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해병대 역사 - 월남 파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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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부대와 월남전쟁
1964년 12월 하순경 대한민국 정부와 국회에서는 공산침략에
직면해 있는 자유월남공화국을 지원하기 위해 한국군의 월남파병이란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그리하여 군 당국에서는 65년 2월 초 비전투부대인
비둘기부대(주월한국군사지원단)를 창설하여 파월 한 데 이어 그 해 10월초에는 병력 증파결정에 따라 전투부대로선 제일 먼저
청룡부대(해병제2연단)가 그 역사적인 장도에 올랐고, 그 뒤를 이어 맹호부대와 백마부대가 차례로 파월되어 그로부터 약 6년 간에 걸쳐
군사지원작전과 촌락의 평정 및 재건작전을 위해 헌신했다. 그리고 그 전투부대 및 교체병력의 수송을 위해서 해군에서는 십자성부대를 편성하여
수송작전의 일익을 담당했다.
그 다음으로는 6.25때 자유우방국가들로부터 입은 은혜에대한 보답, 공산세력의타도, 국위의 선양 등 여러가지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군의 월남파병은 조국의 광복 이후 특히 6.25전쟁기와 그 후에 있어 미국을 비롯한 자유우방국의 절대적 지원과 성원을
받아오기만 했던 우리 한국이 피지원국의 지위에서 남의 나라를 돕는 지원국의 지위로 성장했다는 사실을 온 세계에 과시하는 일이기도
했다.
오늘날에 와서는 그 의의가 퇴색이 되고
말았지만 피침 당사국이었던 자유 월남 공화국과 우리의 맹방인 미국정부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이루어졌던 그 한국군의 월남파병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즉 그 첫째
의의는 공산 위협에 대처하고 있는 자유우방국으로서의 공동운명체적인 연대의식을 십자군적인 사명감으로 구현함으로써 동남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안전에
기여하려는 데 있었다.
청룡부대의 결단식이 거행된 날짜는 9월20일이었고, 그 장소는
모군부대인 해병제1상륙사단(사단장, 강기천 소장)이었다. 박정희대통령과 김성은 국방장관, 공정식 해병대 사령관, 본스틸 유엔군사령관을 비롯한
수많은 국내외 귀빈들이 참석한 그 결단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초대 청룡부대장 이봉출 준장에게 부대기를 수여하고 유시를 통해 청룡부대 장병들의
장도를 격려했다.
결단식을 마친 청룡부대 장병들은 8월 초순경부터 받아왔던 특수교육을 계속 받다가 10월 3일 마침내 그 역사적인 장도에 올랐는데, 사단 특수교육대에서 받았던 특수교육의 대강은 월남전에서 적용되는 베트콩 및 월맹군의 기본전술, 각종 동굴 및 지하방카, 지하진지, 지뢰 및 부비트렙 등에 관한 내용이었다.
한편 10월 3일 부산항 부두에서 장도에 올랐던 청룡부대 장병들은 6일간의 항해 끝에 10월 9일 칸호아성 동남단 닌추안성과의 경계선에 위치하는 중부월남 최대의 요항인 캄란만에 상륙을 개시했다.
해병대가 상륙했던
캄란만은 19세기 중엽 불란서 군대가 베트남을 침략할 때 상륙을 했고 일·로 전쟁때는 러시아의 발트함대가 경유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일본군이 이곳을 거쳐 당시의 안남국을 통치 했을뿐 아니라, 프랑스군이 패전한 뒤 미군이 월남전에 개입할 때에도 역시 상륙기지로 이용했던 유서깊은
항만이었다. 상륙개시 시간은 아침 8시경, 상륙에 앞서 청룡부대장 이봉출 장군은 미 해군 수송선 [카이저]호의 함내 스피커를 통해 역사적인
상륙을 앞두고 세계평화의 대의구현을 위한 자유의 십자군으로서 막중한 사명감을 다시 한 번 굳게 다짐해 주기바란다는 요지의 짤막한 격려문을
방송했다. 그날 그 부두에는 주월 한·미 외교사절단과 월남군 당국자 등 수십 명의 환영인사들이 출영하여태극기와 청룡기를 앞세우고 늠름한 모습으로
상륙하는 장병들을 열열히 환영해 주었다.
그리하여 그날 상륙을 완료했던 청룡부대장병들은 캄란만 북방 4킬로 지점에 있는 미군기지로 이동, 그곳에서 미 제101 공수사단, 제502 공수보병대대 등과 임무를 교대했다. 이로부터 약 6년간 캄란지구로부터 투이호아, 추라이 및 호이안지구로 북상 전진하며 지옥전선과도 같은 열사와 밀림지에서 만난을 극복하며 부여된 이무를 완수함으로써 따이한 해병대의 명성을 온 세계에 떨쳤다. 초대 청룡부대장 이봉출 준장으로부터 김연상, 이동호, 이동용, 허홍준장 등 4명의 부대장에게 지휘권이 승계되는 가운데 각 지구 전선에서 수행했던 청룡부대의 주요 작전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캄란지구 전투
청룡부대의 첫번째 작전은 캄란지구에서 수행한 까두산
공략전이었다. 백경작전으로 명명이 된 그 까두산 작전은 10월 하순경 청룡 제2대대대가 닌쯔안성의 성청소재지인 '판랑'으로 이동하여 그곳에
건설중인 비행장 경계임무를 수행하던 중 비행장을 위협하는 까두산(△318)의 적을 소탕하기 위해 수행한 작전이었다. 판란 동북방 4킬로 지점에
있는 이 고지를 탈환하자 국내외의 보도진에서는 과거(1953년) 프랑스군의 대부대가 8차에 걸쳐 공격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그후 수차에
걸친 월남군의 공격 역시 무위로 돌아감으로써 지난 18년간 내내 베트콩의 아성으로군림해 왔던 곳을 한국해병대가 단 하루만에 탈환했다면서 그
용감성을 대서특필했다.
백경작전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청룡부대는
11월 초순부터 12월 하순경까지 나트랑 서북방 일대에서 준동하는 적을 소탕하기 위한 [번개 1-2호]작전을 수행하여 그 지역에 주둔하는
우군부대의 군사시설과 비행장 및 철도와 촌락 등에 미치고 있던 적의 영향을 제거했다. 그리고 그해 연말 부대본부에는 시인 모윤숙여사가 대동해온
송춘희, 후랭키송, 동방성애양을 비롯한 10여명의 인기연예인으로 구성된 최초의 모국 위문단이 도착하여 열광적인 위문공연을 가졌다. 그때
연예인들과 [동백아가씨]를 합창하고 있던 청룡부대 장병들은 얼마나 고국이 그리웠던지 그들의 눈에서는 주룩 주룩 뜨거운 눈물이 빗물 같이 흘러내려
마침내는 온 공연장을 사나이들의 격한 울음바다로 화하게 했다.
투이호아지구 전투
나트랑
서북방에서 번개작전을 수행했던 청룡부대는 12월 22일부터 그 이듬해(1966년) 1월 중순경까지 투이호아지구에서 파월 이래 최초의 여단급
공격작전을 수행했다. 청룡1호작전으로 명명된 이 대규모의 작전은 공산군의 해상보급기지인 동시에공산군의 지하 야전병원과 군사시설이 있는
붕로만(반도)과 다비아산 일대를 공격하여 적의 군사시설을 파괴하고, 나트랑과 퀴논을 연결하는 1번도로를 개척함과 동시에 투이호아 남방의
1번도로를 탐색하고 은폐된 지역을 소탕하기 위해 수행한 작전이었다. 이 작전을 3단계로 나누어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청룡부대에서는 특히 1월
12일부터 개시했던 붕로만에 대한 기습작전을 전개함에 있어 그 지역에 있는 1197미터의 [바본뉴]터널에 대한 수색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사판으로 터널의 모형을 만들어 철저히 연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18년간 폐쇄상태에 놓여 있던 1번도로의 남과 북을 개통시킬 수가
있었다.
그리고 3단계 작전으로 수행된 공산군의
은폐지역에 대한 총공격작전에서 청룡부대는 470명의 적을 사살하고 용의자 체포 590, 포로 18, 동굴파괴 170, 선박 파괴 16척등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청룡1호작전을 끝마친 후 청룡부대는 일단 부대본부가 있는 캄란지구로 복귀하여 차기작전에 대하할 예정이었으나, 월남정부
당국과 주민들이 계속적인 주둔을 요청하는 바람에 그 후 약 1개월간 투이호아 서남부의 광대한 평야에서 주민들과 피난민들의 추수보호를 위한
청룡2호작전을 수행한 다음 2월 중순경부터 7월 하순경까지 약 5개월간 투이호아 서남부 일대에서 준동하는 잔적소탕과 양민보호, 촌락재건 등을
위한 재건작전을 실시하였다.
계속해서 1번도로의 개척과 촌락재건 및
미군공병대의 교량복구작업을 보호하기 위한 해퐁작전을 수행했다. 이 작전기간중 3대대 정보장교 이인호 대위는 수 명의 대원을 진두지휘하여 베트콩이
은신해 있는 ㄱ자형 동굴을 수색하다가 적이 동굴속에 집어 던진 2개의 수류탄 가운데 먼저 것은 잽싸게 되려 집어 던질 수 있었으나, 그 다음
것은 그럴 경황이 아니어서 뒤다르는 부하 대원들의 안전을 의식했던나머지 자신의 가슴으로 덮쳐 장렬한 전사를 함으로써 살신성인의 얼을 빛내었다.
전사 후 일계급 특진과 함께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되고 월남전의 영웅으로 추앙을 받았던 고인의 유해는 고국으로 운구되어 해병대장으로 영결식이
엄수되었고, 해병대사령부에서는 천추에 빛날 고인의 얼을 기리기 위해 진해 해병교육단 내에 동상을 건립했다.
청룡부대의 투이호아지구에서는 해풍작전이 마지막 작전이었다. 그
작전을 마친 청룡부대는 추라이지구를 이동하게 되었다. 그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주민들은 결사적으로 이동반대 데모를 벌이며 계속적인 주둔을 요구하고
나섰다. 주민들의 그와 같은 행동은 민심이 천심이란 말이 있듯이, 추수보호작전과 촌락재건 및 민심수습을 위한 심리전활동으로 이탈해 있던 민심을
그만큼 수습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투이호아지구의 주민들은 청룡부대가 불가피하게 북부지역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이동반대데모를 중지하고 거시적인 환송대회를 열어 주었다.
8월 22일 프엔성 도의회 주최로 개최된 그 대대적인 환송
대회장에서는 도지사와 도의회 의장, 미 제101공수단장을 비롯한 수많은 내빈들과 수천명의주민들이 참석했고, [吾人永 不忘靑龍之功]
[無敵大韓海兵隊萬歲]와 같은 글귀가 적힌 플래카드가 만장처럼 요란하게 나부끼고 있었다.
추라이지구 전투
월맹군의
중요한 해상침투로인 동시에 연합군 최대의 보급기지인 다낭비행장과 월남군 1군단지역을 배추에서 위협하고 있던 추라이지구(꽝나이성)로 이동했던
청룡부대는 그 새로운 작전지역에서 가장많은 작전을 수행했고, 또 가장 많은 전과를 수립했다. 추라이지구에서 제일 먼저 수행했던 작전은 빈손군과
손틱군 일대에서 전개했던 비봉작전이었다.뒤이어 수색대의안호아촌 재건작전, 미·월 양국군과 합동으로 전개한 용안작전, 투망작전, 강구작전,
짜빈동기습방어전, 뇌룡작전, 노룡작전, 용머리2호작전, 태로이 매복작전, 용화작전 등 수없이 많은 작전을 수행했다. 이 가운데 특히 1967년
2월 14일밤부터 15일 아침 사이에 벌어졌던 짜빈동 기습 방어전은 1개 중대(제3대대 11중대)의 병력으로 월맹 정규군을 주축으로 한 1개
연대의 적 기습공격을 장장 4시간여에 걸친 혈투끝에 격퇴시킴으로써 그 당시 자유세계의 매스콤들로 하여금 월남전 최대의 전과라며 찬탄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그 짜빈동 방어전에서 아군은 적 사살 243명과 포로 2명을 비롯하여 화염방사기 2문, 대전차 유탄포 6문, 경기관총 2문, 75밀리무반동총 7문, 수류탄 350발을 노획하는 혁혁한 전과를 거둔 반면, 아군측 피해는 전사자 15, 부상자 33명을 내었을 따름이었다. 전투가 끝난 그날 아침부터 피비린내 나는 짜빈동 진지와 청룡부대 본부에는 수많은 귀빈들이 다녀갔다. 15일에는 때마침 월남을 방문중에 있던 해병대사령관 강기천중장과 미해병대의 제3상륙군사령관 월트중장이 방문했고, 16일에는 월남군 최고사령부 참모부장과 주월한국군사령부 작전참모 및 UPI 기자들이 다녀갔다.
17일에는 정일권 국무총리와 김성은 국방장관, 신상철 주월한국대사 일행, 그리고 21일에는 티우 월남대통령과 키 수상 및 람 1군단장 일행이 방문하는 등 약 1개월간 방문객이 줄을 잇고 있었다. 그리고 월남전 사상 중대단위 방어전으로서는 최대의 전과를 거두었던 이 짜빈동 전투는 특진과 훈장에 있어서도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즉 3대대 11중대의 사병 전원이 1계급특진의 영예를 누렸고, 중대장 정경진 대위와 1소대장 신원배 소위에겐 태극무공훈장, 배장춘 및 김용길 하사관에게는 을지무공훈장이 수여되었으며, 김기홍 중위를 비롯한 8명의 장병들에게는 충무 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호이안지구 전투
1966년 9월 19일 추라이지구로 이동한 이래 1967년
12월 하순경에 이르기까지 30여 회에 걸친대대 및 여단급 규모의 작전을 전개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던 청룡부대는 1967년 하순부터
1968년1월 하순에 이르는 기간중 새로운 작전지역인 호이안지구로 이동했다. 청룡부대가 호이안지구로 이동하게 된 것은 월남의 제2전략도시인
다낭과 호이안시를 연결하는 1번도로를 확보함으로써 월남정부의 통제구역을 확장하고 월남정부의 평정사업을 지원하려는 데에그 목적이 있었다.
호이안지구로 이동한 청룡부대의 최초 작전은 괴룡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1968년 1월 30일 새벽 2시 30분을 기해 구정 휴전협정을 파기한
공산군이 월남 전역에 걸쳐 대대적인 공세를 취함에 따라 전개된 반격작전이었다.
당시 청룡부대의 전술책임지역내에서 공세를 취했던 적군은 월맹정규군 제2사단 예하의 3개 연대를 비롯한 수개의 지방군 대대였다. 그들의 작전기도는 호이안시를 점령한 다음 다낭시를 점령할 목적으로 강력한 포병부대의 지원하에 일차적으로 호이안시 및 청룡부대 전술책임지역 서남방의 2대대 6중대 지역에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여 공세를 취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디에반군과 휴논군 일대에 배치된 청룡 제2대대 및 호이안시와 두이센군 일부지역에 배치된 제3대대의 강력한 반격전에 부딪쳐 그 뜻을 이루지를 못했다. 약 1개월 반에 걸쳐 전개된 이 반격작전에서 청룡부대는 미 해병대의 공중지원과 미 해병대로부터 배속받은 전차 및 LVT의 협조와 지원하에 620여명의 적을 사살하고 수 명의 포로와 90여정(문)의 무기를 노획하는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으나, 아군측도 230여 명에 달하는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한편 괴룡작전을 마친 청룡부대는 계속해서 구정공세때 청룡부대 전술책임지역내에 침투한 적을 섬멸하기 위한 용진작전을 전개한데 이어 3월 하순경에는 약 1주일 간에 걸쳐 추수보호작전을 전개하여 부족한 식량확보를 위해 혈안이 되고 있는 적병들의 약취를 미연에 방지했다. 또한 4월 초부터 6월초에 이르기까지에는 서룡 1·2·3호 및 5호작전을, 6월 초부터 7월 18일까지는 용궁작전을 전개하여 700명 이상의 적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그 후 청룡부대는 포병대대 기지방어전과 야간매복작전, 그리고 승룡작전(1호~20호)과 황룡작전(1호~17호) 등을 전개하여 공산군의 소탕과 평정사업을 위해 큰 성과를 거두었는데, 특히 1968년1월 중순경에 전개된 승룡7-21호, 작전에서는 지하에 은닉해둔 대량의 군량미를 노획하는 이색적인 전과를 거두어 신문지상에 대서특필되었다.
파리평화협상과 연합군의 철수
1968년 5월 3일, 이날은 월남전을 평화적으로 종결시키기
위한 참전당사국(미국과 월맹)간의 첫 회담이 열린 날이었다. 회담을 먼저 제의한 쪽은 미국이었고, 미국이 끝내 무력에 일관하지 않고협상에 의한
타결을 모색하게 되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월남전의 특수성 때문에 미군이 수십만의 병력과 우수한 전쟁무기를 갖춘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서도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가 없었고, 둘째는 승산도 없는 전쟁을 막대한 전비와 희생을 무릅쓰고 계속하느냐 하는 미국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반전여론과 목전에 다가선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집권당(민주당)의 입장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일단 개막을 보게 된 파리평화 협상은 그 협상을 진전시키기 위한 막후교섭이 부단하게 이루어진 끝에 결과적으로 전쟁축소조정을 통한 [월남전의 월남화 계획]을 실천하려는 닉슨 미국대통령의 독트린에 따라 1971년 4월경부터 미군의 철수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호주와 뉴질랜드등 다른 연합국도 철군계획을 발표함에 따라 한국정부도 그해 11월 6일 제1차 철군계획을 발표했다.
1971년 12월 4일을 기해 청룡부대를
포함한 제1진의 철수가 단행되고, 그 뒤를 이어 종합적인 철군계획에 따른 후속부대의 철군이 단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월남전의 전쟁종결과 평화회복에
관한 협정(휴전협정)이 조인된 일자는 닉슨 대통령이 재선된 지1주일 후인 1973년 1월 27일이었고, 그 협정이 발효되어 월남 전역에 걸쳐
전투행위가 중지된 시각은 그 다음날 28일 오전 8시였다. 미국의 [월남화계획]에 따라 종식이 된 월남전은 미군이 월남전에 투입된 지 꼭
10년만에 끝난 셈이었다.
10년 간에 걸친 전투에서 미군은 45,000명의 전사자와 30만명 이상의 전상자를 내었다. 확전으로 치닫고 있던 1965년부터 1971년 사이에 소모된 전비는 무려 1400억 달러에 달했던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리고 한국군을 비롯한 다른 참전 연합군의 전사자만도 5000명 이상으로 집계되었고, 공산군은 30만명의 전사자와 50만명의 부상자를 냈고, 남북 월남의 민간인 피해자수는 무려 300만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산되고 있었으니, 실로 역사상 유례없는 대전쟁의 종결이었다.
그런데 1973년 1월 27일에 조인된 후전협정은 그로부터 2개월 후 미군의 마지막 철수제대가 월남을 떠나기 전까지는 그런대로 잘 지켜졌으나, 마지막 제대가 철수한 뒤로는 곧 전쟁이 재발함으로써 휴전협정이 사문화되고 말았다. 그 요인은 총 9장 23조로 된 그 협정문에서 미국은 지나치게 발뺌을 서둘렀던 나머지 UN의 중개라는 절차를 무시함으로써 휴전을 감시하는 평화유지군의 주둔을 기대할 수가 없게 된 것을 비롯해서 전쟁 재발을 방지할 수 있는 실효성있고 통제력이 있는 기능장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때문이었다.
그리고 월남 내에 2개의 정부와 군대,
그리고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이른바 제3세계의 존재를 허용했으며, 또한 미군은 비롯한 참전연합군의 완전철수 시한은 확고하게 못박아
놓았으면서도 월남 내에 침입해 있는 월맹군의 철수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는 등 통 세심하고 빈틈없는 배려가 결여된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공산군의
군사력이 크게 강화된 1974년 가을 이후 월남군의 전세가 날로 악화되기 시작했고, 그러한 과정에서 1975년 3월 중순경 중부월남의 12개성을
장악하고 있던 월남군 제2군단의최정예부대인 제23사단이 방어하고 있던 중부고원의 반메트오트 요충지가 실함된 것을 계기로 월남군의 붕괴가 가속화된
끝에, 1975년 4월 30일 마침내 사이공이 함락됨으로써 자유월남공화국은 영영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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