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人生旅路 - 6. 최고위원
(10) 김한필 선생
최고회의의 해체식을 앞두고 가졌던 박 대통령과의 개별면담을 마친 직후 나는 문득 보통학교(국민학교) 1학년 때의 담임선생이었던 김한필 선생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라 차제에 그 옛 스승을 서울로 모셔 사은의 정을 표하고 싶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은 나와의 개별면담 때 새로운 마음의 전기(轉機)를 굳히기 위해서라도 고향이 있는 사람은 고향으로 가서 꼭 찾아볼 사람을 찾아보고 또 정리해야 할 일이 있으면 정리를 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했던 박 의장의 인간미 담뿍 담긴 말을 듣고 은연중 내가 최고회의에 몸담은 후에 재회를 한 적이 있던 그 김한필 선생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국민학교 1학년 때의 은사였던 그 김한필 선생은 8·15 후엔 영암중학교의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으나 그 후 고등학교가 병설이 된 그 영암중학교가 5·16 후 경영부실학교라는 이유로 폐교가 되는 바람에 실직을 했다가 내가 최고위원으로 임명된 후 그 학교의 재건이 실현됨으로써 다시 그 학교의 교사로 복귀하게 된 분이었고, 또 그 학교의 재건 과정에서 정말 오랜만에 그 은사를 만나 뵐 수가 있었던 것인데 그 당시(1963년) 그 은사의 연세는 이순(耳順)이었고, 내 나이는 37세였다.
마음을 굳히게 된 나는 기왕이면 국군의 날 행사와 전국체전 행사가 열리는 시기에 모셔 와서 구경을 시켜 드리는 것이 좋겠다 싶어 날짜를 그렇게 잡은 다음 그 당시 서울에 자주 내왕하고 있던 소학교 때의 동기동참생 친구인 박문형(朴戈衡)씨를 만나 내 자신의 그러한 뜻을 밝히고 협조를 요청했더니 그는 쾌히 그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생각 같아서는 내가 직접 시골로 내려가서 모시고 올까도 싶었지만 공교롭게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그 친구에게 나를 대신해서 그 은사를 서울로 모시고 와 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해 9월 29일 마침내 그 은사를 서울에서 맞이하게 된 나는 시내에 있는 깨끗하고 조용한 여관에 그 은사를 모셔 놓고 기성복 한 벌과 모자와 구두 등을 사 드려 착용을 하게 한 다음 그 이튿날 아침 박 의장에게 고향에 계시는 옛 은사 한 분을 서울로 모시고 왔다는 말을 했더니 "요즘 젊은 사람들 스승을 알지 못하는데 강 위원장 참 좋은 일을 했군."하면서 모처럼 상경을 했으니 내일 국군의 날 행사 구경을 시켜 드리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하기에 그러잖아도 그렇게 해 드릴 작정이라고 했다.
한편 그 날 저녁 최고위원과 장관 몇 분을 초대한 음식점에 그 스승을 모시고 갔던 나는 그 스승을 상석(上席)에 모셔 놓고 극진한 예우를 하며 음식 대접을 해 드리는 것으로 상경 2일째 날을 보냈다.
10월 1일 국군의 날 아침이 되자 나는 김한필 선생을 모시고 행사가 거행되는 서울운동장(지금의 동대문운동장)으로 가서 로열 박스 입구에 대기하고 있다가 박 의장이 입장을 할 때 소개해 드렸더니 박 의장께선 다정한 말씨로 "김한필 선생이시지요. 법사위원장으로부터 말씀 잘 들었습니다."라고 하면서 악수를 청한 다음 "서울에 계시는 동안 편히 잘 쉬고 가시지요." 했고, 그 옆에 서 있던 육영수 여사도 공손한 말씨로 김한필 선생과 간단한 수인사를 나누고 로열 박스로 걸음을 옮겼다.
상경 4일째인 10월 2일에는 국군의 날 행사 계획의 일환으로 거행된 공군부대의 에어쇼 행사를 구경시켜 드리기 위해 은사를 모시고 한강변(흑석동)의 관람장으로 갔는데, 그 관람석에서도 김한필 선생은 박 의장 내외분과 인사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그 날 오후 나는 은사를 모시고 그 다음 날 전주(全州)에서 개최되는 전국체전 개막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최고위원들과 장관들이 타고 가는 특별기동차 편으로 전주로 향했는데, 그 기동차내에서 나로부터 김한필 선생에 대한 소개를 받은 최고위원들과 장관들은 다들 놀랍고 부러운 일이라며 김한필 선생파 일일이 악수를 교환했다.
그 날 전주에 도착했던 나는 김한필 선생을 귀빈숙소에 모시도록 세심한 배려를 했고, 그 다음 날 오전 체전 개막식 행사가 끝난 뒤 그 개막식 행사에 임석했던 박 의장이 상경을 하자 나는 은사를 모시고 동창생 박문형 씨와 함께 전남 도지사가 제공해 준 승용차를 타고 광주(光州)로 향했는데, 광주에 도착한 후에는 사전에 초대해놓은 도지사를 비롯한 도내 주요 기관장들과 회식을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진 다음 그 곳에서 은사와 작별을 했다.
다음은 그 후에 전해들은 그 은사에 관한 후일담이다. 그 때 나로부터 그러한 대접을 받은 김한필 선생은 이승을 하직할 때까지 상경 중 내가 찍어서 드린 사진이나 나와 함께 적힌 사진들을 자랑스럽게 꺼내 보이며 "그 제자 덕분으로 너무나 큰 호강을 했다네.","이승에서 교사를 한 보람을 그 때처럼 감격스럽게 느낀 적이 없었어."라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나 자신도 그 때의 일을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다음 얘기는 최고회의가 해체된 후 내가 합동참모본부 전략정보국장으로 내정되어 있을 때에 있었던 일이다. 정식발령을 기다리며 잠시 집에서 쉬고 있던 나는 어느 날 저녁 8시경 대통령 비서실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고 청와대로 향했다. 비서실의 전갈에 따르면 대통령 각하께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청와대 회의실로 나와 달라는 것이었다.
이윽고 비서실장의 안내를 받아 회의실로 들어선 나는 박 대통령이 좌정해 있는 그 의자 바로 옆에 놓여 있는 빈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그 회의실의 한쪽 편엔 당 의장을 위시한 주요 당직자들이 앉아 있었고, 다른 한쪽 편에는 청와대 비서진이 앉아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박 대통령은 당에서 마련한 사법부(司法府)와 법무부의 인사개편안을 가지고 논의하고 있는 중이라면서 전직 최고회의 법사위원장으로서 개편안에 대한 의견을 즘 피력해 달라고 했다. 그리곤 나와는 반대편쪽 의자에 앉아 있는 당 의장에게 그 개편안을 나에게 보여 주라고 했는데, 그 개편안을 잠시 일별해 본 나는 그 개편안이 대법원장과 법무장관을 비롯한 사법부와 법무부의 고위직 대부분을 교체대상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나는 나의 의견을 묻는 박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이 내 자신의 의견을 솔직히 개진했다. 즉 사법부의 인사문제는 사법부의 독립성과 그 뿌리를 보호하기 위해 혁명정부하에서도 그 질서가 존중되었고, 또 법무부의 인사문제 역시 선후배 간의 질서와 법무행정의 질서유지를 위해 신중을 기해 왔는데 과도기인 혁명정부를 거쳐 민정으로 진입된 이 마당에 그러한 질서가 존중되지 못한다는 것은 극히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니 전통적인 그 질서가 제대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사료된다고 말하면서 사법부와 법무부의 고위직에 있는 공직자를 전원 유임시킬 것을 건의하는 한편, 석연치 않은 이유로 법무부차관으로 재임 중 직위해제를 당한 서일교(徐壹敎)씨를 복직시켜 줄 것을 건의하고 그 자리를 물러났는데, 그로부터 수일 후 나는 박 대통령이 나의 건의를 그대로 받아들여 조진만(趙鎭滿)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 전원과 9명의 법관 추천위원 및 기타 주요법원장들과 민복기(閣復基) 법무장관 및 검찰총장을 비롯한 주요 검사장들을 그대로 유임시키고 복직을 건의했던 서일교 씨를 법제처장으로 등용하는 인사조처를 취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유임이 되거나 재기용된 공직자들 못지않게 사법부의 뿌리와 법무행정의 안정을 위해 배려해 준 박 대통령에게 진심으로 깊은 감사와 존경의뜻을 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때의 일을 돌이켜보면 나는 지금도 그러한 건의가 적절한 것이었다고 생각되고, 또 흐뭇한 일로 기억되고 있다.
출처 : 예비역 해병대장 강기천(姜起千) 제7대 해병대사령관님 회고록 "나의 人生旅路"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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