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찬의 軍] '포스트 김정일' 5년… 평화는 가고 공포만 남았다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1999)에서 주유소에 침입한 4인조는 돈을 갖고 도주하려다 조폭과 경찰, 동네 양아치, 폭주족까지 몰려오면서 벌어진 패싸움으로 위기에 직면한다.
이 때 노마크(이성재)는 주유기로 기름을 뿌린 후 불붙은 라이터를 들고 모두를 위협한다. 라이터가 떨어지면 주유소를 포함해 동네 전체가 날아갈 수 있다는 공포에 휩싸인 사람들은 순순히 자리에 앉고 4인조는 돈을 챙겨 유유히 현장을 떠난다.
2017년 현재 한반도도 이와 유사하다. 일촉즉발의 군사적 대치가 수십년째 이어지는 상황에서 집권 6년차를 맞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도화선에 불을 가까이 대면서 공포를 조장해 주변국들을 위협하고 있다. 국내적으로는 16일 광명성절(김정일 생일)을 앞두고 성대한 경축행사를 준비하면서 김원홍 국가안전보위상을 해임, 강등하는 등 측근들을 숙청하며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하고 있다.
지난해 3월 핵탄두 모형을 둘러보고 있는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 세계일보 자료사진
◆ 아버지 유산은 ‘공포유발자’뿐…“다른 통치수단 없어”
2011년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으로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된 김정은에게 부친인 김정일이 남긴 것은 엄혹한 현실뿐이었다. 김정일은 붕괴 위기에 처한 주체의 왕국을 수습해 아들에게 넘겼지만 김정은이 사용할 수 있는 통치수단은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1990년대 초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지면서 시작된 북한의 경제 위기는 자연재해로 곡물생산량이 최대 4분의 1까지 줄어들면서 30만~40만명이 아사한 ‘고난의 행군’으로 이어졌다.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최고지도자가 되자마자 엄청난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김정일은 이 위기를 민족주의를 내세운 선전선동과 핵개발을 유예하는 대가로 받은 경제적 지원, 해외에서의 식량원조 등으로 극복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남한의 햇볕정책과 조지 부시 미 행정부의 압박에 맞서 대화와 강경 대응을 병행하며 핵개발을 진행했다. 그 결과 2006년과 2009년 두 차례에 걸쳐 핵실험을 단행했다.
1998년에는 대포동 1호, 2006년 대포동 2호, 2009년 은하 2호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해 핵무기를 먼 거리까지 보낼 능력이 있다는 점을 과시했다. 내부적으로는 선군정치를 강조하면서 국가안전보위부, 인민군 보위사령부, 노동당 조직지도부 등 핵심 공안기관의 기능을 유지하며 수령 중심의 유일적 영도체제를 더욱 굳혔다.
김정은은 아버지로부터 핵 억제력과 공안기관을 물려받았지만 권력기반은 불안정했다. 북한 경제는 새로운 정책을 부양할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고난의 행군’을 겪은 주민들은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에 대해 어떠한 환상도 갖고 있지 않았다. 미국과 한국은 북한에 강경한 자세를 유지했고 혈맹이라는 중국과의 관계도 냉각되어 있었다.
2015년 5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수중 사출시험에 성공한 직후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환하게 웃고 있다. 노동신문
김정은은 우선 핵 억제력을 이용해 주변국들을 겁주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2012년 4월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헌법에 ‘핵보유국’을 명시하고 2013년 3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통해 ‘경제, 핵무력 병진노선’을 공식 채택했다. 핵보유국을 선제공격할 나라는 없으므로 재래식 군비경쟁을 펼칠 이유도 없으며, 국방 예산과 군 인력을 경제 건설에 투입해 경기회복을 꾀하겠다는 병진노선은 1994년 핵사찰을 허가하는 대신 경수로와 중유 등을 제공받기로 한 ‘제네바 합의’처럼 핵으로 안보를 확보하고 빵도 얻겠다는 전략이었다.
북한 권력층을 해임하거나 숙청하는 공포정치를 통해 무조건적인 복종을 이끌어내는 전략도 지속되고 있다. 2012년 7월 리영호 군 총참모장을 숙청한 김정은은 2013년 12월 고모부인 장성택을 처형함으로서 국제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2015년 4월에는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2016년 7월에는 김용진 내각부총리를 처형한데 이어 지난 1월엔 김원홍 국가안전보위상을 해임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장사정포 부대를 둘러보고 있다. 노동신문
◆ “공포에 무감각해지는 순간이 위기”
미국의 국제안보분석 전문업체인 스트랫포(STRATFOR)는 2013년 1월 발간한 보고서에서 북한이 1990년대 이래 살아남기 위해 펼쳐온 전략을 ‘사나운 척, 허약한 척, 미친 척’으로 규정했다. 핵미사일을 보유했거나 보유할 단계에 있는 것처럼 포장하는 게 ‘사나운 척’이고, 조만간 붕괴할 것이니 방치해도 될 것처럼 보이는 것은 ‘허약한 척’이며, 예측 못 할 만큼 위험한 존재로 포장하는 게 ‘미친 척’이라는 것이다.
김정은이 지난달 신년사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가 마무리단계라고 밝힌 것은 언제든 미국을 공격할 수 있다는 ‘사나운 척, 미친 척’이며, 함경도 북부지역 수해피해를 일부 공개하는 것은 ‘허약한 척’에 속하는 셈이다.
문제는 이같은 방식이 장기간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다는데 있다. 상대방을 겁주는 공포정치는 주민들과 엘리트들을 위압하고 적대 세력의 의지를 꺾는데 있어서 설득 등 다른 수단보다 빠르고 확실한 효과를 가져다준다.
2015년 10월 노동당 창건일에 등장한 KN-14 대륙간탄도미사일. 노동신문
공포정치의 가장 큰 단점은 인간의 감각 중 하나인 마비에 기인한다. 다른 감각처럼 공포감도 시간이 지나면 마비되면서 공포를 느끼지 못한다. 공포를 수단으로 계속 이용하려면 보다 강한 자극을 줄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해야 한다. 그러나 그 방법은 공포정치에 내성이 생긴 상대방에게는 실효를 거두지 못한 채 이용하려는 쪽만 광적인 심리상태에 빠지게 한다. 적대 세력들에게는 설득력을 갖춘 대의명분을 무기를 갖게 해 자신을 압박하도록 하는 결과만 초래한다.
북한 주민들과 주변국들이 김정은의 공포정치에 내성이 생기면 그 결말은 비참한 종말뿐이다. 공포정치의 한계는 북한의 국내 정치에서 치명적인 위협으로 나타날 수 있다. 당장은 공안기관의 감시와 숙청이 두려워 복종하지만 공포감이 마비되고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분노가 커지면 자신이 사용한 잔혹하고 야만적인 수단에 의해 권좌에서 축출될 위험이 있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에 걸쳐 구축된 사회감시망이 강력하다고 하지만 견고한 둑을 무너뜨리는 것은 작은 바늘구멍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측면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북한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북극성’. 노동신문
김정은 정권은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발사를 통해 주변국들을 위협하는 공포정치를 구사해왔다. 하지만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에 익숙해진 주변국들은 북한발(發) 공포서 벗어나는 시간이 짧아지고 있다. 2006년 1차 핵실험 당시에는 한 달 넘게 언론보도가 이어졌지만 지난해 5차 핵실험은 1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시들해졌다. 주식시장도 큰 충격을 받지 않았다.
북한은 더 강한 수단을 동원해 공포감을 유지하고자 무수단 중거리 탄도미사일 시험발사, 신형 로켓엔진 공개, ICBM 시험발사 언급 등 다양한 수단을 구사하고 있으나 무수단 미사일은 8차례 발사 중 한 차례만 성공하는 등 체면만 구기고 있어 공포감 유지에 한계를 드러내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받는다.
미국이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내성을 갖게 되면 선제타격을 감행하는데 있어 감수해야할 리스크도 낮아진다. 그만큼 대북 공격 가능성이 높아지는 셈이다. 스트랫포 창업자인 조지 프리드먼은 2013년 1월 발간한 북한 관련 보고서에서 “북한의 사나움과 광기에 대한 (주변국의) 두려움이 북한의 허약함으로부터 얻는 안도감을 압도할 때 이러한 전략의 한계가 올 것”이라고 분석했다. 새로 출범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에 강경한 자세를 유지할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무시할 수 없는 대목이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으로 동아시아는 ‘스트롱맨’ 시대를 맞게 됐다. 김정은은 공포를 조장해 체제안전을 도모해왔지만 트럼프 역시 상대방을 겁주고 예측불가능한 행동을 통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인물이다. 중국의 시진핑, 일본의 아베, 러시아의 푸틴 역시 강경파들이다.
이런 지도자들에게 김정은의 공포정치가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지는 미지수다. 아버지 김정일의 유산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전략을 보여줘야 할 때라 지적이 설득력을 얻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략을 잘 구사하면 체제의 영속을 꾀할 수 있지만 잘못하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집권한 지 5년이 지난 현재, 김정은의 진짜 위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세계일보] 2017.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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