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고 배 고프고 졸립던 시절을 회상하며(9)
7. 휴가 때 깽판치기
(휴가 준비)
저는 현역생활을 하면서 모두 세 번의 휴가를 나왔었는데 일병, 상병, 병장 때 각각 한 번 씩이었던 것 같습니다.
졸병이 휴가를 가게 되면, 같은 소대 선임들이 졸병 복장에 많은 신경을 써서 아끼던 링이나 워카도 기꺼이 빌려주고, 동절기엔 미제 휠잠바도 선뜻 벗어 주는데 이 때, 감동 먹는(?)졸병들, 많습니다.
저는 제 손으로 링을 한번도 못 만들어 봤기 때문에, 소대에 몇 벌 비치되어 있는 걸 빌려서 차고 나갔으며 일병 때는 기껏 휴가복이라고 해봐야, 평소에 늘 입고 있던 작업복이었습니다.
그 후줄근한 작업복에 다리미로 "칼같이"날을 세우려면, 우선 풀을 먹여야 했는데 그러려면 보리알은 하나 하나 골라낸 순수 쌀알 밥풀을 따로 남겨 두었다가 헌 런닝샤쓰에 싸서 물에 넣고 주물럭거리면 풀물이 됩니다.
그 풀물 속에 작업복을 담가, 고루 풀물이 들게 한 다음, 말렸다가 세탁소에 맡기면 그야말로 손을 벨 정도로 빳빳하게 줄을 잡아 줍니다. 병장 때는 그린사지를 입고 휴가를 나갔는데, 아무래도 이 그린사지가 작업복보다는 폼이 더 납니다.
쎄무 워카는 좀 신다보면 털이 쉽사리 죽어버리기 때문에, 그걸 다시 세우느라 바늘로 일일히 찔러 들어올리거나 쇠(철사) 브러쉬로 박박 문질러 죽은 털을 다시 세워 신었습니다. 털을 세운 다음에는, 헌 워카 뒷굽을 태워서 빻은 시커먼 가루를 그 위에 골고루 뿌리면 털이 부슬부슬해지고, 한결 보기가 좋습니다. 졸병들은 내무실에 이 가루가 떨어지지 않게 만들어 놔야 할 막중한 책무를 지는데 이걸 잘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워카 뒷굽을 잘 태워야 합니다. 너무 많이 태우면 하얀 재가 많아져서 못 쓰게 되니까요.
이렇게 적당히 태운 워카 뒷굽을 곱게 빻아서 소주병 등에 넣고 병 입구를 헌 런닝샤쓰로 틀어막아 뒀다가 필요할 때마다 그 병끝을 워카에 대고 톡톡 때리면 병 속에 든 까만 가루가 적당히 쏟아져 나오면서 워카에 묻혀지는 겁니다. 앞서 얘기한대로. 졸병들은 이 쎄무 약(藥)이 떨어지지 않도록 항상 대기를 시켜놓아야 했으며 만약 이 가루가 떨어졌다하면, 그것도 바로 '집합'의 한 이유가 됐습니다.
또 졸병 때는 팔각모의 여덟 각(角)을 빳빳이 세워 쓰고 다녔으나, 조금 고참이 되어선 팔각모의 앞부분을 푹 꺼지게 해서 쓰고 다녔는데 폼은 이게 더 났던 것 같으며 요즘엔 정모(正帽)를 쓰고 다니던데, 제가 보기엔 암만해도 팔각모만 못한 것 같습니다.
앞부분이 푹 꺼진 팔각모를, 눈썹이 안 보일 정도로 눌러 쓰고 칼같이 주름이 잡힌 휴가복에, 바짓단에는 촤르르~촤르르~소리가 나는 링을 차고 목에다 힘을 빡 주면서 폼을 잡고 다녔습니다.
상병 땐가는 태권도 초단을 못 따면 휴가를 안 보내준다고 해서 "뒈지게"연습을 하여 결국은 초단을 땄는데 그때 했던 것이 '태극 8장'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육군에게 경례받기)
병장을 달고 휴가를 나왔을 때 있었던 우스운 얘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절친한 제 친구 하나를 만났었는데, 당시 그는 육군 병장이었습니다. 둘이 군복 차림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길을 걷는데, 전방에서 육군 상병 한 명이 걸어오더라구요. 장난끼도 슬며시 발동을 하고, 또 육군 친구 앞에서 폼도 한번 잡아보려고 그 육군 상병을 불러 세운 다음, 한마디 했습니다.
"얌마! 넌 상급자를 보고도 경례를 안 해? 죽고 싶어? 이 기합 빠진 시키..."
어리둥절해 하는 그 놈에게 미처 딴 생각을 할 겨를도 안 주고 "열중 쉬엇! 차렷! 경례!!"하고 큰 소리로 구령을 붙쳤더니,
육군 상병 놈이 아주 떨떠름한 표정으로나마, 제게 경례를 하더라구요.
물론 옆구리를 찔러 절 받는 격이었지만 저는 아주 거만한 표정으로, 천천히 답례를 하고 "좋아, 가 봐!!"하고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옆에 서 있던 제 친구, 육군 병장이 그 상병 놈한테 "어? 너, 나한테는 왜 경례 안 해?"하더라구요.
헌데 그 육군 상병이 바봅니까? 가뜩이나 재수 옴 붙어서, 멀쩡한 길 가다가 개병대 놈한테 걸려 팔자에 없는(?)경례를 하느라고 쪽 팔리고, 화딱지도 나서 죽겠는데 암만 같은 육군의 상급자라고 해도, 알지도 못 하는 놈에게 경례를 하겠습니까?
'뉘 집 똥개가 짖냐?'는 표정으로 들은 척도 안 하고, 그 상병 놈이 제 가던 길을 계속 가니까 제 친구가 씩씩거리며 그 상병 놈을 따라가더니,한참 후에 다시 왔더라구요.
그래서" 너 뭐하고 왔냐?"고 물었더니, 경례를 받으러 갔다 왔다나요.
"그래, 경례 받았어?"하고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은 했지만 저는 지금까지도 그 말을 별로 믿지 않습니다.
(서울行 열차 안에서)
상병 휴가 때의 얘긴데, 그 땐 정기휴가가 25일씩이나 되었기 때문에 처음 몇일 간은 그럭저럭 재미있게 보내지만, 조금 지나면 별로 할 일도 없고 그럴 때였는데 하루는 같이 휴가를 나온 276기, 김윤* 후임이 서울이나 한 번 가자고 그러더라구요.
'그러마' 하고 따라 나섰는데, 광주에서 기차를 타려고 보니 시간이 맞질 않아서 송정리 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송정리로 가는 버스 안에서, 서울로 올라가려는 해병대 하사관 1명과 병 5~6명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그 중에 제가 제일 선임이었습니다.
송정리 역에서도 서울행 기차를 타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길래 역전에 있는 허름한 술집에 들어가,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는데 한 잔, 두 잔 마시다보니 모두들 엄청 마셔버리고 만 겁니다. 특히 제가 제일 선임이라고 제일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아무튼 모두들 술이 '만땅'취해가지고는, 역 앞 광장에 나와 빙 둘러앉아 누가 시작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모두들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노래를 부르고 놀았습니다.
그때 부른 노래는 "곤조가", "성냥공장 아가씨" 그리고 "언니는 긴자꾸~"로 시작되는 제목 미상曲 등등 이었을 겁니다.
한참을 신나게 노는데, 역전을 무대로 노는"어깨"들하고 일반 구경꾼들이 우리를 둘러쌌습니다.
어딜 가나, 역전에는 그런 껄렁한 놈들이 있지 않습니까?
순간,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지만...
제일 선임인 제가 앞으로 썩 나서면서,
"야! 니네들 중에 대빵이 어느 놈이냐? 너희들이 보다시피 우린 해병댄데 다음 서울행 기차를 탈 때까지,우 린 이 자리에서 이렇게 놀테니 그때까지만 자리를 좀 비켜주라"고 했더니, 못마땅한 얼굴로 슬슬 물러나더라구요.
그러다가 우리가 탈 기차가 왔고, 이미 술이 떡이 된 제가 그래도 선임이라고 7~8명의 해병들을 인솔하여 기차를 타긴 탔는데...
그 후, 기차 안에서 있었던 얘기는 상당히 복잡하기 때문에 생략키로 하겠으나 어쨌든 그 며칠 후, 모처에 있는 해병대 헌병파견대에 가서 휴가증을 다시 끊어 무사히 귀대했다는 것만 밝힙니다.
휴가에 관한 얘깃거리도 몇개 더 있으나, 이쯤에서 접으며 혹시 현역으로 복무 중인 후임 해병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이런 당부를 하고자 합니다.
저희 때와는 시대도 많이 달라졌고 했으니, 휴가를 나와 기분 좋게 한 잔 하는 거야 좋지만 그 정도를 넘어 만용을 부리거나, 나아가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은 자제해 줄 것을 말입니다. "끝"
출처 : 해병대 인터넷전우회, 박동규선배님 http://www.rokmc.in/
'★해병일기 > 해병264기 박동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춥고 배 고프고 졸립던 시절을 회상하며(10)-최종회 (0) | 2015.01.06 |
---|---|
춥고 배 고프고 졸립던 시절을 회상하며(8) (0) | 2015.01.06 |
춥고 배 고프고 졸립던 시절을 회상하며(7) (0) | 2015.01.06 |
춥고 배 고프고 졸립던 시절을 회상하며(6) (0) | 2015.01.06 |
춥고 배 고프고 졸립던 시절을 회상하며(5) (0) | 2015.0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