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해병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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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미국에서는 해병대가 특유의 존재라는 것이 두루 수용되는 통념이었다. 미국 해병대를 본따서 성립된 세계의 많은 해병대들 중 어떤 것도 미국과 같은 수준에 이르러 있지 않은데, 이는 근본적으로 평등주의적인 국가에서 엘리트 군대를 형성하는 것으로 역설적인, 그리고 때때로 논란의 대상이 되는 요구 수준이기도 했다.
해병대는 미군에 있어 그 구체적 조직이 법률로 정해져 있지 않은 유일한 군 조직이다. 미국 법전 제 10장 5063항에는 “해군 내에서, 해병대는 적어도 3개 지상 전투사단과 3개 항공단을 포함하는 군으로 조직되어야 하며 조직가능한 범위에서 그 이상의 지상 병력, 항공 병력, 그외의 군병력이 추가될 수 있다.”는 내용이 있다. 같은 문단에서는 또한 밝히기를; “해병대는, 점령, 전방 해군기지의 방위, 그리고 해군 전역 실시에 필요할 수 있는 육상전 실시를 위하여, 보조 항공전력와 합세하여, 연합 전력의 해군 소속 해병전력을 제공하게끔, 조직되고, 흔련되며, 무장된다”
20세기 중반 이후 반 세기 동안 해병대의 지상군 사단과 항공단들은 미국의 동, 서해안과 극동에 이르는 지역에 널리 주둔하고 있었다. 제 1해병사단의 기지는 캘리포니아의 캠프 펜들턴(Camp Pendleton)이었고, 그 항공요소 - 제3해병 항공단 - 는 엘 토로(El Toro)근교에 있었다. 또 제 2해병사단은 캠프 레쥰(Camp Lejeune)에, 제 2해병 항공단은 체리 포인트(Cherry Point)에 있었다. 한국전쟁 종전 이후, 제 3해병사단과 제 1해병 항공단은 대체로 일본의 오키나와에 주둔하였다.
해병 예비사단은 제 4해병사단 및 제 4해병 항공단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이는 모두 루이지애나의 뉴올리언즈에 주둔해 있었다. 월남전 후 해병대 현역병력은 평균 190,000에 달했다.
대륙 해병대
해병대의 기원은 1775년 11월 10일 필라델피아의 제2차 대륙회의가 해병대 2개 대대를 창설하기로 결의한 시점에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대륙군의 일부로서 보스턴을 포위하고, 노바 스코샤(Nova Scotia)에 대해 수륙 양면 작전을 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대륙군 사령관이었던 죠지 워싱턴은 이 병력이 문란해질 가능성을 고려, 해병대의 창설과 활용에 모두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리하여 상기 2개 대대는 창설되지 못했고, 노바스코샤 원정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1775년 12월 3백명으로 구성된 해병대대 1개 대대가 필라델피아에서 구성되었고 바하마(Bahamas)침공에 제1미국 해군대대와 합세해 참전하였다.
그들은 새뮤얼 니콜라스(Samuel Nicholas)대령의 지휘하에 1776년 3월 뉴 프로비덴스(New Providence)섬에 상륙, 무방비의 요새를 점령하고 나소(Nassau)로 진군해 또다른 무방비 요새를 손에 넣었다. 탈취된 적측 요새에 처음으로 미국 국기(아마도 대연방기 the Grand Union flag 이었을 것이다. 기록이 명확치 않다)가 게양되었다.
니콜라스 대령은 영웅으로 필라델피아에 귀환하였으며 소장으로 승진, 그리고 당시 델라웨어(Delaware)강에서 건조 중이던 4척의 프리깃함을 방위하기 위한 4개 해병대 중대 창설에 지휘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들의 제복 상의는 녹색과 백색(때로는 적색)무늬를 갖고 있었는데 이는 그들이 소총수들(머스켓 장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이라서가 아니라 당시 필라델피아에 녹색 천이 흔했기 때문이었다.
1776년 12월까지 3천의 병력으로 감소된 대륙군은 콘월리스가 이끄는 8천의 영국 정규군에 밀려 뉴 저지(New Jersey)를 횡단하며 퇴각했다. 워싱턴은 펜실베이니아 민병대를 보강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니콜라스의 해병 3개 중대(제4중대는 이미 프리깃함 랜돌프 Randolph 호에 승선해 있었다), 140 정도의 병력은 그 민병대에 편입되었다. 이 병력은 워싱턴이 계획했던 크리스마스 밤 트렌튼(Trenton)에의 총공격에 합세할 수 있도록 적시에 델라웨어 강을 도강하는 데는 실패했으나, 1777년 1월 3일 프린스턴(Princeton)에서는 분전해 보였다. 니콜라스 소장은 다시는 야전사령관이 되지 못하고 필라델피아에 남아 제 2차 대륙회의의 수비역을 맡고 있었다. 중앙 차원에서 더 이상의 해병대 모집, 훈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대신 각 선박별로 지역별 모병이 수병 모집의 방식으로 행해졌으며 이는 어디든 선박이 출항할 수 있을 만한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해병대를 각 선박에서 활용하는 것은 원정군으로 활용하는 것보다 더 이해될 만 했다 - 이내 영국 해병대의 원정군적 모델이 뒤이어 채용되었지만. 미 해병대가 영국군 예하부대로 활동했던 경우는 많이 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젠킨의 귀 전쟁(the War of Jenkins’ Ear : 1739-1742)으로서 당시 36개 중대로 이루어진 미 해병연대가 동원되어 해군 부제독 에드워드 버논(Edward Vernon)의 서인도 함대에 배속되었으며, 그들은 1741년 콜롬비아의 카르타게나(Cartagena)의 스페인군에 대한 상륙작전(실패로 끝난)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대륙 해군의 지휘관으로 해병대의 활용에 대해 이해를 기하고 있던 자들 중 하나는 존 폴 존스(John Paul Jones)대령이었다. 그는 전쟁 초기에 바하마의 뉴 프로비덴스 공격에 참전했었다. 그 후 두해 뒤 - 1778년 - 4월, 그가 20문의 함포로 무장된 슬루프 구축함 “레인져(Ranger)”호를 몰고 아일랜드 해(the Irish Sea)로 진입했을 때, 그는 해병대를 두 차례의 기습, 즉 화이트 헤이븐(Whitehaven)과 센트메리 섬(St. Mary’s Isle)에 대한 기습에서 활용했다.
존스가 프랑스의 보놈 리샤르(the Bonhomme Richard)호를 정비하여 1779년 9월 영국 동해안의 플램버러 갑(Flamborough Head)에서 세라피스(HMS Serapis)호를 공격, 승리를 거두고 있을 때 대륙 해병대는 수륙 양면전의 대실패에 봉착하고 있었다.
: 1779년 6월, 영국군은 핼리팩스(Hallifax)에서 출동, 메인 주의 페놉스콧 만(Penobscot Bay)에 주둔했다. 7월에는 보스턴에서 출항한 연방정부소속 선박들과 3척의 대륙해군 선박들이 그들을 구축했다. 당시 상륙부대는 227명의 대륙-메사추세츠 해병대와 그들을 보조하는 850명의 민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새로 건설된 죠지 요새(Fort George, 메인 주의 현 캐스틴 Castine 근방 지점에 있었다)는 7월 28일 공격당했으며, 여기서 해병대가 앞장을 섰다. 그러나 이 공격은 상륙부대 지휘관 솔로몬 로벨(Solomon Lovell)준장과 해군 지휘관 더들리 샐턴스톨(Dudley Saltonstall)준장 간의 불화로 인해 추진력을잃고 말았다. 그후 2주 동안 그 요새에 있던 7백의 영국군은 항복 기회만을 찾고 있던 터였는데, 8월 13일 영국의 구원 소함대가 만으로 진입, 미군 선박을 모두 격파하고 말았다. 대부분의 병력-폴 리비어(Paul Revere)중령 거기 끼어 있었다-은 보스턴으로 퇴각했는데, 거기서 그들은 비난의 대상이 되고 군법회의에 회부되기도 했다. 미국은 이후 2/3세기 동안 다시는 대규모의 수륙양면 강습을 시도하지 않았다.
1798년 7월 11일의 법령
독립 전쟁 후 대륙 해병대는 대륙 해군이 그랬듯 해체되었다.
해병대가 재탄생한 것은 1798년 7월11일, 의회가 제정하여 존 애덤스 대통령이 승인한 법령에 의해서였는데, 이는 소령 한명하에 32명의 해군 대위와 중위들, 48명의 하사관과 병장들, 720명의 사병들, 그리고 32명의 취주악대와 32명의 고수(鼓手)들로 구성되는 해병대를 창설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했다(초기에는 이 법정 정원의 반 정도가 될까말까 하는 현역 병력이 있곤 했다). 이 새로운 해병대는 해군의 군함에서 활동하게끔 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임무는 기지의 방위임무와 그외 대통령이 지정하는 임무 수행을 위해, 선상의 해병대는 해군 규정하에 들었고, 상륙해서는 육전법규(the Artides of War)의 구속을 받았다. 그들은 전쟁성으로부터 적색 무늬있는 청색 제복을 지급받았는데, 그것들은 당시 앤터니웨인(Anthony Wayne)소장의 군단에서 과잉공급되어 있었던 것들로 알려져 있다. 이로써 해병대의 “청색 제복”전통이 세워졌다.
본래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찰스턴(Charlseton)태생이나 이후 필라델피아에서 변호사 겸 상인으로 활동하며 강한 연방파 성향을 나타내고 있었던 윌리엄 워드 버로우즈(William Ward Burrows)는 최초의 해병대 소령이 되었고 곧 중령으로 승진했다. 영관급 장교에 수식하는 “컴맨던트(commandant)”라는 수식어는 계속 이어졌으며 해병대 출신자들 중에서도 영관급 장교들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 새뮤얼 니콜라스(Samuel Nicholas)는 비록 그대로의 직함을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최초의 해병대 출신 영관장교로 간주된다.
프랑스와의 “준전쟁”에서 해병대는 즉각 활용되었다. 역시 필라델피아 출신이었던 대니얼 카ㅁ(Danlel Carmick)대위는, 1800년 5월 12일 프리깃함 [헌법]호가 프랑스 사략선 [샌드위치(Sandwich)]호를 공격하기 위해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의 북부해안 소재 푸에르토 플라타(Puerto Plata)항에 입항했을 때, 소속 해병대 병력을 지휘했다. 그것은 당시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에 분점되어 있었던 하스파뇰라(Hispaniola)섬에 상당 규모의 병력이 상륙했던 최초의 사례였다.
1800년 6월, 수도는 필라델피아로부터 워싱턴 특구로 이전했다.
버로우즈는 그의 해병대를 필라델피아로부터 이동토록 하여 현재의 링컨 기념관 근처에 임시로 주둔하게 하였다. 버로우즈는 그가 배정받은 군악대 수준을 제고하기 위해 부하 장교들이 새 악기를 구입할 때마다 10달러씩을 지급해 주었다. 해병대 군악대는 대통령 관저의 뜰에서 열린 신년음악회에서 제퍼슨 대통령의 취임식을 비롯한 모든 취임식에서 연주, 1805년에는 “대통령 전용”악단이 되기에 이르렀다. 군악대의 수준을 제고하고자, 제퍼슨 대통령의 후원하에, 후일 해병대 장교들이 지중해상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이태리로부터 음악가들이 모집되었다(하지만, 속설에서와 같이 강제적 요소는 없었다).
1801년 3월 31일, 버로우즈는 신임대통령과 승마를 함께 하며 “해병대의 영구적 병영을 건립할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워싱턴시 동남부의 G번가(G streets)와 I번가, 8번가(Eighth streets)와 9번가로 둘러싸인 직사각형의 토지로, 그 토지는 “해군성 건물에 가까우며 의회로도 단시간내에 닿을 거리에 있기 때문”에 선정되었다. 그후 반세기 동안 이 구역은 해병대 사령부의 소재지이기도 했으며 아직도 해병대의 주요 행사는 이곳에서 거행되고 있다.
1804년, 버로우즈는 건강이 악화되어 조기 사임케 되었다.
그의 후임자로는 필라델피아 명문가 출신인 프랭클린 와튼(Franklin Wharton)중령이 선임되었다. 그는 해병대 군복을 개정했는데, 신형 군복은 여전히 청색과 적색이되 높은 샥코 모(shako)와 나폴레옹 전쟁기의 군복에 영향 받은 형태를 갖춘 것이었다.
그는 또한 본부 북방 G번가에 사령관사를 건립하는 사업도 추진했다. 1806년 이후 모든 해병대 사령관들을 이 사령관사에서 생활했는데, 이는 워싱턴시에서 건립당시 목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건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1804년 초 카믹(Carmick)대위는 122명의 해병대원을 이끌고 뉴올리언즈로 파견되었는데, 당시 이곳은 루이지애나 매입 후 미국령이 된 지 얼마 안 된 상태였다. 카믹은 해적들, 반란 노예들, 그리고 황열병과 싸워 나갔으며 그 지역에서 소령으로 승진된 것은 영국과의 미 . 영 전쟁이 발발한 시점이었다.
트리폴리 공략전
바르바리 해적단과의 분쟁이 프랑스와의 분쟁에 뒤이어 발생했다.
1801년 5월 트리폴리 태수는 미국 상선들이 북아프리카 바르바리 해안을 납공 없이 항행하는 것에 격분한 끝에 미국 영사관 앞의 국기게양대를 파괴하고 미국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했던 것이다. 제퍼슨은 해군 소함대를 지중해로 파견했으나, 전국은 아랍어 학자이자 한때의 육군 대위 윌리엄 이튼(William Eaton)이 대통령의 밀명에 의해 도착하기까지 별로 진전되지 않았다. 그는 나일강 상류 수백 마일 되는 지역에서 호전적인 마멜루크(Mameluke)족과 살고 있던, 트리폴리 태수의 좌천된 동생을 찾아내어 그가 트리폴리 원정에 참여하도록 종용했다. 대략 4, 5백의, 주로 아랍인들의 “군대”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서 결성되었다. 그중 직업군은 극소수였는데, 상사 1명, 사병 6명을 대동한 해병 중위 프레슬리 오배넌(Presley O’Bannon)이 그들이었다.
이튼의 병력은 리비아 사막을 6백마일 횡단하며 진군, 1805년 4월 27일에는 지중해 소함대의 소속 선박 3척의 함포지원을 받으며 성새 도시 더나(Derna)를 성공적으로 공격했다. 오배넌은 그 전장에 미국기를 꽃았으며, 신임 태수로부터 마멜루크 검을 증정받고 귀국하였다.
독립을 위한 제2전
미 . 영 전쟁에서 해병대는 역시 프리깃함상에서 주요 역할을 담당했다. 그중 특기할 만한 것은 데이빗 포터(David Porter)대위가 지휘하는 [에섹스(Essex)]호의 남태평양 작전에서 존 마샬 갬블(John Marshall Gamble)중위의 병력이 기여한 바와, [헌법]호가 - 찰스 스튜어트(Charles Stewart)대위가 지휘하던 - 1815년 2월 20일 [카이앵(Cyane)]호와 [레반트(Levant)]호를 나포하는데 있어 아치볼드 핸더슨(Archibald Henderson)대위의 병력이 기여한 것 등의 전과였다. 내륙의 해병대들은 캐나다에서 오대호 지역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영국군과 전투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제 103해병부대는 워싱턴 본부를 출발, 메릴랜드 해안에 상륙, 블래던스버그(Bladensburg)로 진군하여 1814년 8월 24일부터 영국군의 위싱턴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절망적인 분투를 하고 있던 그곳의 민병대와 해군병력의 지원에 들어갔다. 와튼(Wharton)중령은 그들을 지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워싱턴에서 피신한 매디슨(Madison)대통령 대신 수도를 지키게끔 선임되었다.
카믹의 해병대는 뉴올리언즈로 가서 앤드류 잭슨 장군의 수비진에 합세했다. 1814년 12월 28일의 첫 전투에서 카믹은 부상하였으며 결국 그 부상으로 인해 사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해병대는 계속 분투하여 1815년 1월 8일의 2차 전투(뉴올리언즈 전투)를 완벽한 승리로 이끌었다.
헨더슨 대위같은 사람은 와튼이 1814년 8월 블래던스버그를 탈취하기 위해 벌인 전투가 적절한 것이었다고 보지 않았다. 이에 1817년 군법회의가 열리기에 이르렀으며 와튼은 기소되어 불명예를 입었음에도 이듬해 사망시까지 계속 재직하였다. 연공 서열에 따라 선임된 차기 해병 사령관은 아일랜드 출신의 앤터니 게일(Anthony Gale)이었는데 그는 모줏군인데다 그외 여러 결함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는 해군장관과의 사이에 불화를 일으켰으며 또 한 번의 군법회의를 거쳐 1820년 해임되었다.
게일의 후임자 아치볼드 핸더슨은 버지니아 출신이었으며, 38년동안 해병대 사령관으로 재직하며 온갖 족적을 남겼다. 1826년에 그는 오배넌이나 그외 해병들이 기념품으로 가져왔던 마멜루크검의 형태를 본따 해병대 장교의 대검을 디자인토록 했으며, 이는 현재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헨더슨의 재직기간 첫 15년간은 카리브해 해적 토벌작전, 서부 아프리카 노예무역 제지작전, 그리고 포클랜드(the Falkand Islands)나 수마트라(Sumatra)같은 전 세계 여기 저기에의 상륙작전 등이 잇달아 벌어지며 지나갔다.
이같이 전세계적으로 파병을 하면서도, 잭슨 대통령은 해병대를 유지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고 1829년에는 이를 육군에 편입하려는 시도를 했다. 이후 5년간의 논쟁을 거친 뒤, 1834년 6월 30일에는 ‘해병대조직개선법(the Act for the Better Organization of the Marine Corps)’이 의회에서 통과되기에 이른다. 이 법은 해병대 사령관의 계급을 대령으로 올렸으며, 보다 중요하게는, 1798년도 법률의 몇 가지 애매한 사항을 시정하였다: 즉 이 법은 대통령으로부터 육군과 임무수행하라는 특별한 지시가 없는 이상 해병대는 해군 소속으로 해군 규정에 따라 규율된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 있었다.
이에 잭슨 대통령이 즉각적으로 취한 행동은 조오지아와 플로리다의 세미노울 족을 제압하는 작전을 위해 1개 해병연대를 창설토록 해 달라는 헨더슨의, 1836년 봄에 제기한 요청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었다(1835년, 해병대 병력은 최초로 1천을 넘어섰다 : 즉 68명의 장교와 1349명의 해병이 병적에 올라 있었다). 헨더슨은 해병대 본부와 해군 본부 수비병을 일부 차출하여 1개 연대를 1주만에 창설했다.
그는 그 연대를 증기선, 철도, 그리고 행군을 통해 플로리다로 파병하는 과정에서 직접 지휘에 임했다. 당시 잭슨 대통령의 명에 따라 녹색 제복상의를 착용하고 있던 해병대는 독립전쟁시의 전법을 재채택하였다. 육군은 헨더슨에게 해병연대를 포함하는 1개 여단의 지휘권을 양도했고, 그의 세미노울 전쟁(1836-1842)승리는 준장으로 진급되는 기회를 부여하였다. 전장에서 1년을 보낸 다음, 헨더슨은 워싱턴의 해병들에게로 돌아왔다. 플로리다의 태양 아래 녹색의 제복은 쉽게 색이 바랬으며 1839년 청색 제복이 부활하였다.
미·멕 전쟁에서 남북전쟁까지
해병대가 다음에 맡은 역할은 제임스 포크 대통령의 “명백한 운명”론에 의한 영토확장책에서 일익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1845년 늦가을, 포크는 아치볼드 길레스피(Archibald H. Gillespie)중위에게 정탐임무를 부여해 멕시코로 파견했다가 다시 캘리포니아로 가서 존 프레몬트(John C. Fr mont)대위에게 밀명을 전달하도록 지시했다. 길레스피는 프레몬트의 부관이 되었으며 이후 육해군 합동작전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미 . 멕 전쟁(1846-1848)기간 중, 해병대는 샌프란시스코, 몬테레이(Monterey), 산타 바바라(Santa Babara), 산 페드로(San Pedro), 과이마스(Guaymas), 뮤레헤(Muleje), 산블라스, 산호세(San Hos )등지에서 상륙작전을 수행했으며 이는 지리적으로 원거리의 정제하지 않은 방위에 대하여 소규모 상륙부대가 갖는 전략적 중요성을 증명해 주었다.
미군 전쟁사에서 대규모 수륙양면 작전으로 최초의 것은 1847년 3월 9일, 윈필드 스코트 장군이 베라크루즈에 상륙할 때 전개되었다. 이 고도로 효과적인 상륙작전에서 1개 해병 대대를 포함한 1천 2백의 병력을 상륙케 했다. 베라크루즈 상륙과 점령은 미 . 멕 전쟁의 분수령을 이루었으며, 멕시코만 해안에 대한 매튜 페리(Matthew C. Perry)제독의 상륙작전도 이 전쟁 중에 있었는데 페지 제독은 수륙 양면전의 기술과 가능성에 대해 탁월한 이해를 갖고 있음을 이때 보여주었다. 그는 그가 지휘하던 함상 해병대로부터 차출해 구성한 해병여단 1개 여단을 멕시코만의 각처로 상륙토록 했다. 이 전쟁으로 인해 1847년 당시 해병대의 병력은 75명의 장교와 1,757명의 사병으로 확대되었다.
1853년 페리는 동인도 소함대(the East India Squadron)를 이끌고 일본에 “흑선(black ship)의 방문”을 하였다. 이 소함대에는 박격포 샤코 모(stovepine shako)를 착용한 2백의 해병대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의 직속 지휘관은 제이컵 젤린(Jacob Zeilin)소령으로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출생했고 캘리포니아 정복에 공로가 컸던 인물이었다. 일본인들에게 해병대는 지속적인 인상을 주었다.
1855년 해병대는 우루구아이(Uruguay)의 몬테비데오(Montevideo)에 상륙했고, 그 다음해에는 워싱턴 관구, 시애틀(Seattle)근교에서 인디언들과 싸웠다.
그리고 동년, 그들은 영국군과 합세해 중국 광동(廣東)남부의 주강(珠江)유역에 있던 “배리어 요새(the Barrier Fort)”를 점령했다. 같은 해에 해병대는 파나마, 니카라구아, 우루구아이, 그리고 파라구아이(파나마 강을 경유하여)에도 상륙하였다.
1859년 헨더슨이 재임중 순직했다. 향년 76세였다. 그의 후임에는 69세의 펜실베니아 출신 존 해리스(John Harris)가 임용되었다. 해리스는 헨더슨 휘하에서 플로리다의 해병 기마대를 이끌었었으며, 당시의 무훈으로 하여 소령으로 진급되었었다. 미 . 멕 전쟁시에는 대대장으로 복무했는데, 단 그가 실전에 투입되기 전에 전쟁이 끝났었다.
1859년 10월 16일, 연방 폐지론자 존 브라운과 그의 일당이 버지니아 하퍼스 페리의 미군 무기고를 점령했다. 이 반란을 진압할 정규군 병력으로 그 인근에 주둔해 있던 병력이 없었으므로, 워싱턴 본부로부터 86명의 해병대가 열차편에 하퍼스 페리로 급송되어, 로버트 리 중령의 휘하에 들어갔다. 해병대는 브라운이 수비하고 있던 소방본부를 급습했으며, 브라운은 생포, 12월에 처형되었다. 그리고 향후 발생했던 노예문제관련 일련의 사건들은 남북전쟁에의 피할 수 없는 길을 열어갔다.
남북전쟁 기간 중 미 해병대 - 장교 . 사병 도합 4천을 넘은 적이 없는 - 의 전과는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 해리스는 함상 해병대와 해군기지 수비병들을 동원해 임시 조직한 대대들로 남부연합의 해안선(멕시코만과 대서양 연안의)에 대한 공격을 하는 것에 만족하는 듯 보였다. 그는 재임중 1864년 5월에 순직했다.
해군장관 기드온 웰레스(Gideon Welles)는 해병대의 노(老)폐물들을 기피해, 연공서열을 무시하고 젤린(Zeilin)을 선임했는데 그는 57세였으나 아직 소령으로, 제1차 불 런 전투(the First Battle of Bull Run)에서 부상까지 당하며 지휘를 맡았던 경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웰레스는 그를 소령에서 바로 대령으로 진급토록 하며 해병 사령관으로 선임했으며, 그는 1867년에 가서는 다시 준장으로 진금했다.
해병대의 개혁
젤린은 그의 재임기간 중 육군의 신 보병전술을 응용, 그의 해병대를 후장총으로 무장케 했으며, 독수리와 지구, 닻 그리고 “항상 성실되게(Semper Fidelis)”라는 모토를 갖춘 새 문장을 만들도록 했다. 새로운 군가 “몬테주마의 왕궁에서 트리폴리 해안까지(From the Halls of Montezuma to Shores of Tripoli)”도 불리워지기 시작했는데, 그 가사는 미 . 멕 전쟁 후 어느 땐가 씌어졌고 곡은 아마도 오펜바하(Offenbach)의 오페레타에서 빌린 것이었으며, 1868년에는 앤토니오 수사(Antonio Sousa: 그는 목수이자 트럼본 주자로, 워싱턴 본부에서 근무했었다)의 13세된 아들이 군악대의 일원으로 편입되었다. 존 필립 수사(John Philip Sousa)는 21세에 병역이 해제되기까지 복무했다.
1872년 제임스 포니(James Forney)대위(남북전쟁시의 무훈으로, 중령으로 명예진급하게 된다)가 유럽에 파견되어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독일, 터키, 이태리의 해병 또는 해군 보병대를 시찰하였다. 대체로 대륙의 해병대들은 해군기지 방위임무를 맡고 있었으나, 단 영국 해병대만은 원정 경력이 1회 있었다.
포니는 그들의 훈련과정에서 참고할 만한 것들을 많이 보았으며, 일련의 건의사항을 목록에 적어 갖고 돌아왔다.
젤린은 1876년 사임했으며 제8대 해병사령관에는 찰스 맥컬리(Charles G. McCawely)가 선임되었다. 맥컬리도 펜실베이니아 출신이었으며 당시 49세밖에 되지 않았었다. 그는 스코트 휘하에서 1847년 9월, 멕시코 시티로 대대 병력을 지휘하여 진격했었으며 캐롤라이나 연안 상륙작전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었다. 그러나, 젤린의 개혁노력에도 불구, 해병대는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맥컬리는 훈련방식을 개선했고, 타자기를 행정사무용으로 처음 도입케 했으며, 해군대학 졸업생들을 해병대 소위로 임관되게끔 협의를 보았다. 1880년 그는 존 필립 수사를 다시 해병 군악대로 복직토록 했다 - 그 악대장으로서. 맥컬리는 그의 64세 생일에 사임했으며 1891년 6월 30일에 선임된 차기 해병사령관은 메인 주 출신 51세의 찰스 헤이우드(Charles Heywood)였다, 그는 1858년 이래 해병이었는데, 1885년 대대장으로서 파나마로 진격했고 남북전쟁기에는 “청년 중령”으로 명예진급되었었다.
남북전쟁 직후, 해군이 천천히 그리고 내키지 않게 목제선에서 철제 기선으로 소속 선박을 대체하고 있을 즈음, 수륙 양면전 또는 원정전 전술은 별로 진보가 없었으나, 매우 많은 상륙작전이 실시되고 있었다. 미국은 “미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 국기에 대한 실제적인 또는 추정된 모욕에 보복하기 위하여, 중국, 대만, 일본, 니카라구아, 우루구아이, 멕시코, 한국, 파나마, 하와이, 이집트, 아이티, 사모아, 아르헨티나, 칠레, 콜롬비아 등지에 계속해서 상륙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상륙들은 매우 엉성한 것들이었으며 실제 적대행위가 있었던 경우는 소수에 불과했다. 1981년에 해병대는 밀렵꾼들로부터 바다표범을 보호하기 위해 베링 해(the Bering Jea)를 순찰하였다. 해병대 병력규모는 2천을 웃돌았다.
“해병대는 항상 어딘가에 상륙하고 있는데 가까이 접하는 상황에는 별 이상이 없더라”는 생각이 굳어져 갔으며, 이에 따라 육군이 어딘가에 상륙한다면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해병대의 상륙은 그렇지 않다는 속설이 형성되었다■
미·서 전쟁과 알프레드 테일러 마한 제독의 이론은 해군 작전의 성격을 뒤바꿔 놓았다. 해군의 신형 철제선들은 석탄을 필요로 했으며, 이는 전진 기지 내에 군함급탄소(軍艦給炭所)를 설치해야 함을 뜻했다. 미·서전쟁은 1898년 4월 25일에 선포되었고, 5월 말경 해군 준장 윌리엄 샘슨(William T. Sampson)은 샌디아고 데 쿠바에서 스페인의 대서양 함대를 봉쇄했으나, 그의 봉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근처에 석탄을 공급해 줄 전진 기지가 필요했다. 해병 1개대대가 급히 조직되어, 6월 10일에는 스페인측 저항이 그리 크지 않은 쿠바의 관타나모(Guatanamo)만으로, 표범(Panther)이라는 이름의 원래는 바나나 수송선이던 선박을 이용해 상륙했다.
미 해군은 이후 해병대의 지원을 받아 관타나모의 전진기지를 유지하였다. 현대 수륙 양면전의 시작일은 1898년 6월 10일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관타나모에 상륙했던 해병대대는 2차대전, 한국전, 베트남전의 상륙대대들의 선구가 되는 것이었다.
1990년 8월, 1개 해병연대가 북경의 외교사절을 구출하기 위한 다국적군의 일원으로 원정에 참여해 의화단(義和團)을 무찌르고, 다시 필리핀으로 귀환해 1902년 미·필리핀 전쟁 직후 발생한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투입되었다. 해병대 규모가 6천명으로 확대되면서 헤이우드는 1899년 준장으로, 1902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그는 1903년 64세의 나이로 사임하였으며 앨라배마 출신으로 1870년 이후 해병대원으로 복무했던 조지 엘리옷(George F. Elliott)이 준장 계급으로서 후임자가 되었다.
미·서 전쟁의 교훈들은 로드 아일랜드, 뉴포트의 해군 전쟁대학에서 연구되었다. 해병대는 수송선에 상근 해병력을(대대나 연대병력의) 배치하는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가령 카리브 해의 병력의 경우에는 6개 또는 그 이상의 분쟁지역에 언제든지 상륙부대를 투입할 태세가 되어 있었다. 그같은 상륙의 예로는 엘리옷이 직접 지휘했던 1903년의 파나마 상륙작전, 파나마 운하의 준설로 이어진 1904년의 상륙작전, 1907년부터 1917년까지 여덟 차례 실시된 쿠바 상륙, 1912년의 니카라구아 상륙작전 등이 있었다.
엘리옷은 1911년 사임했고 필라델피아 출신 윌리엄 비들(William P. Biddle)이 승계했는데 그는 1875년 이래 군에 있었고 마닐라만 전투시 조지 듀이(George Dewey) 제독과 올림피아(Olympia)호에서 근무했으며, 의화단 사건시 북경으로 진격한 경험도 있었다. 해병 사령관으로서 그의 가장 큰 공적은 아마도 1913년 필라델피아에서 함대 해병대(the Fleet Marine Forces)의 원조가 되는 해병 전진기지 전대(the Marine Advance Base Force)를 창립한 것이 될 것이다. 이는 2개의 소규모 연대가 딸린 1개 여단이었는데, 항공전력도 포함하고 있었다.
해병대에 항공력이 포함되다
해병으로 최초의 비행자는 알프레드 커닝엄(Alfred A. Cunningham) 대위였다. 그는 1911년에 프로펠러를 단 고안물을 빌려서 필라델피아 해군기지내 연병장을 털털거리고 돌아다니며 비행술을 익혔다. 그의 열정의 댓가로 그에게 비행훈련의 기회가 주어졌으며, 그가 애너폴리스에서 새 해군 항공대 캠프를 세웠다고 보灼? 1912년 5월 22일을 해병대는 그 해병 항공대의 창설일로 보고 있다.
1914년, 비들은 임명 후 얼마 되지 않아 사임했고 위스콘신 출신의 조지 바넷(George Barnett)이 승계했는데 그는 해군대학 졸업생(1881학번)으로 최초의 해병 사령관이 되었다. 그리고 이와 거의 같은 시기(그해 4월)에 전진기지 여단(the Advance Base Brigade)은 베라크루즈에 상륙함으로써 최초로 원정수행 능력을 시험받게 되었다. 당시 여단장은 루이지애나 출신의 존 레쥰(John A. Lejeune) 대령이었는데 그는 소령 시절에 1903년 파나마에 상륙했던 해병대대를 지휘했었고 “개중 가장 위대한 해병 녀석”의 별명을 얻었었다.
미국이 1차대전에 참전하기 직전, 해병대(만 일천에 약간 못 미치는 규모까지 확대된)는 1915년부터 장기간 아이티 개입에, 그리고 1916년부터는 도미니카 개입에 참여하였다. 대체로 그들의 임무는 산적 소탕, 공공건물 건설, 그리고 해병 장교가 간부가 되는 토착민 경찰대를 창설하는 등의 임무였다.
해병대의 프랑스 원정, 그리고 대전 중간기
전쟁성 장관 뉴튼 베이커(Newton Baker)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이 1917년 4월에 세계대전에 참전한 후 프랑스로 파견된 최초의 미군 병력은 1개 해병연대가 되었다. 다시 1개 연대가 파병되었고, 이 2개 연대가 합해져 제4해병여단(the Fourth Brigade of Marines)을 구성했다. 1918년 6월부터 11월까지 이 여단은 미 제 2 보병사단의 일부로서 활동하며 벨로 우드(Belleau Wood)에서 세계의 이목을 끌었고, 다시 스와송(Soissons)과 생 미쉘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며, 그리고 이후에는 제 2해병사단장 레쥰 소장과 함께 블랑몽(Blanc Mont)과 뫼즈-아르공(Meuse-Argonne)에서 명성을 떨쳤다.
당시 대령이 되어 있던 커닝엄은 1917년부터 해병 항공대 임무수행차 - 지상 해병병력을 지원하는 임무가 되기를 기대하며 - 프랑스에 와 있던 터였는데, 1918년 늦여름에 소령으로 진급된 후 프랑스 내 DH-4 드하빌랜드(DeHavil-lands) 4개 비행중대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부대는 제 4해병여단이 작전하던 지역과는 멀리 떨어진 서부전선의 영국군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그들은 전쟁 말기에 12대의 독일 비행기를 격추하고 57회의 폭격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4명의 전사자만을 내었다.
1918년 말, 해병대는 75,101이라는 공전(空前)의 규모에 도달하였다.
1차대전에서의 사상자 수는 총 11,366이었으며, 그중 2,459는 사망자 또는 실종자였다.
1921년 레쥰이 소장의 직위로서 바넷을 승계하였다. 이후 해병 병력은 22,990으로 감소되었다. 레쥰은 버지니아의 콴티코(Quantico)에 정식으로 해병학교(the Marine Corps Schools)을 열었으며 장교 양성 과정을 3단계로 정립해 놓았다: 기초단계(신임 중위들을 위한), 중대장 단계(대위들의), 그리고 야전장교 단계(소령과 중령을 위한)로. 이 3중의 장교양성 체제는 그 명칭이 여러가지로 변화했을망정 계속되었으며 현재는 초급 해병학교(the Basic School), 상륙전 전술학교(the Amphibious Warfare School), 그리고 지휘참모대학(the Command and Staff College)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레쥰은 제 2 대륙회의가 최초의 해병대대 창설을 승인했던 1775년 11월 10일을 해병대의 공식 창립일로 삼음을, 그 후 연례적으로 낭독되곤 하는 교서에서 분명히 하였다.
1922년, 레쥰은 전진기지 전대를 재조직하면서 그 본부를 필라델피아로부터 콴티코로 옮겨 동안 원정대(the East Coast Expeditionary force)로 기능하도록 하였으며, 서안 원정대는 산디아고에 본부를 두게 하였다.
대전 중간기에 해병대는 아이티, 도미니카, 니카라구아, 중국에 각각 소규모 원정 여단을 파병하였으며, 이때 어느 원정군에나 항공요소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기간 중 해병대와 해군의 전략기획은 일본과의 전쟁을 상정하고 있었으며 이는 미국이 태평양을 가로질러 전선을 펼쳐야 함을 뜻했다. 그리고 해병대에게 있어서는 일본군에 의해 굳게 방비되고 있는 중부 태평양의 도서지역에 공격을 가할 임무를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이 가상전에 대한 분명한 언급은 1921년에 작성된 작전계획 제 712호, “미크로네시아(Micronesia)에서의 전진기지 작전”에서 이루어졌다.
1929년 레쥰은 62세의 나이로 9년간의 해병 사령관직에서 사임했고 퇴역 상태에서 버지니아 군사연구소(the Virginia Millitary Institute)의 고문직을 맡았다. 그의 후임자는 카리브해와 프랑스에서 그의 오랜 전우였던 웬델(버크) 네빌(Wendell C. “Buck” Neville)이 되었는데, 그는 1년하고 약간 더 재직하다가 사망하였다.
1930년 8월에 임명된 제15대 해병사령관 벤 풀러(Ben H. Fuller)는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로 “벤 아저씨(Uncle Ben)”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는데, 그의 임시 보좌역 존 러셀(John H. Russell Jr.) 소장은 캘리포니아 출신으로 9년간 아이티 총독을 역임한 경력이 있었다. 1933년 대체로 정력적이고 능력도 뛰어났던 러셀에 의해, 동안 원정대와 서안 원정대가 함대 해병대(the Fleet Marine Forces)로 통합되었으며, 그 제 1해병여단은 콴티코에, 제2 해병여단은 산디에고에 본부를 두며 각각 항공단을 갖도록 되었다.
풀러와 러셀이 재직하던 시기에는 또한 1915년 영국군이 갈리폴리(Gallipoli)에서 겪은 재난을 분석한 해병학교의 장교들이 이론적 연구와 함상 경험을 조합해 하나의 유력한 교리를 안출해 내는 일이 있었다. 이는 상륙정과 수륙양용 차량에 크게 역점을 두는 것이었다. 1938년까지, 후일 2차 대전에서 사용될 형태의 상륙정과 수륙양용 차량의 전 기본형태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였던 것은 함안이동(艦岸移動) 방식이었고 그에 연관되는 문제들로 지휘관련 문제들, 선박-해안간 병참 문제, 병력 운반선의 무장 문제, 그리고 항공, 함상 화력지원 문제들이 있었다.
이같은 문제들의 해결책이 모색되고 있는 동안, 델라웨어 출신의 토머스 홀콤(Thomas Holcomb)이 1936년에 러셀을 계승해 해병 사령관이 되었다. 프랑스에서 대대장으로 근무시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었고 오랫동안 “중국 해병대원(중국에서 오랫동안 근무하여)”으로 알려졌던 홀콤은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오랜 지기(知己)였기 때문에 해병대에 보다 유리한 환경이 조성될 수 있었다. 2차 대전 직전의 시기에 해병대는 항공모함에서 작전하는 방식을 교련하기 시작했다. 이는 계속 진행되면서 해군 항공에 큰 유연성을 부여하였다 - 해병대 부대들은 함상에서, 해군 부대들은 (많은 경우에) 원정 비행장에서 항공편으로 수송될 수 있었다.
전쟁이 임박하자, 일단 해병대는 방어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 점점 분명해졌다. 1941년 제 1 해병연대는 제 1 해병사단으로 되었고, 제 2 해병여단은 제 2 해병사단이 되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동안과 서안의 원정대 소속 항공단들은 각각 제 1, 제 2해병 항공단(Marine Aircraft Wings)으로 바뀌었다. 1941년 여름에는 1개 예비 해병여단이 아이슬란드(Iceland)를 수비하기 위해 파병되었다.
방어 대대들 - 대공포대, 해안포대, 보병대, 항공대를 포함하는 - 이 아이슬란드로 보내졌고 태평양 해역에서도 사모아, 미드웨이, 웨이크, 존스턴(Johnston), 팔미라(Palmyra) 제도에 파견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미국은 2차 대전에 1941년 12월 7일부로 개입하게 되었다.
개전 후 처음 8개월 동안 해병대가 치른 전투들은 분명 방어적인 것들이었다 - 진주만, 괌, 웨이크 도(島), 바탄(Bataan)반도, 코레기도(Corregidor), 그리고 미드웨이에서 치러진. 웨이크와 이후 미드웨이에서 해병 항공대가 수행한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는데, 두 경우 공히 전투기 요격과 정찰폭격(scout-bombing) 임무가 그것이었다.
2차 대전 초 해병대의 배치병력 규모는 1개 여단 규모였다. 1942년 1월, 제 2해병여단이 제 2해병사단에서 차출되어 미국령 사모아로 파병되었다. 그리고 2개월 뒤에는 제 3해병여단이 제 1해병사단에서 차출되어 서사모아로 파병되었다.
1940년 홀콤은 4년 임기 해병사령관직 제 2기를 시작했고, 1942년 1월에는 삼성(三星) 중장으로 진급했는데 해병대 출신으로 중장까지 진급하기로는 그가 처음이었다.
태평양 전쟁에서 미 해병대가 취한 최초의 공세는 알렉산더 반데그리프트(Alexander A. Vandegrift)소장의 지휘 하에 제 1해병사단이 과달카날에 상륙한 것이었다. 해병대와 해군의 공병대들이 이 산호섬에 임시 활주로를 건설하는 즉시로 해병대 항공대가 상륙했다. 해병대 주력은 8월 7일에 상륙했다. 선두의 2개 해병 비행중대들은 - 전투기 중대와 정찰 폭격기 중대 - 8월 20일에 헨더슨 공항(Henderson Field)에 도착했다. 과달카날에 상륙한 해병대는 육 . 해 . 공 삼면에서 일본군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해야 했다. 미군의 지원군이 도착한 1943년 2월까지 일본군은 이 섬을 탈환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는 태평양 전쟁의 분수령이 되었다.
남태평양에서 뉴 조오지아(New Georgia)가 과달카날에 이어 함락되었고(1943년 6월), 그 뒤로 부겐빌(Bougainville)이 떨어졌다(1943년 11월). 그러나 중부 태평양에서는 예측되었던 대로 해군-해병대 수륙양면 작전술이 그 최대의 시험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는 1943년 11월 20일에 길버트 제도(the Gilbert Islands)의 타와라(Tawara) 산호초 중 베치오(Betio) 섬에 대한 공격이었다. 거기에는 인접한 비행기지나 이용가능한 항모가 불비했으므로 해병 항공대는 소용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3일간의 치열한 전투(일본군측 전사자는 거의 6,000에 달했고, 미 해병대는 1,027명이 전사한(2,292 명 부상) 끝에 공고히 방위된 요새에의 수륙 양면전이 성공할 수 있음이 결국 증명되었다.
1944년 1월, 과달카날의 영웅으로서 훈장을 받았던 반데그리프트가 홀콤을 승계해(그는 남아프리카 대사로 영전했다) 해병 사령관이 되었다. 그후 종전까지의 남은 12개월 동안 해병대는 글루시스터(Gloucester), 콰잘린(Kwajalein), 에니웨톡(Eniwetok), 사이판, 괌, 펠렐리우(Peleliu), 유황도, 오키나와에서 작전하였다.
해병대 병력은 2차 대전 중 485,053명의 최대 규모에 도달했다.
그 군 구조는 총 6개 사단과 5개 비행대로 이루어진 2개 군단이 되었다. 대전 중 해병대 사상자의 총수는 19,733명 사망에 62,207명 부상이었다.
전후에 각기 1개 사단과 1개 항공대로 구성되는 함대 해병대가 대서양과 태평양에 1개 대씩 존립하기로 결정되었다. 새로운 ‘캐피톨 힐(Capitol Hill) 전투’는 각 군의 ‘통합’과 관련하여 벌어졌다. 전쟁성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하는 강력한 압력은 해리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1947년의 국가 방위법은 각 군을 단일 국방성 하에 육군부, 해군부, 공군부로 속하게끔 했다. 해병대는 여전히 해군 소속으로 남았으나, 그 장래는 불투명하였다. 원폭의 개발로 인해 수륙양면전이 시대에 뒤질 위협에 직면한 해병대는 헬리콥터가 함안이동(艦岸移動)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끔 하는 새로운 전술을 시험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해병대 헬리콥터 비행중대가 된 HMX-1은 1947년에 조직되었으며 현재에는 대통령 전용 헬기를 담당한다.
1948년 1월 1일, 1차대전 중에는 프랑스에서 소대장과 중대장으로, 그리고 태평양전에서는 연대장과 사단장으로 무훈을 세웠던 테네시 출신 클리프튼 케이츠(Clifton B. Cates)가 반데그리프트를 승계해 해병사령관이 되었으며 그는 사성장군(四星將軍)으로 그 자리에 취임했다. 전후의 동원해제와 트루먼 행정부의 예산절감책으로 인해, 그의 임기 동안 해병대 병력은 74,279명으로 줄었으며(1950년 여름 상황), 이는 2개 사단과 2개 비행대의 골간조직 인원소요에만 간신히 충당되는 것이었다.
한국 전쟁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했다. 태평양 함대 해병대 사령관이던 레뮤얼 쉐퍼드(Lemuel C. Shepherd) 중장은 7월 10일에 극동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를 토쿄에서 만났다. 맥아더는 쉐퍼드에게 제 1 해병사단을 자신의 지휘하에 두도록 해준다면 북한군의 후미를 찔러 인천에 상륙하겠다고 말하였다.
이틀 뒤, 제 1 해병사단에서 급히 차출된 제 1 해병 예비여단이 산디에고로부터 파병되었는데, 인천이 아니라 부산 권역을 수호하기 위한 절망적인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 여단은 8월 2일부로 부산에 상륙했으며, F-4U 콜세어(Corsair) 전투기 33대로 구성된 해병 항공단의 지원에 힘입어 이 권역의 성공적 방위에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 여단은 해로를 통해 제 1 해병사단의 잔여병력과 합류했는데, 이들은 대체로 제 2해병사단에서 차출된 병력과 예비전력을 소집한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사단은 9월 11일에 인천에 상륙, 적의 측방을 공격하여 미 8군이 부산 권역에서 치고 나올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한국의 수도인 서울로 진격하고 나서, 제 1 해병사단은 다시 한국의 동해안에 있는 원산에 상륙하기 위하여 출항하였다. 그리고 원산에서부터 한국의 북부 경계선인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진군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중국군이 전쟁에 개입해 왔고, 초산 저수지로부터의 기록적인 철수가 있었으며, 결국에는 미 해군측의 마지막 걸작이 된 흥남(興南)으로부터의 수륙양면적 철수가 행해졌다.
전쟁의 뒷수습을 위해 제 1 해병사단과 제 1 해병 항공대는 한국에 남았으며 모두 각자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다; 그러나 미 제 5공군과의 약간의 관할권 문제와 교리상의 알력이 없지도 않았다. 공군의 교리는 무엇이든지 비행체인 이상 공군의 통제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해병대측은 그 공지(空地) 전단이 연합전단으로 남아 있어야만 최상의 전력을 갖출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이보다는 덜 문제가 되었던 것은 해병대가 한국에서 헬리콥터를 선구적으로 운용하던 일이었다. 애초 정찰과 연락용이 주였던 그것은 점차 방역 소개(防疫疏開)나 해병대와 그 보조병력의 운송에도 활용되게 되었다. 또한 한국전 동안에 해병대 항공대의 항공기들은 프로펠러 전폭기에서 제트기로 개량되었다.
케이츠는 임기 중 곧잘 트루먼과 알력을 갖고는 했다. 버지니아 출신이며 케이츠와 마찬가지로 양차대전에서 무명(武名)이 높았던 쉐퍼드가 1952년 1월에 제 20대 해병사령관으로 취임했다. 의회에서의 “전투”는 계속되었다. 1951년 1월, 초산 저수지로부터의 철수가 있은 직후에, 폴 더글라스(Paul H. Douglas) 상원의원과 마이크 맨스필드(Mike Mansfield) 하원의원(두 사람 다 원래 해병대원이었던) 등이 제출한 법안은, 그 최종 형태에서, 평시 해병대 군구조를 3개의 현역 사단과 3개의 항공단으로 규정하고, 또 합참에서 해병대와 직결된 문제가 의제가 되었을 경우에는 해병사령관이 동등한 발언권을 갖도록 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1953년 해병대 병력은 250,000명까지 증강되었고, 한국전쟁의 사상자는 전사자 4,262명, 부상자 21,781명으로 1차대전시 사상자 수의 배에 이르고 있었다.
한국전 이후의 문제들
쉐퍼드처럼 버지니아 출신이며 버지니아 군사학교(Virginia Military Institute) 졸업자인 랜돌프 페이트(Randolph McC. Pate)가 1956년 1월에 쉐퍼드를 승계해 해병사령관이 되었다. 페이트의 가장 혹독한 시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왔는데,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패리스 아일랜드(Parris Islands)에서 한 훈련교관이 훈련소대에게 불법적인 야간 행군을 지시하여, 리본 크리크(Ribbon Creek)의 늪지대에서 6명의 훈련병이 事故死하게 만드는 사건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는 해병대의 훈련방식에 막대한 비난과 간섭이 주어지게 하였으며, 해병대와 그 지지자들의 개인별 노력에 의해 월권행위 감시를 위한 감시단을 두는 선에서 해병대 신병훈련소의 폐지 움직임을 간신히 막아낼 수가 있었다.
1958년 여름, 친서방적이었던 이라크 왕 파이잘(Faisal) 2세의 암살이 아랍 세계의 세력균형을 뒤흔들어 놓은 후, 4개 상륙대대와 1개 여단의 연합병력인 제 2 예비 해병대(the Second Provisional Marine Force)가 레바논 대통령 카밀 샤뭉의 요청에 의해 평화유지군으로서 레바논에 상륙했다.
1960년 1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타와라에서 무공 훈장을 받은 바 있던 인디애나 출신 데이빗 슈프(David M. Shoup)를 페이트 후임의 해병사령관으로 선임했다. 거칠고 현실주의적인 해병이었던 슈프는 해병대를 그가 생각한 대로의 근본 위치로 복귀시키려 했다.
1958년의 성공적이며 무혈(無血)로 끝난 레바논 개입은 특무 편성 해병대 원정군을 전통적 예에 따라 “예비” 병력이라고 칭한 마지막 예를 장식했다.
1950년대 후반까지, 해병대 공지 특수대(the Marine Air-Ground Task Force)와 이 신조어가 자리를 잡아갔다. 1962년도의 한 지시사항에서 규정한 대로, 해병대 공지 특수대(보통, 맥터프 Magtaff 이라고 읽혀지는, MAGTF로 더 알려진)는 한 차례 그리 개의할 필요 없는 예외를 제하고는 규모별로 삼분되었다. 최소형인 해병대 원정대(MEU), 그 다음 규모인 해병대 원정여단(MEB), 그리고 최대 규모인 해병대 원정군(MEF)으로.
구조상 MAGTF는 총 4개 구성요소를 지녔다 - 지휘부, 야전 전대, 항공 전대, 전투 수송지원대. 보통 1개 MEU는 지상요소로 1개 상륙대대를 가졌고, 항공요소로는 강화된 헬리콥터 비행중대 1중대를, 그리고 이에 맞춰 편성된 수송지원대를 가지면서 지휘는 대령 1명이 맡게 되어 있었다.
1개 해병대 원정여단은 통상 1개 상륙연대, ‘복합(고정익기와 헬기의)’ 해병 항공단과 여단 수송지원대 1개 부대, 그리고 준장 또는 소장급의 지휘관으로 구성되었다. 각 원정여단들은 저마다 약간씩 다른 구조를 갖고 있었으며, 구모에 있어서도 작게는 7천에서 크게는 만 칠천 이상까지 제각각이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해병대원이었지만 해군병력도 꽤 되었는데 의료지원반, 군목, 공병대 등의 병력이 해군에서 지원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개 해병대 원정군은 대개 1개 사단병력, 1개 항공대, 군 수송지원대, 그리고 소장 또는 중장급 지휘관으로 구성되었다.
버몬트 출신으로 슈프의 참모장을 역임하며 MAGTF개념을 규정하는 지시에 서명했던 월레스 그린(Wallace M. Green, Jr.)이 1964년 1월 1일부로 슈프를 승계해 해병 사령관이 되었다. 1965년 4월에 행해진 도미니카 개입에서는 제 6 해병대 원정부대(the Sixth Marine Expeditionary Unit)의 투입과 제 4 해병대 원정여단의 증강이 있었다.
미국의 지상군 병력이 처음으로 베트남에 투입되었던 것은 1965년 3월 8일, 제 9 해병대 원정여단이 다낭(Da Nang)에 상륙한 것이었다. 이에 뒤이어 5월 7일에는 그보다 55마일 정도 남쪽의 츄라이(Chu Lai)에 제 3 해병대 원정여단이 상륙했다. 이 두 부대는 제 3 해병대 원정군에 흡수되었는데, 이는 남베트남인들에게 프랑스의 원정군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을 상기케 하는 점이 있었으므로 곧 제 3 해병대 수륙양면군(Third Marine Amphibious Force)으로 개칭되었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제 3 해병대 수륙양면군은 2개 해병사단, 2개 해병 전투연대, 대규모의 제 1 해병대 항공대, 그리고 역시 대규모의 군 병참지휘부를 보유하게 되었으나, 각 대대나 비행중대 등이 한번에 하나씩 베트남으로 투입되었으므로 이같은 규모가 실제 갖춰지기에는 수 년이 소요되었다.
제 3 해병대 수륙양면군의 병력은 1968년 85,755에 달한 것이 최고였는데, 이는 2차 대전시 유황도와 오키나와에 상륙했던 미 해병대의 수를 상회하는 것이었다. 베트남에서의 모호한 전투 수행은 전역과 전투들로 확연히 구분되지 못했으며, 북베트남군과는 싸우는 한편 베트콩과는 평화를 모색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그리고 해병대와 관련해 기억될 만한 장소들로는 다낭, 츄라이, 후에(Hue), 푸바이(Phu Bai), 비무장지대(DMZ), 동하(Dong Ha), 콘티엔(Con Thien), 케산(Khe Sanh) 등이 있었다.
1968년에 그린을 승계한 해병 사령관은 플로리다 출신으로 탁월한 행정력으로 알려진 레너드 채프먼(Leonard F. Chapman)이었다. 그는 해병대를 베트남으로부터 체계적으로 철수토록 한다는 유쾌하지 못한 임무를 수행하다가 사임했다.
그의 후임자는 로버트 쿠쉬맨(Robert E. Cushman)이었는데, 그는 2차대전 중 대대장으로 복무하며 해군 십자 무공훈장을 수여받았었고 베트남에서는 제 3 수륙양면군의 지휘를 맡았었던 인물로, 1972년 1월에 해병사령관에 취임했다. 그가 취임하던 때에 해병대는 대부분 베트남에서 철수를 마친 상태였고, 그는 해병대가 참여한 것으로는 사상 가장 긴 전쟁이었고 또 어떤 점에서 가장 참담한 전쟁이었던 베트남전의 경험이 해병대에 미친 악영향을 제거하고 해병대를 재건한다는, 힘겨운 임무를 떠맡아야 했다. 1972년까지 해병대의 전사자는 12,926에 이르렀으며, 부상자는 88,755에 달했다(그중 반 정도는 입원 가료를 요하는중상자였다). 규모면에서 해병대는 1965년의 190,213에서 1969년에는 최고인 314,917에 달했다가, 점차 감축되어 200,000선까지 이르렀다.
이 전쟁에서는 2차대전이나 인천 상륙작전에서와 같은 해변 상륙강습은 없었다; 그러나 다수의 대대급 특수 상륙부대들이 있어서, 남베트남 연안을 따라 여러 장소에서 강습 또는 전력보강을 위해 상륙작전을 실시했다. 수륙양면전 전술은 또한 1975년 4월 캄보디아의 프놈펜(Phnom Penh), 그리고 사이공(Saigon)으로부터의 철수시에도 사용되었다 - 전자는 제 31 해병 상륙 부대에 의하여, 그리고 후자는 제 9 해병대 수륙양면 여단에 의해 수행되었다. 당시에 다시금 전술 공군력의 활용에 대하여 관할권과 교리 문제로 논란이 벌어졌었는데, 이번에는 제 7 공군(the Seventh Air Force)과 마찰이 빚어졌다. 결정은 공군측에 유리하게 내려졌다, 즉 제7공군의 사령관이 항공력 사용에 관한한 유일한 관할권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해병대 공지전단의 강화
쿠쉬맨은 그의 4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임기 만료 6개월 전인 1975년 7월에 사임했다. 신임 해병 사령관은 예모바른 미시시피 출신으로 구암 전투에서 무공훈장을 받았었던 루이스 윌슨(Louis H. Wilson)이었다. 능수능란한 정치술을 발휘, 그는 해병대가 합참에서 온전한 발언권을 가질 수 있도록 했으며 또한 캘리포니아의 사막 지대인 트웬티나인 팜스(Twentyn-ine Palms)에 해병대 공지전 훈련소(the Marine Air Ground Combat Training Cen-ter)를 설립함으로써 해병대 훈련에 보다 현실성을 부여하는 한편 지상군 요소와 항공요소간에 긴밀성이 증가되게끔 했다. 이 훈련의 핵심은 연합전력 훈련(the Combined Arms Exercises: CAX)으로, 그것은 매년 10개 대대씩, 대대급 지상전력이 항공전력의 지원하에 트웬티나인 팜스를 횡단토록 하는 것이었다.
1979년 7월에 윌슨을 승계한 사람은 그의 지기(知己)였던 로버트 배로우(Robert H. Barrow)였는데, 그는 루이지애나 출신으로 카터 대통령에게 선임되어 그의 18개월간의 전투적 직무에 들어갔다. 그는 2차 대전(대위로), 한국전쟁(중대장으로), 베트남전(연대장으로) 등에서 무명(武名)을 높였으며, 장군이 되어서는 인사관리와 훈련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배로우는 평시로서는 높은 준비태세를 갖춘 해병대의 사령관으로 부임했으나 곧 189,000에서 179,000에로의 인력삭감에 직면해야 했다. 배로우는 인재육성 분야에서의 그의 장기를 십분 발휘하면서 이 삭감에 대처해 나갔다.
1979년 11월, 이란의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이 침탈되고 해병 안전요원 9명을 포함한 미국민 60명이 인질로 억류되었다. 당황한 정부는 이란과 같은 문제국가의 행동에 대응하기 위해 신속배치군을 구성하는 문제를 협의하기 시작했다.
미 중앙사령부(the U.S. Central Com-mand)의 전신이 되는 신속배치군 합동 특수대(the Rapid Deployment Joint Task Force: RDJTF)가 플로리다의 맥딜(MacDill)공군기지에 본부를 두고 성립되었으나, 사막 1호 작전(Operation Desert one) - 1980년 4월에 실시된 헛된 인질구출 작전, 당시 해병대는 수송 헬기 승무원들을 제공했다 - 실시 때 이는 허울만 남았을 뿐이었다.
RDJTF는 “말라케시(Marrakech)에서 방글라데시(Bangladesh)까지” 중동 지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병력은 이들 잠재적 위기지역에 공수될 수 있었으나, 물자와 장비는 선편을 이용해야 했다. 최초의 RDJTF 사령관은 정열적인 아일랜드계로, 보스턴 출신인 폴 켈리(Paul X. Kelly) 중장이었는데, 그는 베트남에서 대대장과 연대장으로 복무했었다. 중동에 배치되기로 특화된 해병 병력의 실제 배치를 지원하고, 또 이에 걸맞는 선적력이 미비한 점을 타개하기 위해, 해양전 사전준비선(Maritime Prepositioned Ships: MPS)이라고 명명된 계획이 수립되었는데, 이것은 상선을 대여하여 소함대를 구성한 것으로서 상륙병력 1개 연대의 30일치 소용 물자와 장비를 선적하고 전세계의 전략 요충지에 미리 배치되어 있게끔 되어 있었다. 이 선박들은 항만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상륙용 잔교(棧橋)나 강물 위에서도 하역을 실시할 수 있었으므로. 그러나 거기에는 주위환경이 적대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단서가 붙었으며 결국 강습능력을 갖춘 상륙정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었다.
배로우의 임기 중 마지막 3개월 동안, 해병대는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관후한 예산배정책에 따라 혜택을, 특히 신무기 구입 부문에서, 누릴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 혜택은 차기 해병사령관 켈리 - 그는 RDJTF 사령관을 역임한 후 해병대 부사령관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 의 임기에도 계속 이어졌다.
레바논, 그레나다, 파나마
그러나 해병대사에 있어 비극적인 한 장(章)이 켈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1982년 8월, 그가 해병사령관이 되기 11개월 전, 제 32 해병 수륙양면 부대는 다국적 평화유지군의 일부로서 프랑스, 이태리군과 함께 레바논의 베이루트(Beirut)에 상륙했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게릴라들의 철수를 감시한 뒤, 잠시 철수했다가 동년 9월, 바시르 게마옐(Bashir Gemayel) 대통령이 암살된 후 다시 레바논에 진주했다.
해병대의 레바논 주둔은 계속되었으니, 한 수륙양면 부대가 대략 4개월만에 교체되곤 했으며, 미 해병대는 베이루트 국제공항에서 방어진을 쳐 놓고 있었다. 양 교전측의 화력 교환 틈바구니에서 가끔 미 해병대측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내전이 갈수록 격화됨에 따라, 미군, 프랑스군, 이태리군에 대한 직접적 공격의 빈도도 점점 늘어갔다. 미국의 정책은 레바논 군을 공개지원한다는 방침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으나, 해병대는 매우 엄격한 제약을 받으며 준 전투적 행동에만 참여하도록 행동을 제한받고 있었다.
10월 23일, 일요일의 이른 아침에, 트럭 한 대가 공항의 해병대 검문소를 돌파하여 BLT-1/8, 즉 제 24 MAU의 지상군 요소 사령부가 입주한 건물로 쇄도했다. 약 6톤에 달한 것으로 추정되는 폭탄이 폭발했으며, 241명의 미군(그중 220명은 해병대원이었다)이 사망하고 70명이 부상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 공격이 계획되었다.
이 비극이 있은지 있기 이틀 전, 10월 22일에, 베이루트의 제 24 MAU와 교대하려던 제 22 MAU가 그레나다로 목적지를 전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레나다의 좌익 계열 수상 모리스 비숍(Maurice Bishop)이 10월 19일에 암살되고 뒤이어 허드슨 오스틴(Hudson Austin) 장군에 의한 혁명 군사위원회가 소집되자 군사개입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1983년 10월 25일, 육군 유격대와 제 82 공수사단의 대부분 병력이 포인트 샐린즈(Point Salines) 비행장을 점령하기 위해 남서부 지역으로 공수되었고, 한편 헬기를 이용해 공수된 해군의 BLT-2/8은 북동쪽 외곽의 펄즈(Pearls) 비행장을 별 어려움 없이 확보했다. 뒤이어 전개된, 센트 조지(St. George’s) 산의 저택에서 영국의 총독을 구출하려는 육군의 작전에서는 지원에 나섰던 해군이 코브라 헬기 두 대의 손실을 입었다. 이틀만에 이 작전은 실질적으로 종료되었다. 11월 1일에 해병대는 작전 지원을 위해 인근 카리아쿠(Carriacou) 섬에 상륙했으나 적 병력은 그곳에 전무했다. 미군의 총 사상자는 19명 전사에 115명 부상이었고, 그중 전사자 3명, 부상자 15명이 해병대원이었다.
제 22 MAU는 카리아쿠에 상륙했다가 다시 출정하여 지중해로의 원 항로를 다시 시작하였다. 11월 중순에는 이들이 곤란한 지경까지 몰린 제 24 MAU를 대체하게 되었다. 그리고 레바논에 남아 간헐적으로 전투를 벌이다가 1984년 2월에는 철수하였다. 내란으로 피폐된 레바논에 해병대가 18개월 동안 주둔하며 낸 총 사상자는 238명 전사, 151명 부상이었다.
비록 그가 작전 지휘선에 있지는 않았지만, 베이루트의 참사는 켈리 사령관에게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는 1987년 7월에 당시 대서양 함대 해병대의 사령관이었고 그 전에는 제 2 해병사단의 사단장이었던 알프레드 그레이(Alfred M. Gray)와 교체되었다. 그레이는 뉴저지 출신으로 한때 해병 하사관이었던 인물로 해병사령관이 되자 공개성 원칙을 강력히 견지, 해병 사령부의 병폐를 구석구석까지 빗자루로 청소해 버렸다(또는 야구방망이로 두들겨 몰아내 버렸다). 그의 임기 중 첫 2년 동안 그는 레이건 행정부의 관후한 예산의 혜택을 계속 누릴 수가 있었는데 그의 개혁은 해병대원이란 모름지기 “전사(戰士)”여야 한다는 기본적 개념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레이의 개혁조치 중 하나는 1988년에 MAGTF를 개혁해 “원정군”이라기보다는 “수륙양면군”으로 존재토록 하여, 해병대의 전략능력을 보다 정확히 반영토록 한 것이었다. 그는 또한 콴티코의 해병대 발전 교육 사령부(MCDEC)를 해병대 전투 발전 사령부(MCCDC)로 통합하면서 이를 각개의 그러나 기능적으로 연관되어진 5개의 센터로 구성되게끔 했다: 해병대 공지 특수전투(Marine Air-Ground Task Force Warfighting) 센터; 교육훈련(Training and Education) 센터; 정보(Intelligence) 센터; 전쟁연습과 평가(Wargaming and Assessment) 센터; 그리고 정보기술(Infgormation Technology) 센터 등의. 그 외의 교육기관들은 하나로 통합되어 해병 대학(the Marine Corps University)을 구성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신생 조직은 해병대 연구. 개발. 획득 사령부(the Marine Corps Research, Development, and Acquisition Command: MCRDAC)가 있었다.
전국적으로 새로 유행하던 용어는 “저강도 분쟁(LIC)”으로서, 이는 고도로 선별적이고 제한적인 힘의 사용을 나타내는 개념이었다. 1989년 12월에 파나마의 독재자 마뉴엘 노리에가를 권좌에서 축출한 일은 이 신 전략의 시험무대가 되었다. 노리에가는 1988년 1월에 미국 연방법원에서 마약관련 혐의로 기소되어 있던 터였다. 명목상의 대통령이던 아르투로 델발(Arturo Delvalle)의 반 노리에가 책동은 격렬한 치안부재 상태를 낳았다. 이 작전에서 해병대가 담당한 역할은 사소한 것이었다.
전력이 보강된 1개 해병대 보안중대가 3월에 파나마로 파병되었다. 그리고 이에 이어 4월에는 파나마 해병대군(Marine Force, Panama)로 설계된 임시 해병대 공지 특수대도 파병되었는데, 이는 원래 강화된 소총중대 1개중대와 지원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항공전력은 갖추지 않은 것이었다. 해병대는 구 파나마 운하 지역의 서측 측방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임무는 기본적으로 미군의 해군과 육군 시설물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적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파나마 해병대군은 파나마 합동 특수대(JTF Panama’s)에 흡수되었고, 파나마 합동 특수대의 “적”은 총 1만 3천 정도의 병력이되 그중 3천 정도가 실제 전투력이 있는 병력으로 추정되던, 노리에가의 준 군사조직 파나마 방위군(PDF)이었다. PDF는 파나마에 거주 또는 체류중인 미국국민들 뿐 아니라 해병대를 포함한 미군에게도 위협적이었다.
해병 소총중대는 파나마 주둔 전 미군의 급유원인 아라얀(Arraijan) 석유탱크 집합지에 도착하자마자 방어태세 구축에 들어갔다. 그들의 방어선을 전설적인 야간 습격으로 돌파하려는 시도도거의 즉각적으로 개시되었다. 1988년 4월부터 9월 사이에 14회의 개별적 충돌이 있었고, 해병대원 한 명이 사망했다. 11월에는 해병대에게 고정 방어벽을 철폐하고 정찰활동을 제한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그리고 수개월 동안 상황은 상대적으로 잠잠한 채 지속되었는데, 1989년 5월, 총선거에서 자신의 당이 참패하고 말자 노리에가는 그 결과를 무효화해 버렸다. 이 행동은 미국으로 하여금 보다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파나마 해병대군은 경장갑차 LAV-25를 갖춘 경무장 보병중대 1개 중대로 보강되었으며, 샌드 플리즈(Sand Fleas)라 불린 일련의 훈련이 뒤따랐다.
1989년 10월 3일, 미국의 후원을 받은 반 노리에가 쿠데타가 발생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긴장이 고조되었고, 12월 16일 밤에는 비번이던 미해병대 중위 하나가 노리에가의 자객에 의해 피격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다 한 해군장교와 그의 부인이 억류되는 사건은 조지 부시 대통령으로 하여금 노리에가를 축출하기 위한 임시 작전계획 - 정당사유 작전 - 을 현실화하도록 했다. 12월 20일 자정 직후부터 해병대는 그 목표물들을 향해 이동하였다 - 즉 석유탱크 집합지, 하워드(Howard) 공군기지(보강을 위해), 그리고 운하 지역의 유일한 고정교였던 아메리카 교(橋) 등으로. 1개 경무장 보병대대와 막 도착한 1개 해병 소총중대로 보강된 파나마 해병대군(파나마의 총 미군 27,000 중 650의 규모를 갖게 된)은 보다 대규모의 육군 군사작전에서 그 맡은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냈다.
1990년대 초 해병대의 전투 공격기는 F/A-18 호넷(Hornet)이었다.
공격기는 영국에서 설계된 AV-8B 해리어(Harrier) 수직이착륙기와 A-6E 인트루더(Intruder)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외의 고정익기로는 공중급유기와 수송기로 사용되었던 KC-130 허큘레스(Hercules)와 전파방해기 EA-6B 프로울러(Prowler)가 있었다. 해병대의 중급(重級) 헬리콥터로는 CH-53D 시 스탤론(Sea Stallion)과 CH-53E 슈퍼 스탤론(Super Stallion)이 있었으며, 중급(中級) 헬기에는 CH-46 시 나이트(Sea Knight)가, 그리고 경급 헬기로는 AH-1W 슈퍼 코브라(Super Cobra)와 UH-1N이 있었다.
페르시아 만
1991년 8월 2일에 있은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사막의 방패작전이 이루어지게 하며 대규모의 미군이 페르시아만으로 이동하게 했다. 이때 해병대의 파견 병력은 원정 여단급이었다 - 제 7 해병 원정여단이 캘리포니아로부터, 그리고 제 1 MEB이 하와이로부터 공수되었다. 여기에다 해로로 제 13 MEU, 제 4 MEB, 제 5 MEB이 도착하여 페르시아만에서 수륙양면전 특수대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리고 제 2 해병대 원정군의 대부분 병력이 중동으로 파병되고, 그 일부는 제 1 MEF의 보강에 동원되었다.
제 1, 제 7 MEB는 각 개별 자체 무기와 장비 외에 따로 운반했던 것이 거의 없었다. 전략적 요충지에 사전 준비되어 있던 상선들의 소함대, 즉 해양전 사전준비대가 MEB의 전투장비와 30일분의 보급품을 운송하였다. 당시 3개의 해양전 사전준비대(MPS)가 대서양, 인도양, 서태평양에 있었으며 총 13척의 현대식 선박에 민간인 선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를 통하여 사우디 아라미아의 요새 설비는 최고수준에 이를 수 있었다. MPS선들은 전차, 곡사포, 수륙양용차, 경장갑차, 그리고 그외의 무기, 물자, 장비들을 8월 중순까지 제 7, 제 1 MEB에게 수송해 주었다. 여기에 완전히 장비가 갖춰진 제 4 MEB이 노스 캐롤라이나로부터 도착했다.
9월 2일, 제 7, 제 1 MEB의 요소들을 결합해 구성된 제 1 해병대 원정군이 미 중앙사령부의 작전지역하에 있는 모든 해병대 병력에 대한 작전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수 일내로 제 1 해병대 원정군의 3대 하급사령부들이 구성되었다: 제 1 해병사단, 제 3 해병대 항공대, 그리고 제 1 군 행정지원단의. 한편, 제 13 MEU가 필리핀으로부터 오만 만(the Gulf of Oman)에 도착하여 곧 제 4 MEB에 통합되었다.
이 병력들은 해상에서 대기하며 유사시에 상륙 병력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11월의 첫 주가 끝날 때까지, 사막의 방패작전 제 1단계는 완료되었다. 당시 해병대 현역병력의 1/4에 근접하는 규모인 4만 2천의 해병대가 파병되었다. 11월 8일, 부시 대통령은 페르시아만의 미군이 추가로 200,000명 더 증강될 것임을 밝혔다.
해병대는 그 예비역 병력을 동원함이 없이 제 1단계를 완료했었다.
11월 13일부로 제 2단계가 시작되자, 선별된 해병대 예비부대들에 대한 비자발적 동원이 개시되었다. 이렇게 미국 각지로부터 병력이 동원되어 제 4 해병대 예비사단과 제 4 해병대 항공대가 구성되었다. 제 5 MEB은 12월 1일에, 명년 1월 15일에 페르시아만에 도착할 계획으로, 산디에고를 출발했다. 동해안에 기지를 갖고 있던 제 2 MEF의 대부분은 - 제 2 해병사단을 포함해 3만의 해병과 선원으로 이루어진 - 12월 9일부로 항공편을 통해 페르시아만으로의 이동을 개시했다.
걸프전의 병력배치 단계를 이루었던 사막의 방패작전은 1991년 1월 15일부로 끝나고, 공격단계를 이루는 사막의 폭풍작전이 그 다음날로 개시되었다.
당시의 제 1 MEF는 2개 사단으로 구성되고, 상당히 대규모의 항공대를 가지며, 견실한 수송지원부대를 가진다는 점 등에서 구조상 베트남전시의 제 3 해병대 수륙양면군과 흡사했다. 여기에다 2개의 MEB, 그리고 특수작전 능력을 갖춘 MEU가 해상에서 대기 중이어서, 어떤 상륙작전이라도 수행해 낼 수 있는 강력한 상륙병력을 마련해 주고 있었다. 공중전은 1991년 1월 16일에 시작되었다. 당시 전장에서 미군 고정익기의 1/4을 차지하고 있던 제 3 해병대 항공대는 여기서 전반적 역할을 담당했다. 애초 목표설정은 전략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지상전 개시일이 다가옴에 따라서 공중공격의 무게중심은 이라크군의 전방 군사지역들에 대한 확대 공격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또한 공중전은 다국적군의 지상군 병력이 그 공격위치로 들어갈 수 있도록 엄호하는 역할도 해냈다. 제 1 MEF의 지상군 전력에게는 이라크군이 난공불락을 장담하는 쿠웨이트 국경선을 돌파하여 쿠웨이트 시로 진격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제 1 해병사단의 우측방에서는, 즉 북부와 페르시아만을 잇는 중앙로 지역에서는, 사우디 아라비아, 쿠웨이트, 오만, 통일 아랍 에미리트의 기계화 연대병력을 포함한 동부 합동군사령부(the Joint Forces Command East)가 있었다. 제 1해병사단의 좌측방에는 새로 도착한 제 2 해병사단이 있었고, 그들의 좌측에는 이집트군과 시리아군을 포함한 북부 합동군사령부가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멀리 서쪽에는 미 육군 제 7 기갑군단(the U.S. Army heavy Seventh Corps)가, 그 좌측에는 미 제 18 항공대(U.S. Eighteenth Airbone Corps)가 있었다. 제 4, 제 5 MEB과 제 13 MEU에 의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상륙연습이 실시되었다.
지상전은 2월 24일을 기해 시작되었다. 0100시, [위스콘신(Wisconsin)]호와 [미주리(Missouri)]호의 16인치짜리 함포들이 상륙강습의 시작을 알리려는 듯 쿠웨이트 해안을 포격하기 시작했다. 3시간이 지나고 다국적군은 서로 200km이상을 격한 두 세력으로 나뉘어 진격을 개시하였다. 0400시에는 제 1 해병사단이 상륙하여 난공불락인 듯 여겨졌던 두 겹의 방벽을 의외로 수월하게 돌파해 나갔다. 제 2 해병사단은 0530시에 그 출발선을 횡단, 역시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이라크 방어선을 돌파했다. 2월 28일에 적대행위가 중단되었을 때, 제 1 MEF와 그외 해상에서 대기 중이던 해병대 병력은 모두 92,990에 달해(총 540,000의 미군 병력 중에서), 사막의 폭풍작전을 사상 최대의 해병대 작전으로 만들었다. 해병대의 주장으로는 1,040대의 적 전차들, 608대의 장갑차들, 그리고 432대의 대포가 파괴 또는 포획되었으며, 적어도 2만의 전쟁포로가 생포되었다.
또한 이 전쟁에서는 쿠웨이트 해안을 따라 이라크의 6개 사단, 5만의 병력이 주둔해 있는 상황에서 성공적으로 상륙연습을 실시함으로써, 뒤이은 공전(空前)의 상륙강습을 수월케 하기도 하였다. 걸프전의 사후 처리과정의 하나로, 남부 터키와 북부 이라크 지역에서 쿠르드족을 구출하기 위해 벌어진 작전에 미군의 규모있는 병력으로 처음 참여한 것은 지중해에서 발진한 제 24 MEU였다. 이와 동시에 해병대 측에서 지휘권을 맡은 합동 특수대가 태풍피해를 입은 방글라데시에서 구조활동을 벌였다.
탈 냉 전 기
그레이 장군은 1991년 7월 1일에 사임했다. 그의 후임자로 제 30대 해병사령관이 된 사람은 조오지아 출신의 칼 문디(Carl E. Mundy, Jr.)로, 그는 오우번 대학을 졸업한 후 1957년에 해병장교로 임관되었었다. 베트남전에서 전공(戰功)을 세운 그는 대서양 함대 해병대와 제 2 해병대 원정군의 사령관을 역임하였다.
문디가 맡게 된 해병대는 걸프전 이전 수준으로 대략 복귀하고 상당한 예산삭감을 겪은 해병대였다. 해병대의 현역병력 추정으로 가장 양호한 것을 보면 1991년의 193,735에서 1995년에는 171,000까지로 감축된 것으로 보인다. 비록 동구와 소련에서의 사태가 한때 악몽처럼 떠돌던 초강대국간의 전면전 발발 가능성을 완하했다고는 하나, 아직 전 세계에서 여러 가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즉 위협받은 미 대사관의 철수,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인도적 임무수행, 그리고 걸프전과 같은 국지전에 이르는 여러 원정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미국이 해병대를 해외로 파병해야 할 필요는 계속 존재한다■
출처 : 항상 충실한 해병들의 카페, 365 이승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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