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처럼" (나의 해병대 일기) (50) 뒤 돌아 보며/ 흘러간 얘기들
(1) 포항과의 인연
1960년대 내가 해병대에서 근무를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포항의 처녀들은 해병대가 다 버려 놓는다는 농담이 있었는가 하면 그래서인지 그만큼 포항을 처가로 둔 해병대 장사병들과 하사관들이 많았다.
재미있는 것은 동기생 중에 처가가 포항이라고 하면 으레
“야! 너 하숙집 딸하고 연애 했지?” 하고는 마치 추달을 하듯 농을 건네곤 했다.
사실이지 지금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고 없는 내가 잘 아는 선배도 소위 때 나이 어린 고3의 하숙집 딸과 사랑을 해 결혼을 했었고 내 동기생인 김 대위도 그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경우로 결혼을 해 지금은 어엿한 포항의 저명인사가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월남에서 나와 함께 근무를 했던 김 상사도 그리고 내 전령이었던 윤 해병도 그 곡절은 모르겠지만 모두 포항의 여인들을 반려자로 맞아 지금까지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사실 내 주위가 이 정도일진데 우리 해병대 모두를 합쳐 통계를 내 본다든지 또는 사랑을 나눈 얘기들을 어떤 유형별로 나누어 본다면 무척 재미가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2) 제주도 해병대
1950년대 6.25사변이 터진 후 육군 신병훈련소는 물론 우리 해병대 신병훈련소도 제주도에 있었다고 한다.
과장을 해서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제주도에서는 군대에 간다고 하며 의례 해병대로 입대하는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후보생 시절 나와 같은 내무반의 내 동기생도 제주도 출신이 한 명 있었고 내가 처음 소대장을 했을 대 우리 중대의 중대장도 제주도 출신이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소대의 소대원 한 명도 제주도 출신이 있었다.
그리고 월남에서도 내가 헌병대에서 과장을 했을 때 계장이 제주도 출신이었고 서울에 돌아와 근무를 할 때도 영등포 파견대장을 했던 상사가 제주도 출신이었다.
(3) 밀량 의장대
한 때는 모 사령관의 고향인 밀량 사람들이 해병대로 많이 입대를 했고 그 분의 재임기간 중 진해 기지 의장대와 군악대는 밀량군의 소속처럼 되어 초등학교의 운동회만 열려도 북치고 나팔 불고 총을 철걱거려 주었던 때가 있어 우리는 진해 기지 의장대를 밀량 기지 의장대로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결국 예편 후 그 사령관은 국회의원에 당선이 되셨고 우리는 그 것을 무척 자랑으로 삼았다.
(4) 목포 헌병
한 때 헌병대 내에서는 “목포헌병대”라는 말이 있었다.
키로 보나 자세로 보나 체격이 잘 어울리지 않든지 임무 수행을 소홀히 하는 보안 헌병이 있으면 “야! 너 목포 헌병대냐?” 하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다른 사령관 한분도 역시 정계로 나가려는 야심이 있어 고향 사람들을 보아주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는데 하필이면 대부분의 사병들이 헌병병과를 많이 선택하는 바람에 그만 그런 농담까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여러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그 사령관은 당선이 되고도 선거에 잡음이 생기는 통에 그만 애석하게도 명예를 실추하는 일이 생기고 말아 우리는 매우 안타까워했던 적이 있었다.
(5) 남양주 해병대
들었던 얘기로 6.25당시 남양주 출신의 장군이 한 분이 계셨다.
고향에 들러 조국을 지키기 위해 백전백승의 해병대로 입대하라는 권유를 해 자그마치 신병 2개 기수가 당시 남양주의 젊은이들로 구성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입대했던 사람들은 다행하게도 막 실무로 배치가 되기 직전 휴전이 되어 모두 무사했다고 한다.
(6) 월남몸살
귀국 후 월남 몸살이라는 것을 곧 앓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1년 내 내 전투지에서 노랑 오줌을 싸다 이제 겨우 오줌 빛깔이 정상으로 돌아 왔는데 또 몸살을 앓다니?
나는 미리 약간 몸살기가 있겠다 싶으면 약을 먹고 가라앉히곤 했는데 한 번은 약 먹는 시간을 놓쳐서 그런지 결국 월남 몸살을 앓게 되었다.
내 생전 뼈 마디마디 마다 그렇게 아팠던 일은 처음이었고 목 안을 드려다 본 의사도 그렇게 붓고 농이 많이 찬 경우는 별로 본 적이 없을 정도라고 했다.
나는 1주일간을 꼬박 드러눕다 시피 했는데 근간 이라크 전에서 전쟁을 마치고 귀국한 미군들이 그 후유증을 앓고 있다는 매스컴 보도를 접한 나는 그것을 충분히 이해 할 수가 있었다.
(7) 탈옥
당시 해군 서울지구 헌병대 보안과는 후암동에 위치한 해병대 사령부 내의 해병 교도소와 대방동에 위치한 해군 본부 내의 해군 교도소 모두를 관리해야 했다.
해병대 교도소에서는 내가 과장으로 부임하기 전 푸세식 화장실의 오물이 넘칠 정도가 되자 그 위에 얼른 매트를 깔고 기어들어 가 바깥 쇠 그물을 손으로 잡아 뜯은 후 탈출을 시도하다 미수에 그친 적이 있었고 내가 과장으로 부임을 한 뒤에는 해군 교도소에서 근무하던 근무자들의 열쇠 관리가 소홀한 틈을 타 한명의 탈옥이 생겼다.
당시는 통행금지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혹시나 통행금지 위반이나 다른 죄목으로 경찰서에 연행 되지나 않았나 싶어 나는 밤새 서울 시내의 모든 경찰서 유치장을 뒤졌고 보좌관인 윤 소령(미국에서 작고)은 우범 지대를 맡아 일일이 검문을 하고 다녔는데 결국은 윤 소령이 직접 청량리 588 창녀촌에서 탈옥수를 체포해 난처했던 입장을 모면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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