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 참전수기/해병179기 황석영

"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10회>

머린코341(mc341) 2015. 7. 21. 07:04

해병179기 황석영의 해병이야기 -

 

[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4. 땡볕 <170>

내 흔적이 남아 있을 곳마다 전화
전쟁터에서 돌아올 땐 어찌 될지

 

한참이나 역 광장을 맴돌았다.

먼저 어디로 가서 나를 만날 것인가.

내 흔적이, 그림자가, 어디에 남아 있는가.

나는 가족들의 식탁 뒤편에서 앓고 있다가 방금 일어나 끼어든 환자처럼,

도시의 활기가 어쩐지 분했다. 전화를 걸었다.

아… 그런 사람 없습니다. 오래 전에 그만두었는데요. 글쎄요, 알 수 없군요.

다시 전화를 건다.

수화기 너머로 음악 소리가 들리고 아직 잠에서 덜 깬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야, 오랜만인데. 방금 깼다. 음, 그렇게 됐니?

많이 죽이지 마라. 연합군한테 술 살까? 저녁에, 안돼?

겨우 하루라니. 그치가 누구야… 누굴 말하는 거야.

아, 사라졌지. 물론 누가 꿰찼겠지. 청춘이 다 그런 거다.

저녁에 기차를 타기 전에 전화를 걸었다.

그쪽에서 뒤늦게 알았다면서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나는 전화를 걸었다. 소리가 아주 가까웠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딸깍, 끊기고 나도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높은 소리의 마디가 맑고 가늘게 갈라지는 것이 그 목소리의 특징이었다.

약한 것, 부드러운 것, 포근한 것, 따뜻한 것,

누이 어머니 여선생 할머니 간호원 보모 그리고 어린애 비둘기….

그것이 숨쉬는 가슴. 나는 정글모가 코를 가리도록 깊숙이 눌러 썼다.



마침 일요일 저녁이라 플랫폼에는 떠나고 배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서울 근교의 병영에서 외출 나왔던 장병들이 서둘러 귀대하고 있었다.

내 바로 앞에 공군 중위가 여자와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 팔에 매달릴 듯이 붙어서 걸어가는 여자의 짧은 머리카락이 목덜미에서 나풀거렸다.

 

나는 군용 열차 칸의 승강구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들은 기둥 앞에 나란히 서서 내려다보고 올려다보며 뭐라고 지껄이고 웃고 했다.

 

중위가 여자의 머리카락을 건드리면서 입을 벌리고 웃었다.

기차가 천천히 움직일 때에야 중위는 손을 흔들어 주고는 내 옆 칸의 승강구 위로 뛰어올랐다.

여자가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몇 걸음 따르더니

그 자리에 서서 고무줄을 하는 계집아이처럼 깡충깡충 뛰었다.

내가 그 여자와 시선이 부딪쳤던 것 같다.

그러나 그녀는 열차의 불빛에 막연히 시선을 던졌겠지.

그 두 사람은 어찌될까. 내가 전쟁터에서 돌아올 즈음에는,

아니 내주 주말에는…

플랫폼의 등불 빛이 재빨리 미끄러져 갔다.

중위는 곧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승강구에 걸터 앉았다.

 

저이들은 나를 모르고, 기억조차 하지 않으며,

불빛이나 소음이나 바람의 부분으로 나를 끼워 넣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 만나지 못할지라도 그들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여자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던 키 큰 중위의 웃음을 나는 생생히 떠올릴 것이다.

그녀의 깡충거리던 작별의 동작을 잊지 않을 것이다.

바닷가에 어둠이 내리면 안개가 기슭에서부터 안쪽으로 스멀스멀 기어들기 시작한다.

그 철조망 너머 몰개월 마을의 물기에 젖은 듯한 불빛을 나는 잊을 수 없다.

특교대 병사들이 전쟁터로 가기 전에 마시던 소주와 막걸리와 젓가락 장단의 갖가지 유행가들을.

 

날이 저물어 밤이 되면 남한의 산자락 들판 또는 물가에

가난하고 작은 마을들이 불을 켜고 오순도순 모여서

타향으로 떠나간 식구들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몰개월은 세상의 막장 끝까지 몰린 사내와 계집들이

함께 무너져 가다가 되살아 나는 그런 동네였다.

그림=민정기


출처 : 중앙일보,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ctg=12&Total_ID=16070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