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6대사령관 공정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4) - 구축함 실습

머린코341(mc341) 2014. 9. 14. 18:45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4) - 구축함 실습

 
우리가 재학 중 미 해군 구축함에서 실습을 통해 학교에서 배운 이론과 실제를 즉시 몸에 익히게 된 것도 손제독의 원려와 배려 덕분이었다. 우리는 1946년 8월부터 미 해군 구축함에서 실습을 하게 됐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직후여서 미 해군은 그때까지 한국 해역에 머무르면서 38선 이남 해역을 경비 중이었는데 손제독이 이 틈을 이용한 것이다. 미 해군으로서도 유능한 보조원과 통역요원의 승선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부산항에서 조별로 배정된 구축함에 올랐을 때 일제히 소동이 벌어졌다. 우리가 신고 있던 일본군 군화 바닥에 박혀 있던 쇠못(징)이 문제였다. 날카로운 쇳소리의 출처가 우리의 군화라는 것을 알게 된 미군 장병들은 기겁을 했다. 갑판 바닥의 페인트가 벗겨지는 것은 물론 날카로운 금속성 소음 공해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싯다운! 에브리 코리언 싯다운!”
 
그들은 우리를 모두 앉히고 어디선가 펜치 같은 공구를 들고 나왔다. 당장 구두 징을 뽑으라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대표 신사라는 자부심으로 목에 힘이 들어가 있던 생도들이 갑판 바닥에 주저앉아 구두 징을 뽑아내느라 땀을 흘리던 기억은 다시 되살리기 싫은 악몽이다.
 

구축함 실습 
 
배멀미 시달리다 완전 탈진
 
구축함 실습생활에서 부끄럽지만 생각나는 일은 배멀미에 시달린 기억이다. 바다 사나이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그 정도를 이겨내지 못하고 그 난리를 쳤으니,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뜨겁다.

그러나 어쩌랴.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처하면 예기치 않은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사람 몸의 생리가 아닌가. 연안을 항해할 때는 배가 파도에 흔들리는 것이 재미있기도 했다. 그러나 큰 바다에 나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좌우로 흔들리는 롤링(Rolling)과 아래위로 흔들리는 피칭(Pitching)이 동시에 일어나면 처음 겪는 사람은 예외 없이 주저앉게 된다. 어지럼증을 견디지 못해 난간을 붙잡고 이겨보려고 애쓰다가 속에 있는 것을 다 내놓게 되면 완전히 탈진하게 된다. 생지옥이 따로 없다. 한 순간만이라도 그 괴로운 어지럼증에서 벗어 나고 싶어진다.

“저기, 저기에 좀 내려주세요.”
 
동기생 몇 명이 선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바위섬을 가리키며 미군 장교에게 애원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콧방귀였다. 어디 한번 당해보라는 듯이. 뱃속이 완전히 비어 허기에 지쳤는데도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들큼한 빵과 닝닝한 스프는 쳐다보기도 싫었다. 머릿속에는 오직 고추장과 김치 국물만 어른거렸다. 그러나 그런 게 있을 수 없다.
 
배안은 작은 미국이었다. 매점이 있어 응급 약이라도 사 먹어 봤으면 했지만, 수중엔 달러가 한 푼도 없었다. 울렁이는 속을 비우려고 화장실에 들어가 봐도 허사였다. 양변기에 익숙하지 않아 일을 보아도 개운하지가 않았다.

그렇게 한 차례 호된 ‘신고 의식’을 치르고 나서부터는 누구나 고추장 같은 비상식품을 숨겨 배를 타게 되었다. 그게 늘 말썽이었다. 사물함 깊숙이 숨겨 두고 필요할 때 조금씩 꺼내 먹으며 속을 달래는 것까지는 좋다. 그런데 날씨가 더워지면서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함장은 부하들에게 우리 생도들 주머니를 뒤지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주머니 속에 그걸 넣고 다닐 사람은 없었다. 의심스러운 물건이 발견되지 않자 미군 장교들은 우리의 옷을 모두 벗기고 샅샅이 뒤졌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미군이 아니었다. 그들도 고약한 냄새를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침실을 모두 뒤진 끝에 사물함 깊숙이, 또는 백 속에 감춰 뒀던 고추장 항아리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것들은 모두 압수돼 바다에 버려졌다. 아깝지만 규칙이 그러니 도리 없는 일이었다.

어깨가 으쓱해지는 자랑스러운 순간도 있었다. 1946년 12월 어느 날이었다. 구축함이 잠시 부산항에 입항한 틈을 타 손원일 제독이 감사의 인사를 하려고 배에 올랐다. 손제독을 반가이 맞은 함장은 뜻밖에 우리를 칭찬했다는 것이다.

“한국 사관생도들은 배우려는 열의가 대단합니다. 우리가 몇 년을 두고 익힌 것을 한국 생도들은 몇 달 사이에 터득해 버렸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웰 던, 웰 던!”(Well done, Well done)을 연발하더라는 것이다. 그 소문은 모든 구축함에 쫙 퍼졌다. 그때부터는 우리를 대하는 미군 장병의 태도도 달라보였다. 조함이나 함 운영 실기를 빨리 익혀 한 사람의 장교 몫을 하게 된 것에 감명을 받은 모양이었다.
 
사실 우리는 실기뿐만 아니라 수많은 함정용어와 작전 이론, 그리고 영어회화에 이르기까지 임관 후 닥치게 될 실제에 대비하려는 생각으로 공부도 열심히 했다.

 

美 청탁 거부한 해사 신화
 
원칙과 질서를 존중하는 해군사관학교 교풍이 미 군정장관 청탁을 물리친 일화는 지금 회상해 봐도 통쾌하다. 정부와 다른 기관 단체들이 모두 그랬다면 한국은 지금쯤 존경받는 선진국이 돼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임관 후 모교에 근무할 때 겪은 일이지만 너무 자랑스러워 여기에 인용한다. 1947년 11월 군정장관 러치 장군이 지병으로 임종하면서, 수하의 한국 청년을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게 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며칠 뒤 통위부(군정청 시대 국방부) 고문 테릴 프라이스 대령이 학교에 찾아와 김일병 교장에게 그 뜻을 전했다.
 
“중도에 생도를 받을 수 없으니 내년에 다시 오시면 어떻겠습니까.”

김교장의 완곡한 거절에 머쓱했던 프라이스 대령은 며칠 뒤 다시 찾아와 같은 얘기를 꺼냈다. 그러자 김교장은 말없이 자신의 책상 위에 모자를 올려놓았다.
 
“먼저 나를 해임하고 그 학생을 넣든지 아니면 내년에 입학시험을 쳐 들어오게 하든지 양자택일하기 바랍니다.”
 
한동안 말이 없던 프라이스 대령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한국 해군사관학교가 이런 곳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이런 경위로 군정장관 부탁도 들어주지 않는 해군사관학교 신화가 이루어졌다. 군정장관이란 1945년 광복의 날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날까지 3년 동안 한국의 행정을 대행한 임시정부 수반이었다. 지금의 대통령에 못지않은 권력을 휘두른 권력자의 청탁을 보기 좋게 물리친 쾌거였다.
 
 

출처 : 해사1기, 예비역 해병중장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