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입대로 맺은 인연, 퇴역 후 20년간 `제2의 고향으로`
`영원한 친구` 포항시와 해병대(6) 포항정착 퇴역자
서수홍 해병대 전우회 포항시 오천분회장
20살 해병대 입대후 2년뒤 월남 파병
베트남 추라이 반도서 탐색조 선봉에
서해5도 근무 후 신병훈련소 교관 거쳐
상사로 퇴역… 지역봉사 등 앞장서 와
▲ 서수홍 회장이 군시절 모습이 담긴 앨범을 보며 옛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지난 18일 오후 포항시 남구 오천읍 문덕리의 한 사무실. 세평 남짓한 작은 컨테이너에 들어서자 남다른 풍모를 지닌 노신사가 기자를 반겼다. 해병대의 본거지인 오천읍을 터전 삼아 살아가고 있는 퇴역자 모임인 해병대전우회 포항시 오천분회 서수홍(72) 회장이었다.
서 회장은 1965년 1월 해병대에 일반병으로 입대, 같은해 10월 부사관으로 자원해 본격적인 군생활을 시작했다.
“고향 경남 진해에서 아버지가 도장방을 하며 어렵게 저희 가족을 부양하셨습니다. 당시에는 특별히 배운 것도 없어 입에 풀칠이라도 할까 싶어 20살 젊은 나이에 군에 입대하게 됐죠.”
첫 2년동안은 군인이 된 것이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했다. 삼시세끼 꼬박꼬박 챙겨먹기 힘들었던 시절에 숙식도 해결해주고 많지 않은 돈이었지만 봉급도 챙겨주는 부대에 그저 고마웠다. 군생활이 잘맞는 체질이었는지 고된 훈련과 적지 않은 작업량도 어렵지 않게 견뎌냈다.
그렇게 서 회장의 군생활은 무난하게 흘러갈 것만 같았다. 그런데 1967년, 그의 군생활에 한 획을 그은 명령이 떨어졌다. 월남 파병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미 1965년 10월 3일 첫 파병을 시작으로 해병대 월남파병부대인 청룡부대는 1년에 1기수씩 월남으로 향해 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서 회장은 3기 파병대원으로 선출됐고, 1967년 5월 9일 포항역에 집결한 대원 300여명과 함께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는 당시 심경에 대해 “왜 안두려웠겠나…. 언제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르는 상황이 눈앞에서 벌어질 것이 불보듯 뻔한데…”라며 “그렇지만 나라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국가의 지시에 따라야한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고 떠올렸다.
▲ 월남전 참전 베트남 사찰에서 전우들과.
부산항에서 베트남으로 향하는 수송선에 몸을 싣고 갑판 위에 올라서니 부둣가에 나온 수많은 해병 가족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혹시라도 가족들이 왔을까 이쪽 저쪽을 부단히 살펴봤지만 그의 이름이 쓰인 피켓을 들고 나온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사실 3개월 전에 아버지께 파병사실을 알렸는데 후에 파병순서가 뒤로 밀렸다는 사실을 미처 전하지 못했다”며 “파병소식을 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께서 부대 위병소를 찾아와 눈물만 흘리다 돌아갔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부산항 환송에 가족들이 오지 않아 차라리 덜 힘들었던 것 같다”고 생각에 잠겼다.
해병대 300여명, 육군 3천여명이 탑승한 수송선은 5박 6일의 항해 끝에 베트남 다낭항에 상륙했다.
▲ 월남전 참전 중 야자수 앞에서.
이곳에서 작은 배로 옮겨탄 서 회장과 해병대원들은 월남전 최대 접전지 중 하나인 추라이반도로 직행했다.
`대대 1중대 1소대 1분대장 하사 서수홍`
선임분대장 보직을 맡은 서 회장은 머나먼 타국에서 자랑스러운 조국 대한민국을 가슴에 묻고 수많은 전투에 참전했다. 베트콩(베트남 공산군)은 주로 땅속이나 정글에 숨어다니며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다보니 한국군은 이들을 직접 찾아다니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해병대는 항상 탐색조의 선봉에 섰고, 서 회장의 1분대는 그중에서도 가장 앞줄에 있었다.
“아군은 평지에 있는데 맞은편 높은 산에서 포격소리가 들리면 잠시 엎드려 있다가 얼마 뒤 산으로 달려가야 했어요. 적이 아직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곳에 말이죠. 만약 적이 남아있다면 백이면 백 죽는 것이 당연한 무모한 돌격이었기에 누구도 가길 원하지 않았죠. 그렇지만 우리는 해야만 했어요. 우리가 1분대인데 선봉이 상관의 명령을 어기면 전 부대의 기강이 흔들릴 게 뻔했기 때문이었죠.”
그렇게 1년 3개월여의 임무를 마치고 1969년 9월 그리운 고국으로 무사히 돌아갔다. 부대에 복귀한 뒤 열흘간의 포상휴가를 얻어 고향을 찾은 그는 가족들을 얼싸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 임관 초기 서수홍 하사.
서 회장은 “부산항을 떠날 때 살아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다시 가족들의 얼굴을 보니 절로 눈물이 났다”며 “운좋게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고맙게 생각하고 먼저 떠나간 전우들의 얼을 가슴에 품고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복귀 후 첫 근무지는 백령도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섬생활이 시작됐다. 그는 백령도, 연평도, 대청도 등 6·25 전쟁 이후 크고 작은 남북간 군사적 충돌을 직접 경험한 아픈 역사를 안고 있는 이른바 `서해 5도`를 떠돌았다. 하지만 육지청년인 그에게 섬생활은 맞지 않았다.
섬생활을 한지 얼마지나지 않은 1970년 그는 또 한 번의 월남파병을 스스로 지원했고 부대가 이를 수용하면서 포항 해병대1사단에 머무르며 재파병의 순간을 기다렸다.
▲ 한·미 합동 팀 스피릿(Team Spirit) 훈련에서 동료들과 함께.
그런데 재파병 신청인원이 넘쳐났고, 파병순서를 기다리던 중 전쟁이 베트콩의 승리로 끝나면서 재파병의 뜻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이후 해병대 신병훈련소 교관, LMG기관총 교관, 연대본부 작전하사관 등을 거친 그는 1989년 3월 20여년의 군생활을 마치고 상사로 퇴역했다.
▲ 한미연합훈련에서 수송선에 탑승하는 모습.
퇴역 후에도 `제2의 고향` 포항에 남아 해병대전우회 일원으로 여러 봉사활동을 하며 지역사회에 소금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는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군생활을 한 포항에서 퇴역 후에 살아온지도 20년이 훌쩍 넘었다”며 “앞으로 남은 세월 동안 해병대의 정신이 살아있는 포항 지역사회 발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경북매일]201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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