에 서서히 들어서고 있었다.

 

포항에서 출발한 해병대뿐만 아니라 하루 전 청량리에서 출발한 육군 장병들도 함께 승선을 하고 월남으로 가야했기 때문에 비슷한 시간에 도착하는 부두의 임시 종착역에는 생각보다 많은 인파가 몰려 부대와 계급과 이름을 쓴 피켓을 흔들며 속도를 줄인 열차를 따라 움직였다.

 

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닐 때 부산의 영주동에 있는 영선고개를 넘나들며 걸어서 학교를 곧 잘 다녔기 때문에 항상 부산의 항구들을 내려다보며 자랐다. 그래서 나는 6.25 사변이 났을 때도 제 3부두는 수 만 톤급의 외항선들이 군인들과 물자들을 실어 나르느라 붐볐던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이제는 내 자신이 제 3부두의 주객이 되었으니 나는 이미 내 운명을 예고라도 받았던 것처럼 느꼈다.

 

비로소 그렇게도 조용하기만 했던 열차 안의 장교들도 술렁이기 시작하며 모두가 누구를 찾는 것처럼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으나 나는 집이 서울로 이사를 간데다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아예 환송을 나오지 말라는 당부를 했기 때문에 오로지 다른 사람들의 환송을 구경하는 입장이 되었다.

 

잠시 나는 무심하게 차창 밖을 내려다 보다 피켓도 없이 열심히 누구를 찾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머리가 파뿌리 같은 할머니 한 분을 보았다.

 

하얀 치마저고리에 흰 목수건을 두른 할머니의 검은 얼굴에는 세월을 말하듯 굵고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고 누군가를 애타게 한 번이라도 더 보고 떠나보내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은 예사롭게 여겨지지가 않았다.

 

식민지 시대를 살아오면서 2차대전을 맞았던 남편의 징용과 큰 아들의 6.25전쟁 그리고 작은 아들의 월남전까지 맞게 된 그 아픔을 저 깊은 주름 속에 혹시라도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사실상 인류의 역사는 힘의 논리로 점철 되어 있다.

 

제 아무리 평화를 외쳐도 평화를 외친 역사속의 민족은 결국 패자가 되었거나 불이익을 당했던 경우가 허다했으며 침략자는 승리자가 되기 일쑤였다.

 

말하자면 힘의 논리가 어떤 논리보다도 우선한다는 역사의 가르침을 우리는 외면할 수도 없거니와 모스크바에서 출발하여 북경과 뉴델리를 거쳐 파리에 입성 할 것이라는 공산주의자들의 호언장담과 모든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는 투쟁의 결의를 다짐하는 공산당 선언은 국시를 반공으로 하는 우리로써는 결코 이 세상의 어떤 곳에서건 그 존재 자체가 용납이 될 수 없었던 이데올로기였다.

 

나는 증조부께서 자주 하셨다는 말씀이 떠올랐다.

 

“작은 물고기는 중간 물고기의 먹이요 중간 물고기는 큰 물고기의 먹이니 라”라는 한자 성어로 된 말씀이셨다.

 

힘없는 백성은 역사 속의 노예로 밖에 등장하지 못 했던 것이 사실일 바엔 지금 나를 지탱하고 있는 정신이 결코 나약하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을 하자 잠시 나도 모르는 사이 온몸에 전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기차에서 내려 또 다시 북을 치고 나팔을 부는 부두 가에서의 환송식을 가진 후 출발을 하기 위해 승선을 했다.

 

뱃고동을 울리며 떠나는 이별은 언제나 슬프게 느껴진다.

 

나는 그런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내 자신에게 냉정하기 위해 선상의 갑판 위에서 모두들 군가를 부르며 손을 흔들고 있을 때 얼른 장교 선실로 들어와 버렸다.

 

이렇게 하여 삼천만의 자랑인 해병대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국익을 위해 매달 한번씩 육군과 함께 실려 가고 또 실려 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