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와 포항시

`영원한 친구` 포항시와 해병대(2) 포항과 해병대, 그 역사의 시작

머린코341(mc341) 2016. 6. 30. 19:30

美 해병대 주둔했던 기지, 한국이 물려받아 `혈맹의 맥` 이어


`영원한 친구` 포항시와 해병대(2) 포항과 해병대, 그 역사의 시작


▲ 지난 2014년 1월23일 해병대 제1사단이 23일부터 이틀간 포항시 남구 오천읍과 장기면 일대에서 K-9자주포, K-1전차, 105mm견 인포 등을 동원한 야외기동훈련을 실시한다. 23일 오전 한국형돌격장갑차(KAAV)와 K-1전차가 작전지역으로 출동하고 있다. /경북매일 DB  


포항, 북한 포함 주변국 억제전략 사용 
신속한 업무대응 수행 가능한 곳 평가
육군 포함 1개사단이 한 장소 집결 `국내 유일` 

제1사단·교육훈련단·군수지원단으로 구성
포항제철소 등 국가 중요시설 방호도 책임져


□ 해병대와 포항의 인연


 대한민국 해병대의 역사는 1948년 10월 여수·순천사건의 교훈을 통해 정부가 상륙작전을 담당할 부대의 필요성을 검토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해군참모총장이었던 손원일 제독의 주도로 1949년 4월 15일 경남 창원군 진해읍에 위치한 덕산비행장에서 신현준 초대사령관 휘하 장교 26명, 부사관 54명 등 380명의 전력으로 창설한 것이 해병대의 시초이다.


같은해 8월 1일 해군에서 장교와 부사관을 추가로 지원받고 해군 14기로 입대한 병사 440명을 해병대 2기로 특별모집해 2개 대대규모로 증설했는데 이들의 모습은 광복절 4주년인 8월 15일 기념식 사열에서 최초로 확인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9월15일 맥아더 사령관의 지휘 하에 시작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해병대는 제주도에서 모집된 해병대 3·4기 위주의 병력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한 후 지속적인 항공지원을 위해 1950년 12월 미 해병대 제1전투 비행단 소속 제12, 제33비행전대가 포항비행장에 자리를 잡았고, 1년여가 지난 1952년 8월 한국 해병대가 포항비행장 방호를 위해 1개 중대를 지원한 것이 포항과 해병대의 사실상 첫 만남이었다.


미 해병 항공부대가 주둔한 포항비행장을 방호하던 경비중대는 1952년 10월 1일 포항경비부대로 개편됐고 한국전쟁이 끝난 1956년 7월 1일부터는 포항기지로 부대규모를 확대해 창설됐다.


포항기지는 미해병대 제1전투 비행단의 철수에 따라 포항비행장(K-3)을 인수하고 주둔지 경계 및 교육훈련시설을 유지하면서 예비역 교육대를 증편해 예비역 해병 입영근무 소집훈련 임무를 실시했으며 1958년 4월 15일 해병대 포항기지로 개편됐다.


해병대 제1사단은 제1전투단의 역사와 함께 시작됐다. 한국전쟁 말기 사천강지구 전투를 수행 중이던 해병대 제1전투단은 1953년 7월 27일 남북 휴전협정과 동시에 수도권 방어 임무를 위해 경기도 파주군 금촌면에 전투단 본부를 설치했다.


제1전투단은 미해병대 제1사단이 본국으로 철수한 후에는 작전지역의 작전권을 환수했다. 이 전력을 바탕으로 해병대는 1955년 1월 15일 상륙작전부대인 해병대 제1사단을 창설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중 수도권 방어의 중요성을 인식한 국군이 1959년 2월 26일 제1임시여단을 새롭게 편성, 김포에 주둔시키면서 제1사단은 포항으로 이동해 상륙작전 임무를 본격적으로 수행하게 됐다.


□ 해병대 포항 주둔의 필요성


6·25전쟁 당시 해병대사령부 참모부장 임무를 수행하던 공정식(해병대 제6대 사령관) 장군은 해병대가 포항에 주둔하게 된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포항비행장에서 미 해병 제3비행사단이 철수함에 따라 부대재배치 조정이 필요했다. 당시 해병대사령부 수석고문이던 에드워드 포니(Edward Forney) 대령은 활주로 방어 및 전략기동부대로서 한국 해병대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그와 함께 이승만 당시 대통령을 직접 만나 건의한 끝에 한국해병대가 포항 상륙작전기지로 이전하게 됐다.”


공 장군은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당시 포항비행장 활주로 주변지역은 청포도 밭이었고 미 5공군과 미 8군이 이 자리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경쟁했다고 언급했다.


결국 이 자리는 `미 해병대가 주둔한 기지를 한국 해병대가 물려받아 혈맹(血盟)의 맥을 이을 것`이라는 포니 대령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한국 해병대에게 돌아갔다.


이러한 결정은 당시 해병대에 대한 군사 전략적 사고가 반영된 것으로, 북한 및 주변국에 대해 억제전략으로 사용할 수 있는 지역으로 포항을 선정했다고 볼 수 있다. 

 

국방부가 2년 단위로 발간해 배포하는 `국방백서` 2012년판에 의하면 포항은 지역적으로 한반도 동서해안 및 주변국에 가장 신속히 대응이 가능한 적격의 위치로서 부대의 신속대응임무 수행을 가능케 하는 전략적 가치를 지닌 지역이다.


현재도 국군 전력 중 육군을 포함해 1개 사단의 구성부대가 한 장소에 모두 집결돼 있어 즉각 출동이 가능한 부대는 포항에 주둔한 해병대 제1사단이 유일하다.


한편, 해군본부에서는 1964년 4월15일 포항지역에 근무하는 해군·해병대 장병에 대한 의료지원을 위해 포항 해군병원을 만들어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포항병원은 포항에 주둔한 모든 군부대 의료지원를 담당하고 있으며 2차 진료위주의 병원이지만 타지역에 비해 많은 분야에 대한 1차 진료를 할 수 있도록 돼 있어 장병들이 최상의 의료서비스를 제공받고 있다.


□ `포항특정경비지역` 해병대가 지킨다


 포항시는 포항제철소를 필두로 하는 국내 철강산업의 선두주자로 국가발전을 이끌어왔다.


비록 최근들어 글로벌 금융위기와 철강업계의 전세계적인 불황 등 악재를 극복하지 못하며 침체기를 겪고 있지만 지난 40여년간 지역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해병대는 산업발전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포항제철소 등 포항지역의 국가 중요시설을 방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포항을 `특정경비지역`으로 분류하고 합동사령부를 만들어 포항시와 역사를 함께 했던 것.


특정경비지역이란 일반적인 지역과는 다르게 사태 발생시 군 주도의 조치를 함으로써 조기에 지역을 안정화 시키기 위한 제도이다.


1969년 1월 포항특정경비지역사령부라는 명칭으로 탄생한 합동사령부는 해병대 제1사단장이 사령관을 겸직하며 포항지역 일원의 모든 해병대와 해군의 부대를 지휘하고 있다.


이 중 주요전력을 차지하고 있는 해병대의 소속 부대는 제1사단, 교육훈련단, 군수지원단 등이 있다.


해병대 제1사단은 국가의 전략기동부대로서 역할인 상륙작전을 위해 포항지역에서 훈련하는 것과 포항특정 경비지역 사령부로서 책임지역에 대한 방호를 하는 역할을 한다. 교육훈련단은 해병대 장교, 부사관, 병사에 대한 양성 및 보수교육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해병대가 포항에 주둔한 후 책임지역 내에서 북한 간첩의 침투는 약 40여회에 걸쳐 80여명이 시도했고, 이는 1980년대 이후들어 크게 감소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해병대는 간첩침투로부터 포항지역을 방호하기 위해 평상시에는 1개 연대 규모가 해상을 보호하고 있다. 또한 북한이 해상침투 방법을 포기하기 전까지는 지속적으로 대침투작전 및 대테러작전을 실시할 방침이다.


포항 해병대 창설 역사 


1950년 12월 미 해병대 제1전투단 비행단 
            제12·33비행전대 포항비행단 주둔


1952년 8월 한국 해병대, 포항비행장 1개중대 지원 
           10월 미 해병대 제1전투단 비행단 


1956년 7월 포항기지로 부대규모 확대 


1958년 8월 해병대 포항기지로 개선 


[경북매일] 2016.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