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스타의 사생활 : 장군차 운전병 이야기
군대 이야기. 남자들 모인 술자리에서 결코 빠지는 법이 없는 주제일 겁니다. 보통은 누가누가 더 험한 곳에서 더 빡세게 굴렀나 하는 무용담/고생담 배틀로 흘러가기 마련인데, 그럴 때면 전방이 아닌 후방(충청 이남) 출신, 야전부대가 아닌 기행부대 출신들은 자신들이 겪은 고생을 고생이라 말하지 못하고 조용히 술잔만 홀짝이게 되지요.
크흑... 그렇습니다. 바로 제 이야기입니다.
2001년 말 국민의 정부 시절 입대하여 2004년 초 참여정부 때 전역한 저는 후방지역에 있던 모 사단 1호차 운전병, 즉 사단장 전속 운전병이었습니다.
2년 2개월 내내 1호차 생활을 한 것은 아니구요, 일병 1호봉 때부터 사단장이 퇴임할 때까지 약 6개월간. 뭐 군생활의 1/4정도 되는 기간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평범하게 수송병과로 자원입대했던 제가 어린 짬밥(?)에 사단장 운전병으로 발탁 되었던 것은 우병우 같은 아버지를 두어서도 아니고, 짬밥에 맞지 않는 수려한 운전 실력을 가지고 있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입대 전 주소가 사단장 서울 사택 근처라는 병신 같지만 왠지 설득력 있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죠.
그렇게 6개월 간 땡보 중의 땡보라는 장군차 운전병 생활을 하며 보고 들은 경험들을 간단히 회상해 보려 합니다. 이곳에 이렇게 썰을 푸는 것은 ‘장군차 운전병도 실은 엄청 빡센 보직이랍니다. 다시는 무시하지 마세욧!’ 하고 징징대기 위함이 결코 아니며, 그렇다고 ‘나 군대에서 꿀만 잔뜩 빨다 왔어요. 부럽죠 데헷’ 하고 자랑하기 위함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저, 젊음을 바쳐 조국을 수호하는 신성한 국방의 의무의 사각지대에는 저따구로 보람찬 보직도 있구나 하는 정도로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브리핑
제가 근무한 사단은 충북에 위치한 동원사단이었습니다. (현재는 국방개혁으로 동지역 향토사단에 흡수 폐지 되었더군요. 안녕) 대부분 잘 아시겠지만 동원사단이란 ‘평시에는 최소병력만 유지하고 전시에 예비군을 충원 받아야 비로소 편제가 완성되는’ 사단입니다. 정상 편제의 1/10 정도만 현역으로 채워놓은 사단이죠.
한마디로 ‘사단인 듯 사단 아닌 사단 같은 사단’ 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도 일단 있을 건 다 있습니다. 수색대 딸린 사단 직할대에 3개 보병연대, 1개 포병연대까지) 사단장 보직도 일반 사단처럼 투스타가 아닌 원스타가 맡게 됩니다. (주로 소장 진급에 실패한 준장들이 전역 직전에 마지막 선물 같은 느낌으로 받게 되는 보직입니다. 옛다 사단장 맛이라도 한번 보고 가렴. 뭐 이런 거죠)
그러나 아무리 반쪽짜리 동원사단이라 하여도 사단은 사단, 사단장은 사단장입니다. 사단 내에서 사단장의 위상은 그야말로 절대군주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지휘권을 초월한 광범위한 뻘짓과 막나가는 행위들은 투스타 사단장들 귀싸대기 후려치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반 사단장으로 취임하는 소장들의 경우 그들의 장성 커리어의 가장 중요한 지점에 있다고 할 수 있죠. 즉, 여기서부터 열심히 실적을 쌓아 앞으로 쓰리스타, 포스타까지 쭉쭉 뻗어나갈 야망으로 가득 차 있는 시기라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상부의 눈치도 많이 보게 되고 경력에 흠이 갈 만한 무리한 행동들은 되도록 자제하게 되죠. 하지만 사실상 투스타 진급이 막혔다고 볼 수 있는 동원사단장의 경우에는, 장포대(장군 포기한 대령)에게는 무서울 것이 없다는 말 많이 들어보셨죠?
장포대 뿐만 아니라 소포준(소장 포기한 준장)도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존재랍니다. 오히려 장포대보다 할 수 있는 일들이 훨씬 많지요. 명색이 장군 아니겠습니까.
제가 수행하던 사단장(이하 운전병 관습을 따라 영감으로 칭하겠습니다)의 경우, 군인으로서는 나름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일단 별은 달았으니까요. 그러나 장성들 사이에서는 그다지 성공한 편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동기 중에 가장 잘 나가던 김관진 장군 같은 경우(네, 안보실장 하던 그 아저씨 맞습니다) 일찌감치 별 세 개 달고 군단장 하고 있는 판국에, 소장 진급 다 미끄러지고 동원 사단장으로 군생활 슬슬 정리 들어가던 참이었으니까요.
그런 우리 영감에게도 소박하고 아름다운 꿈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전역 후 선거에 출마하는 것이었지요. 뭐 선거라 하면 역시 국회의원 아니겠습니까마는 우리 영감, 다른 선거에 뜻을 품게 됩니다. 기초지방자치단체장. 자신의 고향 A시의 시장이 되고 싶었던 거죠.
아무튼 제가 수행하던 6개월 내내. 아니, 제 전임 사수가 수행하던 시기부터 이미 영감의 머릿속은 출마준비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온 사단의 기운을 모아 A시를 상대로 사전 작업에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저도 영감 태우고 A시 정말 뻔질나게 드나들었는데(공무 외의 일로 타 지역으로 점프 뛴 것이니 엄연히 위수지역 이탈입니다) 뭐 이 이야기는 뒷부분에 좀 더 자세하게 풀어 보겠습니다.
다시 브리핑으로 돌아와서, 사단장이 사는 곳은 영외에 위치한 관사입니다. 흔히 A공관이라고 불리는 곳이죠. 우리 영감이 살던 A공관은 사단 사격장 바로 옆에 위치한 저택으로, 넓은 잔디 정원에 큼지막한 연못까지 딸린 전형적인 ‘부자들 사는 집’의 느낌이었습니다.
그 A공관 뒤편 닭장 옆으로 허름한 별채가 따로 떨어져 있는데 그곳이 수행병력들 숙소, 공관부속실입니다. 바로 제가 먹고 자는 공간이죠. 화장실 겸 샤워실, 부엌, 방 두 개로 이루어진 부속실은 닭장에서 풍겨오는 닭똥냄새를 제외하면 그럭저럭 지낼만한 곳이었습니다.
방 두 개 중 하나는 오롯이 전속부관(중위)이 사용하고 나머지 한 개의 방에서 관사 당번병(병장), 조리병(상병), 운전병인 저(일병) 이렇게 세 명이 함께 생활합니다.
당번병과 조리병은 본부대대 소속이니 수송중대원인 저와는 엄밀히 말해 ‘타 부대 아저씨’입니다만, 관행상 고참/후임 관계를 맺습니다. 두 평 남짓한 공간에서 셋이 부대껴 살다보니 막내라고 갈굼도 당하지만 정도 많이 들더군요.
아무튼 저는 그렇게 A공관 부속실에 거주하며 사단장 출퇴근 및 영외 출타운행, 그리고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싸이드 운행(골프, 술자리 등 사적인 용무)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평일
1.일과시간
기상나팔이나 일조점호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대략 6시 10분 쯤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당번병도 영감 깨우고 출근 수발을 위해 그때 쯤 일어나죠. 아침상 차려야 되는 조리병은 이미 기상하여 부엌으로 출근 한 후입니다. 옆방에서는 전속부관이 달콤한 아침잠의 마지막 한 자락을 움켜쥔 채 뒤척이고 있습니다.
저는 닭장 옆으로 가서 모닝담배를 한 대 때린 후(영감의 금연지시로 부관한테 걸리면 박살이 나므로 최대한 은폐하여 피우고 냄새도 제거합니다) 잔디정원으로 나갑니다.
손에는 ㄱ자 모양의 쇠꼬챙이를 들고 말이죠. 네, 잡초 제거 작업입니다. 잡초 좋아하는 지휘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마는 우리 영감, 유난히 질색하는 편이라 이렇게 보여주기 식으로라도 잡초 뽑는 모습을 어필해야 합니다.
그렇게 아침이슬로 촉촉한 정원 위에서 30분 정도 잡초를 뽑은 후 부관에게 아침인사를 하고 출근 준비를 합니다.
간단한 차량점검과 세차를 마친 후 영감을 태우고 사단으로 출근하는 거죠. 우렁찬 경례소리를 들으며 위병소를 통과, 각 잡고 도열해 있는 일직사령 일행과 함께 영감을 본청으로 올려 보내면 이제 일과가 시작됩니다.
땡보직인 장군차 운전병의 하루 중에서도 가장 편한 시간이 바로 일과시간입니다. 상급부대나 예하부대 방문 등 영외스케줄이 있으면 시간 맞춰 운행 다녀오면 되는 것이고 그나마 아주 먼 군사령부 방문 등은 헬기 지원 받아 알아서 날아갔다 옵니다.
운행이 없는 날은 더더욱 편합니다. 일병인 제 짬밥을 생각하면 열심히 뺑이치는 다른 전우들에게 죄책감이 들 정도였죠.
수송대로 가서 차량정비를 받기도 하고 비서실 심부름으로 물품구매를 다녀오기도 합니다. 점심시간 직전에 다시 관사에 들어가서 조리병이 방금 갈아놓은 신선한 녹즙을 공수해 오기도 합니다. 영감에 대한 충성심으로 늘 심기를 궁금해 하는 대대장에게 슬쩍슬쩍 첩보를 흘려주는 것도 빼먹으면 안 되는 일이구요.
남는 시간에는 적당히 짱 박혀 이영도 작가의 드래곤 라자를 독파했습니다. 작품 속 주인공 후치처럼 제 청춘에도 마법의 가을이 찾아와 주길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죠.
그렇게 시간을 때우다 슬슬 일과가 끝날 때 쯤 되면 전속부관이 저녁 스케줄을 알려줍니다. 영감이 바로 관사로 퇴근할지 아니면 저녁 약속이 있는지를 귀띔해 주는 거죠. 약속이 있다면 미리 장소의 지리를 전달받아 숙지한 다음 태우고 다녀오면 되는 겁니다.
서울이나 A시 등 멀리까지 나가야 되는 경우에는 좀 짜증이 나기도 하고 술자리가 길어져 자정 너머까지 대기하는 때도 있지만 그래도 바로 퇴근하는 날보다는 이렇게 늦게 들어오는 날이 저로서는 좀 더 낫더군요.
2.일과 후
약속 없이 바로 퇴근하는 날은 대략 5시 40분 쯤이면 영감이 내려옵니다. 영감을 태우고 그대로 직행하면 6시 전에 관사에 도착하지요.
그때부터 취침할 때까지가 제가 가장 싫어하는 시간입니다. 일단 영감이 내실로 들어가면 부속실로 튀어가 재빠르게 환복하고 다시 나옵니다. 역시 손에는 꼬챙이를 든 채입니다. 네, 저녁에도 잡초 뽑아야죠.
이때는 전속부관도 함께 쭈그리고 앉아 동참합니다. 생각해보면 부관도 좀 안됐습니다. 그래도 호봉 꽉 찬 중위인데 퇴근하고 일병 나부랭이랑 나란히 잡초나 뽑고 있어야 하니 말이죠. 보통 전속부관은 장기복무 생각하는 위관장교가 진급평점 생각해서 맡는 보직인데, 우리 부관은 다음 해 전역 예정인데도 그냥 운이 나빠서 걸렸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렇게 둘이서 궁상 떨며 풀을 뜯고 있으면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영감이 무심한 듯 시크하게 스윽 우리를 지나치며 어딘가로 향합니다. 어디로 가는 걸까요.
관사 위치가 사단 사격장 바로 옆이라는 것은 앞서 말씀드렸지요. 산 중턱을 깎아 만든 20사로의 드넓은 사격장은 일과가 끝나면 영감의 개인 골프연습장으로 쓰입니다.
진즉에 당번병이 번쩍번쩍 세팅해 둔 골프클럽과 골프공이 영감을 기다리고 있죠. 양 손을 공손히 앞으로 모아 대기하는 당번병을 뒤에 세워둔 채 영감은 골프 연습을 시작합니다.
따악! 따악! 호쾌한 타격음을 BGM 삼아 부관과 저는 계속해서 잡초를 뽑습니다. 그렇게 4~50분 정도 지나 뽑아 놓은 잡초가 제법 쌓일 때 쯤 후련한 표정으로 영감이 다시 내실로 들어갑니다.
이때가 저녁 7시 쯤. 솜씨 좋은 조리병이 차려 놓은 저녁식사를 들 시간이 된 것입니다. 저도 슬슬 위장에서 신호가 오지만 아직 제가 밥 먹을 시간은 아닙니다.
부관이 허리를 펴고 일어나며, 먼저 들어갈 테니 작전 다녀오라고 말합니다. 골프공 회수 작전이지요. 영감이 하루에 때리는 공은 보통 80개 정도, 컨디션 좋은 날은 100개까지도 때립니다.
오늘은 영감이 되도록 안정적인 탄착군을 형성해 놓았기를 바라며 장바구니를 들고 사격장으로 올라갑니다. 아무리 열심히 주워도 회수율은 70퍼센트를 넘기기 어렵더군요.
그나마 사격장 안으로만 공이 날아가면 좋을 텐데, 사격장 양 사이드 산비탈로 떨어지는 공의 개수도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미끄럽고 모기도 많기 때문에 비탈로 떨어진 공은 별로 줍고 싶지 않지만 회수율이 너무 낮으면 그만큼 공 구매량이 늘어나서 부관한테 욕먹고, 또 결국 그 공도 세금으로 사는 것이니 크게 위험하지 않은 곳까지는 찾으러 내려갑니다.
골프공 회수 작전은 해가 져서 시야확보가 어려워질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때가 한창 여름이었으니 대략 8시 언저리가 되면 끝나는 셈이지요.
그렇게 회수한 공바구니를 들고 부속실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커다란 김장용 빨간 대야에 물과 락스를 풀고 공들을 쏟아 넣죠. 사격장 흙바닥에 쳐박힌 공들이니 내일의 골프연습을 위해 흙과 때를 깨끗이 씻어야 되니까요.
그런데 일단은 배가 너무 고프기도 하고, 다른 식구들도 기다리고 있으니 우선 락스에 재워놓기만 하고 식사를 하기로 합니다.
사단 간부식당에서 추진해 온 식사를 부관, 당번병, 조리병과 함께 먹습니다. 가끔 부관이 기분 좋으면 피자나 치킨을 시켜 줄 때도 있는데 그런 날은 엄청 신나죠.
한창 밥을 먹고 있으면 전화벨이 울립니다. 인근 기무부대에서 사단장 동향 파악을 위해 정기적으로 걸어오는 전화입니다. "안녕하세요 기무부대인데요, 사단장님 관사에 계십니까?" 누가 전화를 받든 대답은 언제나 한결 같습니다. "네, 지금 관사에 계십니다." 영감은 있어도 있고 없어도 있는 겁니다.
식사가 끝나면 이제 골프공을 씻어야죠. 아, 그전에 밥 먹은 설거지도 막내인 제가 합니다. 영감 퇴임할 때까지 관사 생활하면서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끝내 후임병을 못 받고 막내로 남았다는 겁니다.
나중에 당번병 전역하고 부사수가 올라오긴 했는데 하필 저랑 동기더라구요. 그래도 동기인 만큼 친구처럼 잘 지냈습니다.
골프공은 고무장갑 끼고 一求一魂(일구일혼)의 느낌으로 한 개씩 정성껏 뽀득뽀득 닦습니다. 제가 성격이 깔끔해서가 아니라 부관이 검사하거든요.
설거지와 골프공 세척이 끝나면 아홉시 반 정도 됩니다. 일석점호가 없으니 취침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고, 무엇보다 최후의 임무가 남아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골프를 치지 않기에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만 골프 장갑이라는 물건이 생각보다 내구성이 많이 약하더군요. 영감이 연습용으로 착용하는 골프장갑은 거의 매일 한두 군데가 찢어진 상태로 돌아옵니다. 기껏해야 연습용 장갑을 그때마다 버리고 새 것으로 사기는 아까우니 제가 덧댐용 가죽으로 바느질을 해야 합니다.
수 없이 덧대어져 원래의 가죽은 거의 남아있지 않는 누더기 장갑과 씨름하는 동안 당번병과 조리병은 이불을 깔고 누워 예능프로를 시청합니다. 저도 틈틈이 화면을 흘끔대며 열심히 바느질을 합니다.
바느질이 끝나면 대략 밤 10시가 조금 지나 있습니다. 그럭저럭 일반 막사 취침시간과 비슷하지요. 늦게까지 TV시청을 하는 것은 자유입니다만 두 고참이 벌써 잠들어 있는 경우라면 방해할 수 없으니 전원을 끄고 잠을 청합니다.
내일은 폭우라도 시원하게 쏟아져서 잡초도 안 뽑고 세차도 안 하고 영감이 골프 연습도 안 했으면 좋겠다는 군기 빠진 생각을 하며 그렇게 하루를 마칩니다.
#주말
주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골프장 부킹이 되어 있는 날과 고향인 A시 시민들을 초청하여 융숭히 대접하는 연회가 예정되어 있는 날입니다. 극히 드문 경우지만 아무 일정 없이 관사에서 쉬는 날은 서너 시간 정도 잡초만 열심히 뽑아주면 되고요.
1.골프장 운행
보통 체력단련장 이라고 부르는 골프장이야 뭐 대한민국 400여 장성들의 종특인 만큼 특별할 것은 없습니다.
부킹된 체력단련장(우리 영감은 주로 1~2시간 거리의 공군전투비행단 내부에 있는 곳을 이용했습니다)까지 태우고 가서 영감이 필드 도는 네댓 시간 동안 차 닦으며 대기하고 라운딩 끝나면 다시 회식 장소까지 가서 끝날 때까지 대기하면 됩니다.
오전에 나가면 밤이 되어서야 돌아오는 운행입니다만, 일병인 제 짬밥을 고려할 때 내무생활을 했다 한들 이래저래 고참들 갈굼과 심부름으로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을 터이니 크게 불평할 수야 없지요.
이미지는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2.A시 시민 초청 연회
전역 후 A시 차기 시장이 되기로 결심한 우리 영감, 사단장 임기 내내 부지런히 밑밥을 깔아놓기로 결심합니다.
사단장 퇴임 후에도 바로 전역하는 것이 아니라 몇 개월간의 전역대기 기간이 있습니다만, 그때는 이빨 다 빠진 상태로 무슨무슨 관찰자 같은 이름만 그럴싸한 한직을 맡게 되므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없어질 테니까요. 온 사단의 기운을 맘껏 끌어다 쓸 수 있는 지금이 바로 적기입니다.
해서, 주말마다 A시 시민들을 왕창왕창 관사로 초대하여 상다리 휘어지게 대접하기로 합니다. 이런저런 기념품도 증정하고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모든 식사와 선물비용은 사단 운용비에서 충당하게 됩니다.
한 달에 주말이 8일 정도 된다고 할 때 초기에는 2~3회 정도만 열던 연회를 퇴임이 가까워 올수록 초조해 지는지 막판에는 6회까지도 실시하더군요. 말하자면 한 주도 빠짐없이 꼬박꼬박 연회를 연 셈이죠.
우선 오전부터 수송대 육공트럭이 사단과 관사를 들락거리며 3~40인분의 고급 한우와 소주, 맥주, 숯, 채소, 쌀, 김치 등을 정원으로 분주히 실어 나릅니다.
음식 뿐만 아니라 테이블과 의자, 불판 등 간부식당의 거의 모든 물품도 싣고 오죠. 식당을 통째로(?) 옮겨 오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부대장(소령)의 지휘 아래 간부식당 관리관(상사), 그리고 본부대 병사들이 동원 되어 테이블을 정렬하고 테이블보를 깔고 그 위에 다시 투명시트를 덮고 술잔과 그릇들을 세팅합니다.
노래방 기기와 마이크도 설치하고 음향체크도 해 둡니다. 혹시나 비가 내리더라도 연회에 차질이 없도록 커다란 차단막도 미리 준비해 둡니다.
관사 주방은 주방대로 분주합니다. 조리병과 지원 나온 사단 취사병들이 식재료를 체크하고 조리 계획을 세웁니다. 운전병인 저도 주방에 위치하며 부지런히 조리병의 심부름을 합니다.
그런데 이 중에는 어찌된 일인지 민간인이 한 사람 껴 있습니다. 그것도 여자 사람이요. 바로 본부대장 사모님입니다.
저희들이야 어쨌든 군인 신분이라 주말이든 언제든 까라면 까야하니 그렇다 쳐도, 애꿎은 본부대장 사모님까지 동원되어 설거지 하고 김치 썰고 청소하고 있는 것을 보니 안타까운 생각이 들더군요.
이런 식으로 만전을 기해 연회 준비가 완료되면 곧 A시에서 손님들이 도착할 시간이 됩니다. 하얀 셔츠에 보우타이까지 갖춘 서빙병들이 잡초가 말끔히 제거된 정원 위에 도열합니다.
스탠바이에 들어가는 거죠. 잠시 후 A시 시민들을 가득 태운 대절버스가 경계병의 우렁찬 경례를 받으며 관사로 들어섭니다.
서빙병들이 열심히 박수를 치는 동안 영감은 유권자, 아니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을 환한 미소와 악수로 맞습니다. 그리고 바로 연회가 시작되는 거죠.
6개월간 이런 식으로 초대받은 A시 손님들 숫자가 대략 6~700명 정도 될 겁니다. 그들이 정확히 뭐하는 사람들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고등학교 동문회, △△산악회 같은 느낌으로 기억합니다. 서빙병들은 부지런히 고기와 술을 나르고, 손님들은 노래 부르고 춤추고 영감 이름을 힘차게 연호하는 등,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는 동안 저는 크게 바쁠 것은 없습니다. 고참인 조리병을 도와 부엌 잔일을 거들고, 잡담하며 노가리도 깝니다.
그렇게 밤 10시에서 11시 즈음 연회가 끝나고 손님들이 돌아가면 사단에서 병력들이 다시 한 번 투입, 테이블과 의자, 쓰레기 등을 수거해 갑니다. 그러면 비로소 관사의 주말이 끝나는 거죠.
시간이 지나면서 연회의 디테일이 조금씩 업그레이드 되기도 합니다. 손님들을 태운 버스가 관사로 들어올 때 서빙병들의 도열과 박수만으로는 뭔가 없어 보인다고 느꼈는지, 나중에는 군악대까지 동원해 환영 연주를 시키더군요. 문제는, 동원사단인 저희 부대에는 군악대가 없었다는 겁니다.
결국 이웃 향토사단장에게 연락하여 군악대를 빌려 오죠. 향토사단장은 물론 소장으로 영감보다 상급자입니다만, 육사 기수로 한 기수 후배였습니다. 선
배가 군악대 좀 가져다 쓰겠다는데 거절하긴 힘들었겠지요. 하루는 그쪽 사단장 운전병과 마주쳐 잡담을 나누는데, 자기 영감이 와이프한테 우리 영감 욕을 하더라고 전해주더군요.
“아니 Y선배는 뭐한다고 애꿎은 우리 애들 주말에 쉬지도 못하게 불러다가 고생 시키는 거야? 대체 무슨 행사를 하길래...”
아아, 부끄러움은 저의 몫이었습니다.
또 언젠가는, 매주 소고기만 가져다 먹는 게 지겨웠는지(그럴 만도 하지요. 손님들은 매주 바뀔지언정 영감은 늘 그것만 먹으니까요) 이번에는 장어를 구워보라고 지시하더군요. 존명. 숯불화로를 되는 대로 공수해 와 열심히 장어를 굽습니다. 관사 뒤편으로 가 보니 본부대장이 화로 앞에 쭈그리고 앉아 부채질을 하며 열심히 불씨를 피우고 있습니다. 뭔가 애잔한 마음에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으니 본부대장, 제게 말을 겁니다.
“야 운전병. 대장이 초라해 보이냐?”
“아... 아닙니다.”
“대장이 지금은 이렇게 주말에 불려 나와서 장어나 굽고 앉아 있어도 장차 별 세 개까지는 달 사람이야. 두고 봐 임마.”
“...네 알겠습니다.”
어언 15년이 지난 일입니다만, 그 후로 본부대장은 어디까지 진급했을까요. 아마 결국 별은 못 달았을 겁니다. 비(非)육사 출신이었으니까요.
#후일담
어쨌든 그렇게 시간은 흘러 영감은 사단장을 퇴임, 대기 보직을 거쳐 전역을 합니다. 저도 평범한 운전병으로 돌아갔다 무사히 사회에 나옵니다. 과연 그 해 가을 보궐선거 때 A시 시장 후보로 출마 하더군요. 의외였던 것은 영감이 노란 잠바를 입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단장 시절, 노무현(당시 대선후보)을 '나쁜 새끼'라며 혀를 차던 걸로 봐서 당연히 파란당(지금은 빨간당)에서 나올 줄 알았는데 말이죠. 하긴 그때가 한창 탄핵 후폭풍으로 열우당이 총선도 휩쓸고 승승장구하던 시기라 나름 전략적인 선택이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도 故김근태의원과 손잡고 만세하며 찍은 유세사진을 보니 뭔가 씁쓸하긴 하더군요)
영감이 해왔던 짓을 알기에 미디어든 경쟁후보 진영이든 투서를 해 볼까도 진지하게 생각해 봤습니다만, 파란당 후보나 영감이나 그놈이 그놈인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사전 지지율 조사를 보니 영감의 낙선이 유력한 것 같아, 그냥 관뒀습니다. 뭐, 선거 결과는 사전조사 대로였습니다.
이제 70이 훌쩍 넘었을 우리 영감,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요. 궁금하여 포털에 이름을 두드려 보니 모 국방기관에서 감사를 맡고 있는 모양이네요. 아직도 가슴 속에 A시 시장에 대한 꿈을 품고 있을까요. 아마 아닐 것 같습니다.
별똥별
반년 간 땡보로 지내 본 제 군생활을 간략히 소개해 보려는 의도로 시작했는데, 어쩐지 영감 군생활을 소개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아무튼 여러분의 군생활과 비교하여 어떠셨을지 궁금하네요.
다음 생에 태어나 보니 또 한국이어서, 한 번 더 입대를 하게 된다면, "꼭 최전방에 배정 받아 진짜 군인다운 군생활을 해보고 싶습니다!" 라고는 차마 말씀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기왕이면 편한 보직일지언정 내가 나라를 지키다 왔다는 최소한의 보람은 남길 수 있는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좋겠네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딴지일보] 2017.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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