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5) - 군번 80125, 해군 소위 임관
우리 1기생은 구축함 실습 중 임관돼 임관기념 사진이 없다. 졸업식도 2기생 입교식 날 더부살이처럼 가졌다. 60년이 넘은 해군사관학교 역사상 이런 일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럴 만한 사유가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걸 탓하는 사람은 없다. 1기생 임관일은 1946년 12월 15일이다. 재학 중에, 그것도 승선실습을 하는 동안 그래야 할 까닭은 몰랐지만 일찍 임관한 것을 싫어할 이유는 없었다.
승선실습 중 임관, 해사 역사상 처음
미7함대 실습 중 해군장교로 임관
1946년 9월 1일 국방경비대 군사영어학교(육사 전신) 일부 재학생과 졸업생 22명이 해방병단으로 전과해 진해로 내려왔다.
해군에도 영어에 능통한 요원이 있어야 한다는 군정청 방침에 따라 해군사관학교가 1개월 남짓 그들에게 해군 기본교육을 시키게 됐다. 교육이 끝나 임관시킬 때가 되자 손원일 제독은 잠시 혼란을 겪었고, 고민 끝에 그는 동시 임관 방침을 굳힌다.
파벌의식을 없애려면 생도 1기생과 같이 임관시키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 임관이 된 것이다.
행정 실무자들 사이에 우리의 군번을 부여하는 문제 때문에 많은 곡절이 있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군번 같은 데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실습훈련에 정신을 쏟느라고 그럴 겨를도 없었다.
내 군번은 해군 80125번이다.
내 앞 군번 124명은 모두 해방병단 출신이고, 사관학교 동기생 가운데서는 내 군번이 제일 빠르다. 임관된 동기생은 모두 61명이었다. 편입생까지 합쳐 113명이었던 1기생 가운데 50% 조금 넘는 생도들만 임관된 것은 해군사관학교 운영의 엄격성을 말해 준다. 물론 개인 사정으로 자퇴한 사람도 있지만 의지 부족과 체력 미달이 중도탈락의 제일 큰 원인이었다.
우리가 구축함에서 내려 학교로 돌아온 것은 1947년 1월이었다. 실습 중 임관된 것이 좋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다. 임관과 동시에 근무지가 결정돼 하나 둘 떠날 채비를 서두르는데 졸업식도 못하고 갈 수는 없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몇몇 동기생들이 김일병 교장을 찾아가 졸업식을 건의하자 2기생 입교식 날로 절충이 됐다. 후배들이 들어오는 날 졸업식을 올린 첫 사례는 그렇게 생겨났다.
졸업식은 1947년 2월 7일 진해시 앵곡동 새 교사에서 근사하게 거행됐다. 무엇보다 캠퍼스가 멋져 다들 좋아했다. 손제독의 오랜 노력으로 옛 고등상선학교 교사로 이전한 것이다. 졸업식에는 대통령 격인 러치 군정장관을 비롯해 국방부장관 격의 유동열 통위부장도 참석해 어깨가 으쓱했던 기억이 새롭다.
훈육관 시절, 좌익사상 생도 많아 훈육 애먹어
나는 김광옥·김영관·김윤근·이기종과 함께 모교에 남게 됐다. 훈육관이라는 직책이었다. 2기생들 생활을 지도하는 임무였다.
훈육관 시절의 기억 가운데는 좌익계열 학생들 때문에 애먹은 일이 제일 선연하다.
당시 군정청은 사상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해 좌익 활동을 단속하지 않았다. 그래서 좀 배웠다는 사람들 사이에는 좌익사상이 유행병처럼 번져 갔다. 이런 방침과 분위기를 이용한 북한은 남로당에 지령을 내려 갖가지 파괴·납치·교란전술을 자행했다.
그런 사회 분위기 탓에 사관생도들 가운데도 좌익사상을 가진 사람이 많아 훈육에 애를 먹었다. 사상문제로 말썽을 일으킨 사람들은 예외 없이 엄격한 처벌을 받았다. 2기생이 86명 입학해 48명이 졸업한 것은 그런 사정과도 연관이 있다.
해밀턴 쇼 교관과의 추억도 잊을 수 없다.
평양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우리말이 유창했다. 한번은 그와 함께 짚을 타고 가는데 정문 위병이 “그 코쟁이 코 한번 더럽게 크네”하고 뒷말을 했다. 쇼가 즉시 차를 돌려 위병에게 다가가 “코가 커서 미안해요”하고 능청을 떨던 장면이 어제 일 같이 떠오른다.
나중에 내가 인천에 상륙한 디 김종기 동기생을 만나 보려고 부평에 갔을 때 미 해병1사단 통역관으로 다시 온 그와 재회했다.
해사 교가 탄생 일화
지난 2004년 4월 14일 생전의 신현준 초대 사령관님이
전 재산을 해병대에 기탁하는 자리에 홍은혜 여사가 함께 했다.
교가가 있어야겠다. 사관생도들을 하나로 묶어 세울 멋진 노래가 있어야 하겠다.
손원일 제독의 바통을 받아 제2대 해군사관학교 교장에 취임한 김일병 중위는 생도들에게 애교심을 불어 넣어 줄 교가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1947년 1월 노산 이은상 선생에게 교가 작사를 의뢰했다. 진해에서 가까운 마산 출신이고 저명한 시조시인이며, 이순신 연구가로도 이름을 날린 그보다 적임자는 없다고 생각했다.
가사가 완성되자 중앙 일간신문에 작곡공모 공고를 내고, 각 대학과 음악단체마다 협조공문을 보냈다.
신문을 보고 이를 안 손제독 부인 홍은혜 여사는 남편 몰래 김교장에게 노산 선생의 가사를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그걸 적어 놓고 한 달이나 걸려 곡을 완성한 홍여사도 작품모집 기일에 맞춰 곡을 제출했다.
김교장에게서 응모현황을 보고받고 아내의 응모사실을 안 손제독은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 아내의 작품은 빼라고 지시했다.
“교장님 그건 곤란합니다. 사모님도 음악을 전공하신 분이고 지금 생도들이 즐겨 부르는 <바다로 가자>를 작곡한 훌륭한 음악가이십니다. 정식으로 응모한 작품을 심사도 안 해보고 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손제독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정당하게 응모된 작품을 아내의 것이라는 이유로 제척하는 것이 월권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심사는 해사2기생들이 모여앉아 일일이 곡을 노래로 불러보고 투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렇게 뽑힌 것이 홍여사 작품이었다.
(1절) 천자봉 구름 속에 높이 솟았고
옥포의 푸른 물결 넘실거리네
스승의 채찍 아래 자라는 우리
씩씩한 배달 혼을 기르오리다
(2절) 사자같이 우러나는 호령소리에
파도같이 밀려오는 우리 발걸음
사나이 굳은 뜻을 가슴에 안고
정의의 새 나라 만드오리다
(3절) 청년의 피가 끓는 대한의 아들
두 손을 높이 들고 맹세하노라
거룩한 충무공의 뒤를 받들어
조국의 한바다를 지키오리다
(후렴)만세 만세 만세
해군사관학교 만세
길이길이 빛나거라
해군사관학교
이 노래는 그해 7월 2기생들에 의해 처음 불려졌다. 홍여사는 특별히 정이 들었던 우리 1기생들을 위해 <해사 1기생 가>도 작곡해 줬다.
출처 : 해사1기, 예비역 해병중장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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