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이후 장군⑥공정식] 도솔산전투 영웅···베트남전서 귀신잡는 영원한 해병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마산이 고향인 공정식은 손원일이 창설한 해방병단에 들어가 1946년 해군사관학교 1기생으로 임관해 신현준, 김성은 등과 함께 해병대 창설의 밑거름이 되었다. 공정식은 ‘해군과 해병대는 같은 뿌리’이며 ‘한·미해병대는 형제’라는 연대의식이 투철하였다.
8월 공세, 진동리전투에서 마산을 구한 해병대는 1951년 6월 도솔산지구 전투로 무적해병의 기개를 유감없이 과시하였다. 도솔산은 중부전선의 철의 삼각지대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여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고지였다. 도솔산지구 전투는 최초 미 해병1사단에 의하여 시작되었으나 곧 피해가 속출하여 전투손실이 1111명에 달하자 공격을 한국 해병대에 맡기기로 결정하였다.
6월 3일 작전명령을 받은 제1연대장 김대식 대령은 “미 해병대가 하지 못한 일을 우리가 기필코 해냄으로써 한국 해병의 기개를 보여주자”며 결사의 각오와 불퇴의 정신으로 연대를 이끌었다. 공정식은 공격 목표가 많은 좌 일선 공격을 담당하여 야간공격으로 하나씩 목표를 탈취해나가 6월 23일 최후의 고지를 확보, 도솔산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백절불굴의 인내로 쟁취된 그 승리의 결정체는 실로 구국의 정화가 아닐 수 없다”고 치하하고 無敵海兵(무적해병)이란 휘호를 내렸다.
군인으로서 공정식의 진가를 보여주는 것은 ‘사투리 통신’이다. 당시 해병대는 SCR-300무전기를 쓰고 있었는데 혼전상황에서 어쩌다가 무전기가 적의 수중에 넘어가 버려 통신내용을 적이 환히 듣게 되었다. 공정식은 태평양전쟁 때 미 해병대가 인디언 나바호 언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일본군은 영어는 해독하지만 인디아 언어까지 해독하지는 못했다.
1942년 나바호 암호병 29명이 미 해병사단에 배치된 것을 시작으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540명의 나바호 인디안이 미 해병대에 근무했는데 이 가운데 400명이 암호병이었다. 태평양전사를 즐겨 읽은 공정식은 이 사투리 통신에 착안하였다. 해병 제1연대에는 제주도 출신이 많으니 통신병들끼리 자기 고장 사투리로 교신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의 사투리는 육지 출신들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적이 들어봤자 뜻을 모를 터이니 안심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해병대에 제주도 출신이 많았던 것은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제주도에서 해병 3, 4기생 3천여명을 모집한 때문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오현고, 한림고 출신이어서 두뇌가 우수했고 충성심과 협동심이 왕성했다. 지원자들도 많아 해병대는 17대1의 경쟁률로 뽑았다. 4·3사건은 제주도민의 독특한 유대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 한 원인이었다.
월남 참전부대를 결정하는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준비에 얼마나 걸리겠냐고 묻자 김용배 육군참모총장은 “6개월은 걸리겠다”고 답하였다. 공정식 해병대사령관은 “해병대는 ‘1개 대대전투단은 24시간, 1개 연대전투단은 48시간이면 출동할 수 있습니다. 국가전략기동대로서 해병대는 언제고 준비되어 있습니다”’고 답변했다. 이에 박정희는 청룡부대를 전군의 선두로서 월남에 파병하였다. 청룡부대의 짜빈동전투는 맹호부대의 두코전투와 더불어 파월 한국군의 진가를 세계에 알린 전투였다.
공정식 장군은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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