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처럼" (나의 해병대 일기) (11 ) 해변 휴가와 B-52 폭격
B-52 폭격기의 위용
1968년 5월 중순 무렵이었다.
이번에는 구정공세 때처럼 결사항전을 위해 떠났던 그런 방어 임무가 아니라 청룡부대(여단)본부의 북쪽 끝 외곽 지역의 방어를 위해 임시로 떠나는 비교적 안전한 소대파견 방어임무였다.
청룡부대 본부는 동쪽으로는 남지나해를 끼고 서쪽으로는 강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뻗은 제방의 사이에 위치했다.
그리고는 남북으로 된 그 경계의 끝은 다시 인공으로 제방을 쌓아 북쪽으로는 정문을 세우고 남쪽으로는 막아 놓았기 때문에 적으로부터 방어를 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그 지역의 폭이 너무 넓고 길었기 때문에 청룡부대 본부에서도 특공중대에만 의지하여 경비를 하도록 하는 것은 너무 무리라 여겨 한동안은 사정을 보아가며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5대대의 1개 중대나 아니면 1개 소대를 차출하여 주로 북쪽의 제방 끝자락에 배치를 하곤 했다.
결국 3월경 내가 소대장을 하는 우리 27중대 1소대는 북쪽 약 300m정도의 제방 끝자락을 맡도록 파견명령을 받았고 우리 모두는 변화 없는 중대 수색작전이나 야간 소대 매복보다는 차라리 이러한 파견근무가 더욱 여유롭게 느껴져 대략 열흘 정도의 파견 근무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우리와는 대조적으로 중대진지에 남아 매일 쉴 새 없는 작전에 투입 되면서도 이틀에 한 번씩은 매복에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2소대와 3소대에 다소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구정공세를 당했을 때 디엔반 군청으로 우리 소대원 21명을 이끌고 내가 결사대로 나갔던 일을 생각하면 그에 대한 보상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우리도 예기치 않게 불시에 적의 공격을 받지 않는다는 어떤 보장도 없었지마는 우선 생각하기에는 그렇게 여겨졌던 것이다.
하기 사 얼마 전 우리 중대 진지에서 억울하게 죽은 장 중위가 만약 사고가 났던 그 날밤 내 대신 차라리 위험하지만 매복이라도 나갔었더라면 오히려 생명을 건 졌을 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을 하면 사실 어떤 곳에 있던지 간에 죽고 사는 것은 오로지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는 없는 일이라 생각되기도 했다.
파견을 나간 지 며칠 후 중대본부로부터 지시가 왔다.
내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다섯 시간 동안 지난번 취소되었던 일주일 간의 해변 휴가를 대신하여 중대원 모두 청룡부대 본부의 해변에서 해수욕을 할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제에미 씨벌헐 놈들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마는 거지, 다른 중대들은 일주일 동안 해변 휴가를 그것도 차이나 비치에서 다 찾아 먹었는데 그래 우리 중대는 겨우 다섯 시간 동안 그것도 바로 코앞의 해변에서 해수욕을 한다고?”
“아니야, 해변으로 가는 도중 또 출동명령이 떨어질 건데 뭐”
대원들은 한편으로는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난 일들을 돌이키며 푸념들을 했다.
다음날 아침 시간에 맞추어 소대원들을 인솔하고 지정된 해변에 이르니 벌써 해변에는 청룡부대 본부의 몇몇 장교들이 서투른 솜씨로 수상스키를 타느라 수색대의 보트에 줄을 길게 매달고는 물보라를 일으켜가며 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차츰 거리가 좁혀지자 처음 5대대가 파월이 되었을 때 우리 27중대를 지휘했던 중대장이 보였다.
송 대위는 내가 27중대로 배치되기 전 이미 27중대를 떠났던 사람이지만 내가 후보생교육을 받았을 때의 우리 중대장을 했던 분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그야말로 누가 보아도 훌륭한 해병대 장교였고 더욱이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군사반은 미 해병대에서 마친 엘리트 중의 엘리트 장교였다.
그리고 그는 월남에 와 중대장을 하던 중 이미 미국 은성 무공훈장도 받았던 터라 여러 사람들의 부러움과 촉망을 한 몸에 받고 있었는데 그만 몇 몇 대원들의 예기치 못한 여성포로 강간사건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조기 귀국을 당해야 할 입장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거의 모든 27중대 장사병들은 물 밖에 잠시 나온 예전의 자기 중대장 송 대위에게 다가 가 인사를 했고 그런 후 대열은 다시 우리가 머물 수 있게 미리 천막을 쳐놓은 장소를 향해 좀 더 남쪽방향으로 이동을 했다.
미 해병 앵그리코맨 피터는 미국의 동북쪽 끝 메인 주에 고향을 둔 촌놈이었지만 그 스타일과 인물이 빼어나고 매너가 좋아 특히 나와는 매우 친숙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그는 언제 준비를 했는지 에어 매트(공기 침대)에 바람을 넣어 와서는 중대를 떠나있는 내가 수고를 많이 한다면서 내 앞에다 가져다 놓았다.
나는 고맙다고 하면서 네 누이에게 프로 포즈를 하겠노라는 농담을 하고는 서로가 웃었다.
그는 언젠가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숲이 우거진 강가에서 찍은 자기 누이의 사진을 내게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피터와는 매우 다르게 살이 너무 통통하게 쪄 실망을 했던 적이 있었다.
나는 공기 침대를 타고 한참을 놀고 있었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청룡부대 본부의 하사관 세 명이 나에게 다가와 인사를 하고는 자기들이 수류탄으로 고기를 잡으려고 하는데 자리를 잠시 피해 줄 수 없느냐고 양해를 구해와 나는 마침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생각으로 그러라고 하고는 나도 여러 대원들 틈에서 구경꾼이 되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수류탄을 던져봤자 그 거리가 뻔한데 이런 옅은 해변에 무슨 고기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섰는데 수류탄이 터져 물기둥이 서자 배를 허옇게 드러내며 수많은 생선들이 기절을 한 채 물 위로 떠올라 그야말로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하긴 몇 개월 전 내가 우리 소대를 지휘하여 이 곳 주민들을 모두 피난길에 오르게 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바로 이 곳이 어촌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선도 집도 모두가 사라진 채 오로지 주인 없는 객들만 모여 부산을 떨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내가 어릴 때 겪었던 6.25사변의 상흔들이 잠시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물 밖에서 시간을 보내다 수류탄으로 고기를 잡던 하사관들이 가고 없자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갔다.
잔잔한 바다 위에 띄워놓은 공기 침대에 배를 깔고 그 뜨거운 뙤약볕을 등허리에 받으며 잠시 어린 시절 부산의 송도 해수욕장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친구와 함께 보트의 노를 저으면 물살을 빠르게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와 노를 젓느라 힘을 쓸 때마다 불끈불끈 솟아오르는 근육들은 많은 주위 사람들의 눈길을 모으기에 충분 했고 우리는 그것을 은근히 자랑으로 여기며 더욱 신이 났었던 어린 시절이 그리웠다.
잠시 후에는 갈증을 느껴 물 밖으로 나왔다.
작전을 나가 수통의 물을 세 개나 비웠는데도 갈증이 나 포탄이 떨어져 생긴 물웅덩이의 물도 마다 않고 약을 타 마시던 기억을 하며 수통의 물을 마 악 마시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멀리서 ‘쿠~웅 쿵 쿵 쿵 쿵..’ 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리고 있었다. 나는 얼른 남서쪽의 먼 곳으로 눈을 돌렸다.
내 추측으로는 12km쯤 떨어진 지역에서 포탄을 싣고 대열을 지어 이동하던 아군의 긴 차량 행렬이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폭발을 하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그 이유는 흙먼지가 일 열을 지어 차례대로 하늘을 향해 계속 치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이런 변이 있을까? 포탄을 실은 차량의 행렬이라면 미 해병대 차량들 밖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무척 마음이 불안해짐을 느끼면서 아직도 끝나지 않은 그 폭발의 광경을 계속 지켜보고만 있었다.
채 30분쯤이나 지났을까?
하늘을 뒤덮었던 흙먼지가 마치 소나기를 몰고 오는 먹구름처럼 바람들 타고 우리가 있는 해안으로 빠른 속도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하늘에서 작열하던 태양은 간 곳이 없어지고 오로지 칠 흙 같은 어둠만이 우리의 주위를 뒤덮고 있었다.
물 속에 있던 대원들은 모두 추위를 느껴 물 밖으로 나왔고 우리는 이제 더 이상의 해수욕도 할 수가 없는 이상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결국 우리 27중대는 일주일 간의 해변 휴양이 다섯 시간짜리 해수욕으로 바뀌었고 그나마 그것도 알 수 없는 이유로 해서 세 시간짜리 해수욕으로 끝이 난 것에 대해 한 번 더 실망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우리는 다시 군장을 꾸려 터벅터벅 각자의 자리로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들었던 얘기로는 이 날 미국이 실전에서는 한 번도 사용해 보지 못 했던 B-52 폭격을 우리 청룡부대 작전지역의 남쪽에 붙은 베리어 반도라는 곳에 처음으로 퍼부어 실험을 해 보았다는 것이었다.
사전 월남 정부의 승인을 받은 후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로부터 출격한 B-52폭격기들이 그야말로 베리아 반도를 초토화를 시켰던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그 효과의 확인을 위해 미 해병대만이 직접 들어 갈 수 있었다는 사실도 전해 들었는데 폭격 지점의 반경 4km 내에는 아군의 진지가 없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는데도 4km 반경 바깥에 있는 우리 청룡부대의 어떤 벙커 하나가 무너져 대원 한 명이 깔려 죽었다는 확인 할 수 없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물론 당시로는 미확인 소문에 불과 했지만 B-52라는 폭격기는 GMC 150대분의 폭탄을 실을 수 있고 양 날개 길이가 끝에서 끝까지 150미터나 되며 워낙 고공에서 폭탄 투하를 하기 때문에 실제 폭격하는 비행기가 보이지 않는 수가 많다는 다소 과장 된 얘기들을 많이들 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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