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전우회 총재자리 해병에 마지막 ‘봉사’ 기회
‘연평도 포격전’ 해병부대원들 포상 이뤄져야 ...해결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 다할 터
유낙준 해병대전우회 중앙회 총재
연평도 포격도발 7주기가 2개월여 앞으로 다가왔다. 대한민국 해병대와 연평도 주민들에게는 그때의 상흔이 아직도 씻기지 않고 남아있다. 2010년 11월 23일 그날 포격으로 인해 민간인 2명이 죽고, 10명이 다쳤다.
해병대 연평부대원들 역시 2명이 사망하고, 1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런데도 연평부대원들은 아직까지 제대로 된 포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국방부장관 표창 2개가 전부다. 왜 포상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지 이유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북한의 기습 도발에 맞대응한 연평부대의 성과에 대해서도 국방부 공식 명칭은 ‘연평도 포격전’이 아닌 ‘연평도 포격 도발’이다.
그 당시 대응사격을 지시했던 해병대사령관이자 현 해병대전우회 중앙회 총재를 맡고 있는 유낙준 전 해병대사령관을 만나 그날의 소회와 해병대전우회 총재로서의 향후 계획을 들어봤다. 그는 내년 지방선거 차기 남양주시장으로도 하마평에 오르내리고 있다. 지난해 20대 총선에 출마했으나,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예비경선에서 아깝게 고배를 마셨다.
지난 2월 해병대전우회 총재로 취임해 바쁜 일정을 이어가고 있지만, 지방선거까지 시간이 남아있어 출마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게 정가의 분석이다. 인터뷰는 성수동 해병대전우회 중앙회 총재실에서 진행됐다.
전역 후, 정치 입문계기 역시 ‘연평 포격전’이 이유
“제가 처음 정치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건 해병대사령관 시절 2010년 ‘연평도 포격전’ 연평부대원들의 포상이 이뤄지지 않아서입니다. 전역해서라도 이것만큼은 꼭 해결해야하는, 제 일생의 과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역 때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해내지 못했습니다.
정치에 입문한 계기도 그랬지만, 해병대전우회 총재로 나선 것도 우리 전우회의 힘을 빌리면 가능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연평도 포격전 당시 우리 해병부대원들은 잘 싸웠습니다. 적의 선제 포격에도 굴하지 않고 응사 포격에 나섰고, 적에게 타격을 입혔습니다. 그다음 조치가 (전투기 출격이) 이뤄지지 않아 문제였지, 우리 부대원들은 임무완수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해병대라면 누구나 가슴 한구석에 회한처럼 응어리로 남아 있습니다.”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를 묻자 돌아온 대답이다. 그는 또 “지금도 행사나 강연회에 자주 불려나간다”며 “그때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꼭 얘기한다”고 덧붙였다. 정치성향을 떠나 정권이 바뀌었으니 포상 문제도 잘 풀렸으면 하는 속내를 비치기도 했다. 북한이 그동안 크고 작은 수많은 도발을 해왔지만, 6·25전쟁 이후 50여 년 간 단 한 번도 국지전(전면 전쟁을 회피하면서 제한된 지역에서 어떤 조건 하에 국가 정책과 군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행해지는 전쟁)을 감행한 적은 없었다. 실로 엄청난 도발이었다.
국지 전쟁은 바로 전면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연평도 포격전 당시 대응사격 명령을 내린 이가 ‘유낙준’ 바로 그였다. 포항 1사단 현장지도를 하고 있다가 유선으로 상황을 보고받았다. 그는 그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때 저는 포항부대를 시찰 중이었습니다. ‘유비무환’ 정신으로 30여 년간 다져온 저였지만, 보고를 받고 솔직히 깜짝 놀랐습니다. ‘왜 하필 이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적이 그동안 수많은 도발을 벌였지만, 우리 영토에 직접 포격을 가하는 국지전 형태의 도발은 6.25전쟁 이후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지휘관의 잘못된 판단이 또 다른 전쟁으로 확전될 수 있는 엄중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령관으로서 바로 명령을 내려야했습니다. 순간, 어처구니없게도 6·25전쟁 초 한강다리 폭파 책임을 둘러쓴 채 1950년 9월 사형당한 공병감 최창식 중령이 떠올랐습니다. 아마 저도 겁에 질려있었던 것 같습니다. 참모들도 저와 똑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참모들과 상의하지 않고 응사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건 용감한 우리 해병대 연평부대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주저 없이 대응사격을 명령할 수 있었던 건 해병대 연평부대원들 있어서였다. 1차보고 후 바로 이어진 2차 보고에서는 K-9 대응 포격 태세를 갖췄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쏴”라는 외마디의 명령이 떨어졌다. 어찌나 목소리가 컸던지 참모들이 깜짝 놀랐다고 한다. 명령 직후 우리 측은 세 문의 K-9포로 북측 무도포진지에 50발, 개머리포진지에 30발 등 모두 80발의 발사가 이뤄졌다. 제대로 맞대응을 한 셈이다.
그는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보상할 수 없는 꽃다운 젊은이들의 희생과 그들 부모의 뼈에 사무치는 심통”에 가장 가슴이 아팠다. 그의 37년간 군 생활에 있어 ‘연평도 포격전’ 대응사격 명령이 가장 잘 한 일이었고, 더 강력하게 응징하지 못한 것이 가장 잘못한 일이었다. 그의 말을 빌리면 “아쉽고, 후회스럽고, 가슴이 아프다”
늦깎이 공부가 군인생의 길 밝혀 ... 만학도인 셈
“저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해군사관학교 시절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땐 사관학교에만 들어가면 제 인생이 탄탄대로일줄 알았습니다.(웃음) 공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틈만 나면 놀러 다니고, 동기들 공부할 때 저는 주로 전공과 다른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당연히 학교성적은 거의 꼴찌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다 정신을 바짝 차린 건 초급장교 시절 결혼을 하고서부터입니다. 가정이 생기자 지금부터라도 똑바로 하지 않으면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 한 가장으로서 책임감 때문에 늦깎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만학도인 셈이었죠.”
고교 때 죽어라 공부해서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갔으니 졸업하면 자동으로 진급되는 줄 알았단다. 동기부여가 안 되는 건 당연했다. 그에게 동기부여를 심어준 건 아내와 어린 얘들이었다. 그때부터 대학원 석·박사과정을 밟았고,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큰 얘가 지금 36살인데 자기 기억에는 아버지가 노는 것을 본적이 없다”고 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출근 전까지 관련서적을 읽으며 필요한 공부를 했다. 그 공부는 퇴근 후 밤늦게까지 계속됐다. 그때 조금 조금씩 쌓아진 게 오늘날의 결과를 만든 셈이다.
그는 1979년 해군사관학교(33기)를 나와 합참전략기획본부, 연합사, 해병대 제6여단장, 제1사단장을 거쳐 해병대사령관을 역임하고 37년간의 군 생활을 마감했다. 군 시절에는 국방부와 합참, 연합사 등에서 근무하면서 국방정책과 전략기획 분야의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 솔직담백하고, 부하들을 화합·단결시키는 리더십을 갖춘 전형적인 덕장으로 꼽혔다.
2010년 6월 그가 제30대 해병대사령관 취임한 후 해병대에는 역대급 사건·사고들이 몰아닥쳤다. 유 총재는 “‘연평도 포격전’에 이어 2011년 3월 3일 국회 정기총회에서 정미경 의원으로부터 4월 15일 국회 국방위원회 법소위를 통과했다. 해병대 출신 국회의원이 ‘해병대독자성보장법’안을 통과시켰다는 것은 해병대 65년 역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며 당시의 감격어린 회고를 전했다.
해병전우회 총재자리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봉사’
“시·군은 물론 면·읍·동별로 해병대전우회 지회가 활성화돼 있습니다. 조직은 시·군에만 7~8개이고, 많게는 10개가 훨씬 웃돕니다. 지회 회장만 1000명이 넘습니다. 이렇게 조직이 방대하다보니 해병대전우회와 관련한 사소한 사건들도 종종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 또한 방지를 위해 전우회 스스로가 노력하고 있습니다. 땅이 더 굳어지는 과정으로 봐주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전우회 회원들은 생업에 전념하면서도 주민안전을 위한 야간 자율방법을 비롯해 전문 분야인 바닷속 환경오염물 제거, 교통정리 등 사소한 민원지원까지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제가 총재 취임 당시 해병대회관 건립과 해병대전우회 재정확립을 위한 노력을 약속했습니다. 이와 별개로 개인적으로 걱정하는 건 해병대전우회 선배님들입니다. 전우회 제일 윗기수 연세가 벌써 90대가 돼 돌아가시는 분들이 많아졌고, 이 분들 중에는 생활이 넉넉지 않은 분들도 계십니다. 이 분들에게 도움이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우리 예비역 전우들, 특히 참전용사들을 잘 모시려고 합니다.”
지난 2월 25일 해병대전우회 ‘2017년 정기총회’에서 대의원들의 만장일치로 그가 제14대 해병대전우회 총재로 추대됐다. 취임식에는 공정식 제6대 사령관을 비롯해 역대 해병대사령관 및 예비역 장성, 해병1기전우회 회장 및 참전용사, 국방부 교육정책관, 해병대사령부 전력기획실장 등 500여 명이 참석했다. 그는 취임사를 통해 “100만 해병대 전우와 소통·화합을 통해 하나 된 해병대전우회로 뭉치고, 숙원사업인 해병대회관 건립과 더불어 재정확립 방안을 강구해 나가겠다”며 “앞으로 해병대전우회가 화합과 소통을 중심으로 국가에는 충성을, 국민에겐 무한한 신뢰와 존경을 받는 조직이 될 수 있도록 다 함께 노력해 나가자”고 소감을 밝혔다.
대한민국 해병대전우회는 1949년 4월 15일 해병대 창설 이래 전역한 해병들이 기수별, 병과별 모임이 자생적으로 조직화돼 현재에 이르렀다. 해병대전우회는 전국 시·도는 물론 읍·면·동까지 10만여 명의 회원들이 국가안보 수호와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봉사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고향 남양주 발전 위해 첨단산단 유치해야
“남양주시장 공천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남양주가 제 고향이라 저의 시장 출마에 관해 여기저기서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20대 국회위원 선거 공천 때 저에게 양보했던 후배들이 있습니다. 그때 후배들에게 양보를 받았으니 이번엔 제가 양보할 차례입니다. 선거 때마다 ‘이랬다, 저랬다’하는 모습이 썩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닙니다. 이번 남양주시장 선거는 나가지 않고 도움을 받았던 후배들에게 양보할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의 의지와는 달리, 언론들은 내년 6·13 지방선거 판세분석에서 차기 남양주시장에 올려놓고 출마를 점치고 있다. 유낙준 총재는 지난해 2월 12일 새누리당 남양주갑 예비후보에 등록하고 선거사무소 개소식을 가졌다. 이날 개소식에는 이현재 하남시 새누리당 국회의원, 이성호 전 보건복지부 장관, 이상로 해병대전우회중앙회 총재, 일반시민 등 약 600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하지만 예비경선에서 검사출신인 심장수 남양주 갑구 당협위원장에게 석패했었다. 당연하지만 유 총재는 20대 총선 예비 경선 탈락에 대한 아쉬움은 가지고 있었다.
“남양주는 베드타운입니다. 인구수가 70만 명에 다가섰고, 100만 명 시대를 바라보는데 여기 사는 사람들은 대개 직장이 서울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양주시에는 다닐만한 직장이 없다는 뜻도 됩니다. 제가 구미에 있는 경운대에 일주일 2번씩 안보 관련 강의를 나가는데 구미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혜택을 입은 도시라는 겁니다. 구미는 바다와 접해 있지 않습니다. 산업도시는 물류수송을 위한 지리적 장점이 최우선이지만 구미는 사실, 산업단지가 들어설 자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산업단지를 잘 닦아놓았습니다. 제3공단이 끝나면 바로 제4공단 조성에 들어갑니다. SK고문 시절 브라질을 방문했는데 현대자동차 공장이 들어와 있어 견학을 갔습니다. 공장부지는 거의 무상임대 형태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허허벌판에 공장이 들어서니 공장을 연결하는 진입도로가 놓이고, 주변엔 필요한 상업시설로 채워졌고, 병원과 주택도 들어섰습니다. 직장이 있는 근처에 살아야 그 지역에 오래 살고, 오래 살면 거주지에 애착이 생깁니다.”
남양주시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인지에 대한 그의 답변이었다. 남양주 내에서 살며 직장을 다니고, 문화생활을 즐겨야 남양주가 발전한다는 의미다. 직장과 거주지가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주거기능을 담당하는 도시를 베드타운이라고 한다. 현대도시의 특징 중에 하나가 직장과 거주지가 분리된 현상이다. 이런 현상의 원인은 높은 부동산 가격이나 교통시설의 발달에서 찾을 수 있다. 대도시 주변의 지방자치단체는 도로, 수도, 공원설치 등으로 재정 부담이 급증하기 때문에 베드타운을 기피하는 게 일반적이다. 주거기능만 담당하기 때문에 도시 내 소비 수준을 충족시키는 서비스업 외의 산업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도시의 자족 기능은 낮은 편이다. 유 총재의 말은 이어졌다.
“남양주시가 진정한 자족도시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첨단 산업단지 유치가 꼭 필요합니다. 병원이나 학교 등 공공시설을 짓기 위해서는 세금이 들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남양주시의 1조 남짓한 뻔한 예산으로는 이러한 시민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첨단 산업단지가 들어서면 수요가 생기고, 수익이 나기 때문에 대형병원들도 알아서 들어옵니다. 누가 남양주의 국회위원이 되든, 남양주시장이 되든 이 문제가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한정된 세금으로는 시민의 욕구를 충족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남양주시가 소비 위주의 도시가 아니라 생산성을 가진 도시로 거듭나야 남양주시는 시민들이 추구하는 도시로 변모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현재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해병대전우회 총재는 제가 평생을 함께한 해병대에 봉사하는 마지막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총재로서 본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지금까지 나를 길러준 해병대에, 국가에 대해 충성하는 길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시사뉴스] 2017.09.01
'★해병대 역사 > 역대 해병대사령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난 9월 25일 제 9대 해병대사령관 고(故)이병문 대장의 유족 해병대에 1억원 기탁 (0) | 2019.10.12 |
---|---|
제35대 사령관 해병대 중장 이승도 장군 (0) | 2019.09.27 |
[전문]이영주 전 해병대사령관 "국민단합 이끌 지도자" 文찬조연설 (0) | 2017.05.12 |
제34대 사령관 해병중장 전진구 (0) | 2017.05.07 |
이호연 전 해병대사령관 세계 4대 사막마라톤 ‘그랜드슬램’ 달성 (0) | 2016.1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