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출전<1편> - 30고지의 투혼
1966년 11월 8일부터 청룡부대는 미·월군과 합동으로 투이호아 서남방 일대에 준동하는 적을 소탕하기 위한 작전(용안작전)을 전개했다. 적의 교통 보급로 상의 요지인 짜쿡강을 견제 차단하는 가운데 전개한 이 작전에서 미 해병대는 전술책임지역 서측방, 월남군은 그 남측방을 담당했다. 약 1주일 간 공수 또는 차량 등으로 목표지역으로 이동했던 청룡부대는 전투부대(대대)를 교체하는 가운데 본격적인 탐색전을 벌인 다음 11월 20일부터 미·월군과 함께 패주하는 적을 포위 공격하여 최종적인 전과를 확대했다.
그런데 이 용안작전 기간 중(11월 20일) 1대대와 임무교대를 하기 위해 푸옥록 마을 뒷산(△30)에 배치되어 있던 3대대 9중대(-)는 불과 60여 명의 소수 병력으로 그 고지를 포위 공격한 2개 대대의 적과 사투를 벌인 끝에 확인사살 94, 포로 1, 수류탄 110, 실탄 3000여 발을 노획하는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적이 공격을 개시한 시각은 초병들이 꾸벅거리고 있던 새벽 4시경, 희미한 초생달이 서산마루를 넘어간 직후였고, 적정이 먼저 감지된 곳은 조명지뢰가 터진 1소대 진지였다. 조명지뢰가 터져 기도가 탄로 난 적은 4방에서 요란한 호각소리를 내며 단숨에 아군 진지를 유린할 기세로 돌격을 감행했고, 허를 찔린 아군 진지는 졸지에 풍전등화와도 같은 위기에 직면하고 말았다. 더구나 일시 점령하고 있던 그 고지에는 견고한 방어진지가 구축되어 있지 않았고, 또 9중대는 대대본부 방어를 위해 2소대를 떼어놓고 왔기 때문에 그만큼 병력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그러나 비록 기습을 받긴 했으나 대원들은 즉각 전투배치에 붙었고, 60밀리 박격포와 81밀리 박격포 및 105밀리 포대에서는 지체 없이 조명탄을 쏴 올리는 가운데 미리 구성해 놓은 예상접근로 상의 화집점에 탄막사격을 가함으로써 적의 공격부대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그러나 인해전을 구사한 적은 투입한 돌격대가 쓰러지자 새로운 돌격대를 투입함으로써 어느새 중과부적한 아군 진지에서는 처절한 백병전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그러한 상황 속에 우일선 진지의 일각이 돌파 당하자 중대장 김윤형 대위는 핏발선 목소리로 "진지를 사수하라1" "후퇴하면 다 죽는다!" "30분만 견디면 날이 밝는다!"하며 대원들을 다그쳤고, 그 다그침에 고무된 대원들은 사생결단 필사적인 분전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적을 격퇴시킬 수가 있었다.
약 2시간에 걸친 그 혈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발군의 전공을 세웠던 용사들은 분대장이 부상을 당하자 분대장의 유탄발사기로 계속 적을 공격한 3소대(장, 전창우 소위) 1분대의 김명환 해병과 머리에 총탄을 맞고서도 필사적으로 적과 육박전을 벌인 1소대(장. 김인식 소위) 1분대장 최동인 하사를 비롯, 대대본부 선임하사관으로 전속발령이 났는데도 끝까지 9중대에 남아 중대본부 요원들로 특공대를 조직하여 용전분투했을 뿐 아니라 중대장에게 추격명령을 내리게 하여 적을 추격했던 9중대 선임하사관 이영구 하사와 육박전에서 좌충우돌, 초인적인 용맹을 발휘했던 3소대 2분대의 김영수 해병 등이었다.
그리고 아비규환의 생지옥 속에서도 무전기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무전기를 끌어 안고 뒹굴면서 전술망의 통신기능을 유지했던 9중대 작전하사 이용규 하사의 악착같은 감투정신과 공격부대의 후속부대 차단을 위해 적절히 포탄을 유도했던 포병관측장교 김세창 중위의 기여도 컸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傳統과 秘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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