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역대 해병대사령관

공정식 “병사들이 땅바닥서 자면 지휘관도 함께… 그것이 해병魂”

머린코341(mc341) 2014. 8. 14. 21:52

공정식 “병사들이 땅바닥서 자면 지휘관도 함께… 그것이 해병魂” (문화일보, 2014.08.13)

 

前해병대 사령관  
海士 1기로 해병 창설 주역… 손자까지 3代가 ‘영원한 해병’ 


 

▲  1951년 강원 화천지구 전투에서 승리한 뒤 공정식(당시 해병대 제1대대장·왼쪽) 전 해병대사령관이 김성은(당시 해병대 제1연대장) 전 국방부 장관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출처 = 공정식 사진집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공정식 전 사령관은 ‘김성은 부대’를 이끈 ‘귀신 잡는 해병대’ 신화의 주인공으로, 해병대사령관·국방장관을 지낸 고(故) 김성은 전 장관과 함께 해병대사령부의 발원지인 해병대기념관에 해병대전략연구소를 설립했다. 초대 이사장이었던 김 전 장관에 이어 2007년부터 2대 이사장 직을 맡고 있다.

 

1925년 9월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1947년 해군사관학교 1기로 임관했다. 함정 지휘관 시절 여순반란사건을 진압한 경험으로 손원일 제독에게 해병대 창설을 건의한다. 해군 최초 전투함 백두산함 인수요원으로 활약한 뒤 통영상륙작전과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다. 전쟁 중이던 1950년 11월 말 당시 김성은 해병대 참모장 권유로 해군에서 해병대로 옮겨 새로 창설된 해병대 제1연대 제1대대장을 맡은 후 화천전투, 도솔산(펀치볼) 전투, 장단·사천강 전투 등에 참전해 무적 해병 신화를 쌓는다. 해병대 최초로 미 해병참모대학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 해병대에 한국형 상륙작전 교리를 정착시켰다.

 

전쟁이 끝난 뒤 해병제1여단장, 한미해병연합상륙여단장, 해병제1상륙사단장을 거쳐 1964년 제6대 해병대사령관에 취임한다. 해병대사령관이었던 1965년 10월 한국군 첫 해외파병부대인 해병 청룡부대를 창설, 베트남에 파병했고, 제7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그의 가정은 3대에 걸쳐 해병대와 인연을 맺었다. 아들 3명 모두 해병대 출신. 큰아들 용우 씨는 베트남전에 참전했고, 손자 중 2명도 해병 가족이다. 을지·충무무공훈장, 미 동성훈장, 금성을지 무공훈장(두 번), 금성충무 무공훈장 등을 받았다.

 
 

▲  공정식 전 해병대사령관이 서울 용산구 해병대기념관에서 6·25전쟁 당시 치열했던 전투 상황을 생생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구순의 나이에도 해병대전략연구소 이사장으로 일하는 ‘영원한 해병’이다. 심만수 기자 panfocus@munhwa.com 
 
구순의 백전노장은 나이를 잊은 듯했다. 서울 용산구 두텁바위로에 있는 방위사업청에 들어서자마자 왼쪽 입구의 해병대기념관 2층 계단을 오르내릴 때 불편한 다리 탓에 해병 장교 출신인 둘째 아들 용대(59) 씨의 부축을 받긴 했지만 복잡한 전투 상황을 생생하게 설명하는 비상한 기억력과 정열은, 공정식 전 해병대사령관이 왜 ‘영원한 해병’으로 불리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노병은 기념관 내 해병대 역사를 증언하는 사진들을 일일이 가리켰다. 6·25전쟁 당시 한국 해군·해병대 첫 단독 상륙작전으로 해병 신화의 출발점이 된 통영상륙작전에서부터 한국 해군·해병대의 첩보작전에 힘입어 성공한 인천상륙작전. 미국 해병대도 두 손 든 철의 삼각지대 중동부전선에서 인민군 최정예부대 12사단과 32사단 주력부대를 상대로 야간기습전으로 난공불락의 철옹성을 쟁취, 대한민국 해병대의 용맹성을 과시한 도솔산 전투. 피의 보복전으로 지켜낸 서부전선 임진강 장단지구 전투. 베트남전 파병 당시 짜빈동 전투 등에서 대승을 거둔 청룡부대의 무용담이 거침없이 그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그 순간만큼은, 노병은 아직도 전장을 누비는 혈기왕성한 청춘이었다. 전투와 작전에 직접 참전한 노병의 얼굴 표정과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조국을 두 손으로 지켜낸 무적 해병대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과 긍지가 흘러넘쳤다.

 

인터뷰는 60년 이상 대외비로 공개가 금지됐다가 2012년 최윤희 당시 해군참모총장(현 합참의장) 시절 해제돼 해군 전사에 공식 기록된 몽금포작전에서부터 시작됐다. 황해남도 용연군 장산곶 남쪽의 몽금포는 ‘몽금포타령’으로 유명한 곳. 지금은 남포 서해함대사령부가 자리 잡은 전략 요충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얼마 안돼 제주 4·3사건과 육군 14연대 여순반란사건, 1949년 5월 육군 8연대의 2개 대대 월북사건, 좌익 승조원들에 의한 함정 4척 납북과 9척 납북 미수사건이 일어날 정도로 김일성이 파견한 공비들과 남로당이 대한민국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지요. 급기야 1949년 6월 주한미군이 모두 철수한 뒤 8월 10일 해군 인천경비부에서 관리하던 주한 미 군사고문단장 윌리엄 로버트 준장의 전용 G보트가 행방불명되는 사건이 일어나 경무대(청와대의 옛 이름)가 발칵 뒤집어집니다.”

 

범인은 남로당 공작원 여동생을 짝사랑한 해군 인천경비부 소속 안성갑 하사로 드러난다. 그는 “로버트 준장 보트를 몰고 월북하면 공작원 여동생과 결혼시켜 주겠다”는 북한의 감언이설에 속아 일을 저질렀다. 한국 해군 함정을 끌고 오라는 북한 지령을 받은 안 하사는 1950년 봄 서울에 다시 잠입했다가 해군 특무대에 체포된다.

 

로버트 준장의 보고를 받고 노여움이 극에 달한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질책을 받은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해군참모총장과 이응준 육군참모총장의 운명은, 육군과 해군의 대북 응징작전의 성공과 실패로 엇갈린다. 두 차례 대북 응징작전에 실패한 이 총장은 월북사건 등을 이유로 해임당한 반면, 손 총장은 몽금포작전 성공으로 이 전 대통령의 극찬을 받는다. 이후 해군·해병대의 운명도 함께 바뀐다.

 

“손 총장을 수행하던 해군본부 정보감 함명수 소령이 해군 전체 여론을 대표해 더 이상 앉아서 당해서는 안 된다며 자신이 특공대를 이끌고 보트를 찾아오겠다며 작전계획을 직접 입안했지요. 손 총장은 적 위협의 발원지를 초토화시켜 나라의 운명을 구하겠다는 비장한 결단으로 작전계획을 결재했습니다.”

 

작전부대(함정 5척, 상륙대원 20명)는 1949년 8월 16일 새벽 2시 야음을 틈 타 인천항을 출발한다. 공 전 사령관은 JMS-302 정장(소령)으로 참전해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새벽 6시 5척의 고무보트에 대원들을 분승시켜 빗발치는 총탄을 뚫고 함 소령이 항내로 돌입하는 순간, 공 전 사령관은 위기를 직감하고 특공대 엄호를 위해 돌진한다. 갑자기 상륙을 수십m 앞두고 특공대 5척 가운데 4척이 기관 고장으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한다. 상륙을 독려하던 함 소령이 적탄에 맞은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저러다 전원 몰살이다!’ 위기 상황을 간파한 공 전 사령관은 포와 중기관총을 발사하며 함 소령이 쓰러진 보트로 달려가 이들을 단정보트로 후송하고 특공대원들을 모두 구출한다. 부두에 정박 중이던 북한 경비정 4척을 침몰, 대파시킨 데 이어 내친 김에 적 해군경비정에 수류탄을 투척, 육탄전으로 적 경비정 제18호를 나포하고 인민군 해군 군관 등 포로 5명을 생포한다.

 

“몽금포작전은 우리 해군의 원점타격 효시로 평가받는 공식 해전이자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정의로운 작전이었습니다.”

 

이 작전을 계기로 북한의 무장공비 도발과 폭동, 반란, 납북 사건은 뚝 그친다. 하지만 작전의 대성공에도 당시 존 무초 주한 미대사는 ‘38도선 월북 작전’을 문제 삼아 우리 정부에 강력히 항의하고 정부는 공식 사과하기에 이른다.

 

“몽금포작전을 대외비에 부쳐 대외 공개를 금지해온 것은, 김일성이 6·25전쟁의 발원이 몽금포작전이라고 선전·선동하며 정치적으로 악용했기 때문입니다. 김일성의 거짓은 옛 소련 자료공개로 만천하에 드러났지 않습니까.”

 

참전자 중 현재 생존자는 함명수·김상길 제독과 공 전 사령관 3명뿐이다. “올해 8월 16일 몽금포작전 65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초로 승리한 해전이라는 재평가와 함께 현양작업이 절실합니다.”

 

몽금포작전의 승리는 해군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으로 이어진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몽금포작전 승리를 계기로 우리 해군도 전투함이 있어야겠다며, 미국으로부터 전투함 인수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해군 장병들의 국민성금 1만5000달러와 대통령 하사금 4만5000달러 등 전투함 구입비 6만 달러는 당시로서는 큰돈이었지요. 그때 만약 백두산함 등 전투함 4척을 인수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의 장래가 어떻게 됐을까요. 아찔한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공 전 사령관은 손 총장과 함께 두 번이나 미국으로 건너가 전투함 인수 협상을 벌인다. 미 국방부를 졸라 3인치 포와 레이더를 장착하고 괌에 들러 3인치 포탄 100발을 구입한 백두산함은 1950년 4월 10일 경남 진해에 입항, 3개월 뒤 전쟁 흐름을 바꾸는 엄청난 일을 해낸다. 6·25전쟁이 발발한 바로 그날 북한 특공대 수송선을 적발해 선박에 탄 특수부대원 600명을 바다에 수장시킨 것이다.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부 정보요원 노먼 존스는 저서 ‘한국전선’에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대한해협 해전’ 승리는 한국전쟁의 분수령이 됐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6·25전쟁 발발과 동시에 북한 특공대가 부산을 장악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아마도 유엔군이 참전도 하기 전에 후방이 뚫려 전쟁이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렀을 수도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대한해협 해전과 통영상륙작전 승전을 알게 된 미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유엔함대에 한국 해군 주력부대인 전함 4척을 포함해 15척을 참전시키기에 이른다. “그때부터 미군은 한국 해군을 계속해서 원산·함흥 방어 작전을 비롯해 동·서 해안 봉쇄작전에 투입시키는 등 적극적인 지원 작전을 전개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몽금포작전 승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무엇이 그를 해병혼(魂)의 화신으로 만든 걸까. “일선 대대장이 되면서 모든 일을 항상 병사들과 똑같이 했습니다. 병사들이 걸으면 저도 걷고, 그들이 보리밥을 먹으면 저도 보리밥을 먹고, 그들이 땅바닥에서 자면 저도 땅바닥에서 잤지요. 직책만 부대장일 뿐 병사들과 똑같이 생활하니 처음엔 저를 불신하던 병사들도 저를 믿고 따랐습니다.”

 

대한민국 해병이 무패 신화를 쌓으며 강군이 된 배경이 궁금했다.

 

“세계 최강의 미국 해병대와 같이 싸우면서 한국형 전투교리와 작전을 개발한 게 결정적인 힘이 됐습니다. 당시 한국군에는 포병이나 전차가 한 대도 없을 때였지요. 미 해병 항공사단의 항공·함포·포병 지원까지 받은 덕분에서 큰 전투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지요. 또 6·25전쟁 당시 해병대에 학병 등 우수한 엘리트 인력이 많이 지원한 것도 강군의 배경이 됐습니다. 당시 국군 85%가 무학이던 시절이었지요. 우리 해병대 장병들은 미 해병대와 조금씩은 영어로 대화가 통해, 한·미 연합작전을 함께 하면서 미 해병의 전술교리를 빨리 체득한 것이 빠른 시일에 강군으로 성장한 동력이 됐습니다.”

 

1950년 8월 경남 창원군 진동리(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에서 부산을 압박하던 인민군 6·7사단을 한국 해병대가 독 안에 든 쥐처럼 섬멸한 ‘진동리지구 전투’에서 국군 최초로 해병대는 전 부대원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얻는다. 당시 한국 해병대와 처음 조우한 미 해병대는 “한국에도 이렇게 잘 싸우는 해병대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고 술회할 정도였다. 미 해병1사단장을 지낸 스미스 장군은 “진동리에서 한국 해병대를 만난 순간, 우리는 신이 지상에 내려온 것 같은 기적을 체험했다”고 회고했다. 공 전 사령관은 “미 해병대를 만난 것은 우리에게 천운이며 하나님의 은총이었다”고 회고했다.

 

“진동리 전투에서 당시 김성은 부대장은 탁월한 전투력, 뜨거운 전우애, 명령에 철저히 따르는 엄정한 군기, 필승의 신념을 지닌 미 해병대를 본받고자 했고 그렇게 해서 무적 해병의 신화가 탄생했습니다.”

 

이 진동리 전투에서 ‘귀신 잡는 해병’의 애칭이 생겨난다.

 

“대부분의 해병은 진동리 전투에 이은 통영상륙작전을 계기로 뉴욕 해럴드 트리뷴지의 종군기자 마거릿 히긴스가 쓴 ‘귀신 잡는 해병(They might capture even the devil)’이라는 기사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하지만 이 기사는 입증되지 않은 반면, 진동리 전투에서 가진 UPI 인터뷰 타전은 기록으로 보관돼 있습니다. 이때부터 귀신 잡는 해병 닉네임이 잉태됐습니다.”

 

당시 맥아더 극동군 사령관은 진동리에서 한국 해병대가 인민군을 격파했다는 얘기에 대해 반신반의하다가 극동군사령부 내 유일한 여자 종군기자를 미 해병대 임시여단장 에드워드 크레이그 준장과 함께 현지에 보내고 나서야 사실임을 확인, 해병대에 큰 신뢰를 갖게 된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무적 해병의 신화는 그렇게 시작됐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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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일보, 인터뷰=정충신 부장대우(정치부) csjung@munhwa.com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4081301033523026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