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처럼" (나의 해병대 일기) (10 ) 아! 비극의 그날
한 대원의 희생에는 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게 된다.
1968년 5월 초순에 있었던 일이다.
원래는 청룡부대(여단)본부에서 전투중대로 하여금 그 수고의 대가로 일주일간씩 아리널이라고 하여 다낭 북쪽 차이나 비치에서 해변휴양을 하도록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그러나 유독 27중대는 그 차례가 늦어지고 있어 대원들은 이미 다녀 온 다른 중대들에 대한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고 있어 그 불만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물론 작전 지역에서 1개 전투 중대를 일주일간씩이나 뺀다는 것이 상부의 입장으로써도 매우 중대한 결심이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해는 하고 있었지만 27중대의 입장으로써는 죽도록 자신의 작전은 물론, 벌써 2개월이 가깝도록 다른 대대나 중대의 작전에 까지도 마치 펑크를 때우듯 끼어들도록 했기 때문에 더욱 불만이 컸다.
한편 호이안 지역으로 이동을 한 후에 27중대로 배치되어 온 나와 다른 대원들은 먼저 온 고참들을 보고 “야! 이곳에 오기 전에 바탄강(추라이 지역에 있는 반도)에서 야자나 따먹고 얼마나 잘 놀았으면 그래 이지경이야? 놀았던 놈 따로 있고 여기 와서 생고생만하는 놈 따로 있네...”라는 불평을 자주했다.
실제로 5대대는 전 부대가 작년 8월 포항에서 추라이 지역으로 바로 이동을 했던 정예대대였으나 그 당시는 전연 전투지에서의 경험이 없었던 터라 작전상 그 적응 기간을 몇 개월 동안 두지 않을 수 없었고 이에 대해 다른 대대가 5대대를 생각할 때는 이 곳 호이안 지역에 오기 전 추라이 지역에서는 아예 쉬고 있었던 대대로 여길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드디어 우리 27중대에 휴양의 명령이 떨어졌다.
다낭의 시원한 북쪽 해변, 총알도 날라 오지 않고 지뢰도 없는 모래밭에서 맘껏 뒹굴며 놀게 될 그 기분은 상상만 해도 날아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리는 한밤중까지 먼저 휴가 기간동안 비다시피 하게 될 중대 진지의 방어 대책을 의논하고 또 가져가야 할 짐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물론 중대를 지키고 남아 있어야 할 소수의 대원들에게는 미안한 생각도 들었지만 자발적으로 남겠다는 대원들도 더러는 있었고 특히 제대로 인해 다른 전우들 보다 귀국이 빨라진 대원들의 양보에 의해 별로 문제 되는 것은 없었다.
당일 아침. 오전 8시 30분까지 온다던 수송대 트럭이 약속 시간보다 15분이 더 지났는데도 영 나타날 기미가 없어 매우 초조한 마음이 들던 가운데 그 내용을 알아보았다.
공교롭게도 세대의 트럭이 시간에 맞추어 오다가 그 중 두 대가 길에서 고장을 일으키는 통에 나머지 한 대도 수리를 도우기 위해 합류를 하고 모두 함께 애를 쓰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때마침 두 대씩이나 길 위에서 고장이라니?
이거 영 무엇인가는 잘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는 예감이 스치더니 아니다 다를까? 화기 소대장이 급히 짐을 풀고 곧 전투준비를 한 뒤 출동을 해야 한다고 돌아다니며 외쳐 어안이 벙벙했다.
나는 잠시 후 슬며시 화가 났다. 나 같으면 중대장이 직접 소대장들을 불러 놓고 들떠 있는 중대의 기분위기를 일단 가라앉히기 위해서라도 직접 위로의 말과 출동을 해야 하는 자초지종의 얘기라도 한마디 한 후 명령을 내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였다.
그러나 나는 곧 중대장인들 우리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싶기도 하고 책임으로 보아도 소대장들 보다는 더 큰 책임을 지고 있어 오히려 더 괴롭겠다는 생각이 들어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더욱 자세한 내용도 내가 동분서주 짐을 빨리 풀라고 외치는 화기 소대장에게 급히 물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른 아침부터 미 해병대 아메리칼 사단이 1번 국도의 동쪽에서 작전을 하면서 우리 5대대 0중대로 하여금 퇴각하는 월맹 정규군들을 소탕하기 위한 블라킹(차단 작전)을 하도록 요청을 해 와 급히 출동을 했는데 바로 몇 십분 전 블라킹을 하던 0중대가 그만 밀려오는 월맹 정규군들을 공격하다 오히려 역습을 당해 숲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제미 씹할 트럭 타고 미리 가버렸으면 다른 중대가 갈 거 아냐”
“좌우지간 우리 중대는 복도 지질이 없어”
“아니야, 중대장이 대대장한테 너무 찍혔어”
“고생은 할대로 다 하고 맨 날 찬밥 신세야”
대원들은 잠시 불평들이 많았지만 곧 분대별로 묶었던 큰 짐 덩어리를 풀기 시작했고 첨병소대를 서게 된 1소대장인 나는 미 해병대의 수륙 양용 차 두 대를 앞세워 보전협동으로 재빨리 출발을 할 준비를 했다.
문제가 생긴 그 지역은 우리 중대가 예전에도 들락거린 적이 있어 지리에는 어느 정도 익숙한 곳이었으나 사실 그 부근은 적의 1개 공병중대가 위치한 곳이라 한번은 우리 중대가 긴장을 늦추고 있다가 매우 난처했던 경험도 했던 곳이었다.
우리는 수륙 양용차가 급히 움직이자 평소보다는 매우 빠른 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평소의 기동으로는 걸어서 대략 우리 중대로부터 50분 정도가 걸리는 곳이었으나 이런 빠른 걸음으로라면 10분 정도는 단축시킬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40분 쯤 후 드디어 0중대 대원들이 숲으로부터 빠져 나와 있는 모습들이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전투를 하다 나온 대원들이 아니고 0중대 본부에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급히 나와 부상자들을 처리하느라 숲 속으로 들락거리는 대원들 같았다.
나는 일단 숲이 전개되는 입구에 우리 소대원들을 횡대로 세우고 수륙 양용 차는 중앙에 전진 배치를 시키는 한편 다소 V자형을 거꾸로 둔 쐐기 모양의 형태로 우리가 그 후미를 펼쳐 따라 들어가겠다는 보고를 중대장에게 했다. 중대장은 그러라는 대답을 했고 나는 나대로 그 이전에 직접 0중대 대원들로부터 자세한 상황을 일단은 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나에게 얘기를 해줄만한 0중대 대원들을 잠시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잠깐 사이 갑자기 우리 소대 첨병분대 앞에서 내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미 해병대 수륙 양용 차 두 대가 왈칵 앞으로 이동하고 있는 소리와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나는 무슨 일인가 하고 쳐다보았더니 수륙 양용 차 옆에는 내가 모르는 0중대 소속인 듯한 런닝셔쓰 바람의 한 장교가 수륙 양용 차들을 빨리 앞으로 전진 해 나가라는 손짓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기가 막혔다.
그 곳으로 돌진하면 물이 많은 논바닥에 처박아 수륙 양용 차가 앞으로는 물론 뒤로도 빠져나오기가 힘 든 곳이라는 것을 나는 두 차례나 경험을 해 보았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였다.
거리는 좀 멀었지만
“그 곳은 앞으로 가면 진흙탕인데 빠져요!”
“지휘자는 나요!”
하고는 큰 소리로 그 런닝셔쓰 장교에게 뜻을 전하려 했으나 미처 큰 소리로 외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대의 수륙 양용차가 벌써 물이 흥건한 논바닥에 처박았는지 체인의 헛도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나는 아무리 다급해도 그렇지 0중대에서는 우리들에게 상황을 자세히 알려주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고 그 다음의 행동은 어디까지나 27중대의 중대장에게 맡기는 것이 당연 했으나 처음부터 첨병소대를 이 모양으로 해놨으니 자연히 시간만 지체하는 꼴이 된 것은 물론 나로서는 김이 팍 새어 마치 예봉의 열기가 식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즉시 잠시 벌어졌던 상황을 중대장에게 보고하고 수륙 양용 차 없이 진격하는 방법을 모색한 후 다시 보고 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앞을 쳐다 보았는데 이번에는 그 런닝셔쓰 장교가 없어진 대신 0중대 진지에 남아있다 뛰어 나온듯한 내 동기생인 이 중위가 나를 향해 급히 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이 중위가 왜 빨리 숲으로 들어가지 않느냐는 짜증스런 소리를 내게 다가오며 큰 소리로 하는 것을 들었다.
나도 나름대로는 중대장에게 수륙 양용 차는 포기하고 이제 2열종대로 들어가겠다는 보고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또 아무리 다급한 처지라 하더라도 나는 어디까지나 우리 중대장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입장이지 이 중위나 0중대 장교들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우리 소대를 2열종대로 다시 서게 한 다음 나는 이 중위에게 0중대 대원 몇 명을 앞세워 블라킹을 하는 장소 부근까지 우리를 인도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나로부터 멀찌감치 중대 대열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중대장에게 다시 그 내용을 보고했다.
결국 우리 소대의 첨병분대가 0중대 대원들의 뒤를 따랐고 긴 중대의 대열이 차츰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긴장을 해 들어갔던 대열의 선두가 겨우 숲을 향해 20여 미터쯤 들어갔을 때였는데 그만 ‘꽝~’하는 소리와 함께 적이 쏜 로켓 한 발이 대열의 맨 앞줄에서 폭발을 했다.
불행하게도 앞장을 섰던 0중대 대원 두 명이 모두 쓰러지는 것이 보였고 뒤 따르던 우리 소대는 멈칫하며 모두가 제자리에 웅크려 잠시 앉았다가 급히 그 쪽을 피해 우회 진입로를 찾아 무작정 숲 속으로 전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불과 100여 미터 정도 진입을 했을 때 중대장으로부터 무전이 왔다.
내용은 제자리에서 경계를 하되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는 더 이상 진입을 하지 말고 대기를 하라는 것이었다.
사실상 상황은 이미 끝이 난 후며 0중대 대원들은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에서 거의 모두가 빠져 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용감하기로 소문난 0중대장 방 대위도 팔에 총을 맞아 하얀 붕대를 칭칭 감고는 얼굴을 찌푸린 채 숲을 빠져 나가기 위해 우리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물론 내가 인사를 했으나 그는 아무 반응도 없이 그저 찡그린 얼굴 표정으로 힐끗 한번 나를 쳐다보고는 그대로 지나 나갔다.
그러나 다음부터 시야에 들어오고 있는 광경은 차마 무어라 말 할 수 없는 참혹한 것이었다.
적을 발견하고 뒤 쫓다 머리에 총을 맞았다는 소대장과 그리고 많은 소대원들이 이미 시신이 된 채 들것에 실리거나 대원들의 손에 끌려 줄줄이 이어 나오는 비통한 광경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한 대원이 전사하면 세 사람의 대원이 전사자를 위해 붙어야 했다.
두 사람은 시신을 들어야 하고 한 사람은 장비를 모두 챙겨 그 옆에서 경계를 하며 따라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 오늘은 하늘도 무심한 날이구나!”
이미 상황도 끝이 난 뒤라 우리는 비참하게 죽어간 전우들의 영혼에 비통한 마음을 억누르며 정중히 묵례를 하는 수밖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우리가 나중에 사 자세히 들었던 내용이지만 그렇게 0중대가 허무하게 적들에게 당했던 것은 갑작스런 적들의 공격에 모두가 반사적으로 바싹 마른 사질토 위에 엎드려 응사를 하게 되었는데 어쩐 일인지 총알이 나가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초기에 나왔던 M-16 소총의 약실이 너무 예민해 흙먼지가 조금이라도 끼게 되면 총알이 나가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항상 약실의 뚜껑을 닫고 다니라는 말들을 자주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뚜껑을 닫고 다녔다 해도 사격을 했을 때는 첫 발에 바로 약실 뚜껑이 열려버리기 때문에 땅에 엎드려 계속 사격을 하자면 그 미세한 흙먼지를 어떻게 수습 할 여유나 도리는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블라킹을 했던 바로 그 숲은 대나무가 매우 많은 지역이었다.
우리도 경험을 했던 적이 있지만 한국에서 가져간 2차대전 때의 C-10 무전기로는 대나무 숲 속에서의 통화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중대장이 무전기를 통해 지휘를 할 수 있는 어떤 입장도 될 수가 없었던 것이 또한 불운을 가져 왔던 것이다.
결국은 이로써 0중대의 비극도 27중대의 휴양도 영영 끝이 나고 말았지만.. 우리 청룡부대의 모든 전투부대는 이를 계기로 흙먼지가 끼어도 총알이 잘 나가는 M-16 소총의 신형 약실 교체는 물론 어디에서도 꽝 꽝 잘 울리는 C-25라는 신형 FM무전기를 미 해병대로부터 급히 지원을 받게 되었다.
불운했던 5대대 0중대.
나는 지금 그 때를 상기하며 다시 한 번 그 당시 희생당했던 모든 전우들에게 고개 숙여 명복을 빈다.
(계속)
'★해병대 장교 글 > 해간35기 구문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꽃처럼" (나의 해병대 일기) (12) 중대를 구한 김중사 (0) | 2015.02.04 |
---|---|
"불꽃처럼" (나의 해병대 일기) (11 ) 해변 휴가와 B-52 폭격 (0) | 2015.02.04 |
"불꽃처럼" (나의 해병대 일기) (9) 저승의 색갈 (0) | 2015.02.02 |
"불꽃처럼" (나의 해병대 일기) (8) 어느 소대장의 죽음 (0) | 2015.02.02 |
"불꽃처럼" (나의 해병대 일기) (7) 슬픈 호수 마을 (0) | 2015.0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