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처럼" (나의 해병대 일기) (17) 나의 마지막 전투
1968년 7월 2일. 5대대 27중대 장교들. 20여정의 노획 소총과 쏘재 신형 V2 로켙이 보이지 않아 안타깝다.
1968년 6월 말경 이미 많은 지휘관들이 바뀐 것은 물론, 내 자신도 불과 5개월이 지나자 내가 속한 5대대 내의 장사병들을 통 털어 고참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만큼 내가 빨리 고참이 되었던 것은 5대대가 다른 대대와는 달리 포항에 이미 정예대대로 있다가 1967년 8월경 그대로 대대전체가 파월이 되었기 때문에 월남에서의 1년이라는 근무기간에 맞추어 모두를 귀국을 시킨다면 파월될 때와 마찬가지로 5대대 장사병들 대부분이 한꺼번에 귀국을 해야 하는 모순이 생겼기 때문에 우선 사병일 경우에 한하여 제대가 임박하고 귀국을 원하는 경우는 지난 3월부터 기수별로 귀국길에 오르게 했기 때문이었고 위관 장교일 경우에도 5대대에 한해서만 그러했는지는 몰라도 처음 나와함께 소대장을 했던 동기생들 모두 채 1년이 되지 않았는데도 몇 개월씩 앞당겨 귀국을 해 버려 고참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직속 지휘관들의 이동을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청룡부대장(여단장)도 바뀐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5대대장 박 중령은 2개월 전에 부임을 했고 우리 27중대장 남 대위는 불과 1개월 반 전에 새로 부임을 한 상태였다.
특히 우리 27중대장 남 대위는 내가 진해에서 후보생으로 훈련을 받았을 때 신병훈련소의 중대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훈련장에서 몇 차례 볼 기회가 있었는데 180센티 정도의 큰 키에 해병대 작업복을 입고 팔각모를 쓴 그 맵시가 너무나 멋있게 보여 남의 시선을 집중시킬 정도였다.
또 그는 미 해병대에서 OBC(기초반) 코스의 훈련까지 받은 소위 유학파 장교였기 때문에 영어의 구사가 능통해 미 해병대 엥그리코맨(항공,함포 유도 통신병)이나 수륙 양용 차의 기갑병들을 지휘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는 장교였다.
7월이 되자 채 숨돌리기도 전에 또 다시 대작전의 명령이 떨어졌다.
무려 마이너스 2개 대대가 투입되는 작전이었는데 주력부대는 5대대 3개 중대가 되고 합류는 3대대의 2개 중대로 한다는 내용이었고 그 소탕지역은 5대대본부가 남지나해를 바라보며 뒤를 기대고 있는 큰 사구 너머의 바로 큰 마을을 포함한 말굽처럼 생긴 호수 주변 일대였다.
지금은 25중대에게 물려주었지만 우리 27중대가 바로 지금 작전의 대상이 된 큰 마을과 경계를 하고 있었을 때는 그 곳과의 악연이 여러 가지로 많았었다.
지난 1월, 27중대가 추라이 지역에서 호이안 지역으로 막 이동해 큰 마을과 경계한 5고지에 진지를 정했을 때는 미 육군 1개 중대가 적의 공격으로 인해 전멸을 하고 간 자리라는 소문이 파다했던 데다 밤이면 자주 적들이 경계를 접하고 있는 우리 1소대를 향해 총을 쏘아대든지 아니면 알아들을 수도 없는 한국말로 방송을 시끄럽게 해댔기 때문에 그럴 때마다 마음이 편치 못 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또 그러던 어느 날 적의 꼬임에 빠져 적이 미리 설치한 폭탄 무더기 위에서 한동안 있었다가 2소대 선임하사관인 김 중사의 절벽 추락으로 발파기와 연결된 전선을 우연히 찾아내 가까스로 중대 모두가 엄청난 위험에서 살아났던 적도 있었고 그들이 27중대의 정문 부근에 대전차 지뢰를 매설해 내가 탔던 수륙 양용차가 공중으로 떠서 내려앉는 통에 나와 여러 대원들이 모두 황천으로 갈 번했던 적도 있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큰 마을을 수색하다 그만 우리 소대가 적이 매설한 지뢰밭에 들어 가 매우 당황했던 일도 있었다.
물론 회오리바람을 만나는 행운으로 지뢰를 덮었던 하얀 비닐들이 드러나 사전에 겨우 위험을 피하기는 했지만 이러한 여러 사건들을 두고 우리는 결코 악연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청룡부대본부에서도 이제는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는 한 편 우리도 이참에 그 일대를 싹쓸이 하여 완전한 평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비장한 결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그 지역 내의 적들은 주로 월맹정규군들이라기 보다는 지방 베트콩으로 판단되는 소수병력이라는 것을 평소 감지했지만 요즘은 심심찮게 그 부근의 우리 근무(보급)중대를 향해 로켓을 쏘고 달아나는 일은 물론 한 바운다리에 위치한 육군 제 11 군수지원대대까지도 위협을 해 더 더욱 우리의 결심이 그러했던 것이다.
당시 화기소대장 겸 부중대장을 하고 있는 내 위치는 사실 관례적으로도 현지 사정으로도 이러한 작전에 직접 참가하지 않아도 되는 처지였다.
왜냐하면 소대장 요원의 초급장교가 바닥이 날 지경에 이른 해병대 사령부에서는 예전과는 달리 많은 초급 장교들을 급히 양산해 파월을 시키고 있었고 우리 중대만 하더라도 소대장 요원들이 너무 많이 배치되어 원래는 있지도 않은 부소대장이라는 직책까지도 생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치열한 전투를 하다 청룡부대 내의 소대장 한 명이 전사를 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한 달에 한 번 있는 소대장의 후방 교체가 이번에는 내 차례라고 학수고대하던 소대장은
“야, 이 새끼 죽긴 왜 죽어!” 하고 제일 비통해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전우의 죽음도 애석했지만 자신의 소대장 자리를 교대하기 위해 한국으로부터 오고 있는 소대장 요원이 우선은 교체 순번이 된 자기 보다는 결번 된 소대에 먼저 배치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소대장을 면할 기회를 한 번 놓치고 나면 전투를 한 달씩 더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초급 장교들의 수가 남아돌아가는 판국에 굳이 곧 후방으로 빠질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내가 작전에 나간다는 것도 그렇지만 지난 번 용궁작전을 할 때도 내가 워낙 그 지리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신임 중대장을 도우는 입장에서 맨 앞장을 서 공격을 했던 것인데 또 작전을 나가게 된다는 것은 너무 무리하고 사리에도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우리 중대장은 꼭 한 번만 더 내가 자기와 함께 작전에 참가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회적인 표현만 했지 미안해서인지 말을 아끼고 있었다.
결국 나는 곰곰이 생각을 해본 끝에 이제는 작전에 나가더라도 총알이 난무하는 공격에 앞장 설 일도 없을 뿐더러 중대장도 중대장이지만 우리 27중대를 염려해서라도 이 번 한 번을 마지막으로 작전에 따라 나서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나는 우선 지도를 펴놓고 작전이 있을 지역에 대한 과거의 전투 경험을 열심히 중대장에게 설명하고 우선 우리가 작전상 가능한 한 선점해야 할 지점과 이에 수반 되는 잠재 문제들을 소상히 설명했다.
큰 마을과 그 서쪽에 붙은 호수 그리고 호수의 서쪽에 다시 시작되는 숲은 그리 깊은 지역이 아니며 500미터 정도 지나면 모래땅으로 된 개활지가 전개되는 곳이었다.
나는 적들은 우리가 유도할 포병대대의 포탄세례 때문에 우리를 피해 그 개활지를 선택하지는 않을 공산이 크다고 생각했고 대신 적들은 오로지 숲이 계속 전개되고 있는 북쪽 즉 자기들이 성역으로 여기는 나병 환자 촌으로 기를 쓰고 이동을 할 것이라는 추측을 했다.
왜냐하면 나병 환자촌은 미 해병대와의 자 매 결연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전투를 벌 릴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작전이 시작되던 날 작전 영역의 동쪽은 25중대가, 호수가 끝나는 남쪽 언저리는 26중대가 그리고 호수건너 서쪽에는 3대대의 0중대가 또 3대대의 나머지 중대는 연이어 그 서북쪽에 자리를 잡았고 우리 27중대는 노른자위 매복지인 북쪽지역을 끝내 고집을 하고 있었다.
물론 북쪽의 노른자위 지역에 대해서는 자리싸움이 27중대와 3대대 간에 한동안 있었지만 결국 5대대장이 3대대장을 잘 설득해 호수가 끝나는 북쪽 방향은 결국 우리 27중대가 맡기로 결론이 내려져 중대장과 나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막상 이러한 결론이 나고 보니 이제부터는 사전 내가 중대장에게 북쪽 나병환자 촌으로 통하는 길목이어야 전과를 올릴 수 있다고 장담을 했던 주장이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무척 책임이 무거워지고 있음도 느끼게 되었다.
이미 밤은 깊어가고 북쪽 지역을 지키게 된 우리 27중대는 고참인 김 소위가 지휘하는 2소대를 중앙에다 배치하고 좌우측의 다른 2개 소대보다는 약 70미터거리 전방에 나가 있도록 하는 한편 중대 지휘소가 있는 후미에도 차출 된 약간의 병력을 북쪽의 반대편을 향하도록 하여 배치를 했다.
우리는 대대적인 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종의 소대매복의 형식으로 그 위치를 확보해 일망타진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20시경 호수의 동쪽 지역에서부터 먼저 적들의 저항이 시작 되었다.
우리 쪽에서 보면 호수 건너에 있는 25중대가 적으로부터 처음 공격을 받았던 것은 박격포에 의한 것이었고 그것은 공교롭게도 미 해병대로부터 지원 나온 탱크 옆에 떨어져 그래도 대원 두 명이 경상을 입었을 정도로 끝이 났다. 그러나 25중대에서 응사하는 총알과 케리버30 경기관총의 예광탄들과 총알들은 고스란히 약간 마주본듯한 우리 27중대의 전면으로 날라 오고 있었다. 나는 혹시라도 우리의 위치가 탄로 날지도 몰라 소대장들에게 모두가 참호 속에 머리를 박고 일체 응사를 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했다.
총소리는 불과 5분이 채 안되어 멎었다. 나는 중대장과 함께 불빛이 새지 않게 손을 가려가며 연신 줄담배를 피워댔다.
“틀림없이 또 이곳저곳을 집적여 볼 겁니다. 이놈들이 나갈 구멍을 찾느라 노크를 해 보는 거나 마찬가지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중대장을 안심 시키느라 나는 되도록 자신 있게 말을 했다.
“그리고 소대장들에게 당부를 했습니다만 적들이 바싹 우리 앞으로 닥아 오기 전에는 사격은 물론 절대 소리도 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중대장은 담배를 입에 물은 채 나를 힐 끗 한 번 쳐다보고는 빙그레 웃음을 지워 보였다.
“타다다다다당....”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25중대의 남쪽 지역인 26중대 쪽에서 먼저 총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다음은 3대대가 막고 있는 서쪽 방향으로부터도 총알들이 나르고 ‘쾅~’ 하는 포탄이 터지는 소리까지 들리기 시작했다.
“이 놈들이 또 도주로를 찾느라 분산공격을 해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 쪽이 조용하면 차츰 모여 이곳으로 오겠지요.”
“오려면 빨리 와야지...”
중대장은 소리를 낮추며 또 다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몇 분 후에는 또 다시 총소리가 멎고 적막 같은 시간이 다시 흘렀다..
중대장과 내가 주저앉아 있는 곳은 수려한 숲 속에 매우 큰 정원을 가진 별장 같은 집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 때의 영화도 간 곳 없이 잔해만이 쌓인 폐허 위에 낯선 이 방의 객들만이 모여 지루한 결전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내가 처음 신참 소대장으로 소대원들을 이끌고 야간매복을 나갔을 때는 떠 있는 둥근 달을 쳐다 볼 때마다 “지금 쯤 한국에서도 전쟁터로 자식을 보낸 수많은 부모들이 저 달을 쳐다보며 자식들의 무사귀향을 빌고 있겠지.” 하는 생각을 자주 해 본 적이 있었다.
또 어떤 때는 내가 전생에 그렇게도 죄를 많이 지었던가? 하는 자학적인 생각을 해보기도 하고 여자들과 술을 마시며 즐겁게 놀고 있을 친구들도 떠올려 보며 절실한 소외감에 한탄스러움까지 느낄 때가 있었는가 하면 앞으로는 “대를 위해 소가 희생 되어야 한다는 말은 절대로 함부로 하지 말아야 지.” 하는 다짐도 해 보며 계속 모기에게 뜯기는 길고도 먼 밤을 지새운 때가 많았다.
그러나 이제 이 날만 새면 나는 영원히 최 일선에서의 전투는 끝이 난다.
이런저런 생각과 다시 소곤거려가며 중대장과 나누는 대화는 시간 가는 줄 몰랐으나 점점 그렇게도 잘 가던 시간이 한 시가 넘어 두 시가 가까워지면 그 때부터는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내 경험이었다.
그토록 지루하던 시간도 이제 새벽 3시가 가까워왔다.
중대장도 나도 실망스러운 마음을 지울 수 없는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중대장님, 이제 눈을 좀 붙이시지요.”
나는 그 자리에 조금 더 있기로 하고 중대장은 약간 떨어져 있던 통신병과 함께 미리 전령이 준비해 놓은 좀 더 낮고 쉴 수 있는 곳을 찾아 발걸음을 옮기면서 말을 던졌다.
“좋은 소식이 있어야 할 텐데... 구 중위도 잠시 눈을 좀 붙이지 그래”
“네, 아직은 괜찮습니다.”
간단한 대답이었으나 나의 입장은 바로 이 자리에서 잠시 나도 모르게 졸수는 있어도 잠을 잘 수는 없는 처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늘따라 숲에 가려서인지 달도 보이지 않았다.
야간매복을 할 때는 달이 없는 것이 효과적이지만 그래도 한 밤중 전쟁터에서 보는 달은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도 푸근하게 만들 수가 없었다.
나는 오감이 모두 곤두서는 밤이 아닌데도 지난 3월경 0대대 0중대 0소대 대원들이 대낮에 정찰을 나가다 대대본부가 불과 300m정도 거리 밖에 안 되는 전방 도로에서 기습을 받아 거의 1개 분대 가량의 대원들이 적에게 확인사살까지 당했다는 치욕적인 일을 떠올렸다.
물론 0대대본부에서 그 곳을 쳐다보면 도로가 300미터쯤 가다 휘어지는데다 마침 울창한 숲이 그 이상의 도로를 가리고 있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눈으로 직접 볼 수는 없는 위치지만 항상 같은 시간에 항상 같은 병력으로 항상 같은 길을 택해 대책도 없이 걸어서 정찰을 다녔던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었기 때문에 직접 지휘를 했던 소대장은 물론, 중대장과 대대본부의 모든 장교들까지 전 청룡부대 장사병들의 원망을 사지 않을 수 없었던 일이 생각났다.
전쟁이란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어떤 경우 한 치의 오류도 잠시의 실수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전쟁이고 보면 지금의 이 순간에도 너무 내가 여유를 부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잠시 하면서 혹시라도 우리 후미를 적들의 구원 병력이 불시에 치고 들어오지나 않을까 싶은 생각에 통신병을 불러 다시 한 번 후미의 이상 유무를 점검 하도록 했다.
병력을 다소 적게 배치한 후미지마는 아직은 아무 이상이 없다는 보고를 받은 후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잠시 졸았던 모양이었다.
“쾅, 꽝, 꽝, 따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
계속해서 폭음과 총을 난사하는 소리에 놀란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낮추면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즉시 10여 미터 아래쪽에 자리를 하고 있는 중대장에게 내려갔다. 분명 폭음과 집중사격의 총소리가 중앙의 2소대 매복 지점으로부터 들리고 있었기 때문에 무엇이 걸려도 걸렸구나 싶은 생각도 순간 들었지만 그 것보다는 중대 전체가 이미 전투 상황에 돌입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매우 흥분이 되었다.
중대장은 이미 상황이 일어난 2소대장으로부터 아마 이동하던 적일 것 같다는 간단한 보고만 듣고 즉시 1소대장과 3소대장에게까지 각각 자기 전방의 경계를 더욱 철저히 하고 적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사격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계속 되었던 집중사격의 총소리도 채 1분이 지나지 않아 모두 끝이 났다.
2소대의 김 소위는 경험이 많은 고참 소대장이라 이미 소대 전방에다 인계철선으로 조명탄을 설치해 놓고 그 조명탄 위에는 다시 수류탄을 장치해 놓았던 것이다.
일단 적이 이동을 하다 인계철선을 건드려 조명탄이 터지면 누구나 순간적으로 밝은 불빛에 놀라 몸을 엎드리게 되고 이 순간 신호탄 위의 수류탄은 벌써 열을 받아 자연히 폭발하게 되며 또한 대원들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수천 개의 쇠 파편이 흩어지는 크레모어의 스위치를 누르는 동시에 소총수들은 일제사격을 가하게 되므로 적들이 여기에 걸리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는 것은 물론 시신마저 분간하기가 힘들게 되는 것이다.
중대장과 나는 이미 상황은 끝이 났다고 보았지만 너무 앞이 캄캄하고 나무들이 시야를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과연 적들인지 아니면 재수 없게도 돌아다니는 동물들인지를 아직은 장담하기가 이르다고 생각을 했다.
2소대장의 보고로는 십중팔구 적들일 것이라는 말을 했지만 중대장은 날이 밝기 전에는 절대로 확인을 하느라 다가가서 살피는 일이 없도록 엄한 명령을 내렸다.
나와 중대장은 다시 처음 우리가 담소를 하던 자리에 모여 앉아 서로가 경쟁이나 하듯 줄담배를 피웠다.
사실은 두 사람 모두 그 결과에 대한 기대가 컸을 뿐 아니라 그보다는 처음 우리가 계획하고 예상했던 대로 일이 착착 진행 된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에 더욱 그 결과에 대해 흥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날이 겨우 밝을까 말까 했는데도 대원들은 현장으로 접근해 사살된 적들을 확인하고 무기들을 수습해 왔다.
이윽고 대대장에게 보고를 하는 중대장의 모습과 목소리는 너무나 당당하고 멋이 있게 느껴졌고 그럴수록 나는 따라서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20여명의 적을 사살하고 많은 소총은 물론 소련제 로켓포 1문과 박격포 1문도 그 속에 들어 있었다.
그리고 실상의 공로는 공포의 소련제 로켓 발사기였으며 이것은 여태 주월 한국군은 물론 미군들도 노획하지 못 했던 야간투시경이 장착 된 신형 V-2 로켓의 발사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곧 몇 개월 전 우리 근무중대의 벙커 창구로 야간에 쏜 적의 로켓이 어떻게 좁은 공간으로 정확히 들어 와 폭발을 했을까? 했던 의문을 풀 수가 있었다.
나는 나의 이 마지막 휘날레의 전투를 끝으로 채 두 달이 지나지 않아 그 동안 정들었던 정예의 청룡부대 제 5대대 27중대를 약 6개월 반만에 떠나게 되었고 대대본부의 지상레이더 팀장이라는 새로운 자리에서 임무를 부여 받게 되나 채 한 달이 못되어 비로소 파월 당시의 보직이었던 헌병대 수사과장 직책을 찾아 보병 전투중대와의 인연을 마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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