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7) - 여순반란사건과 나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 전남 여수·순천에서 일어난 반란사건은 우리 현대사의 고난을 예고한 불행이었다. 육군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이 사건은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나는 첫 보직인 모교 훈육관 근무를 마치고 1948년에는 JMS 302(통영)정 정장으로 근무 중이었다. 처음 부여된 임무는 맥아더 라인 경비였다. 맥아더 라인이란 1945년 9월 미 극동군사령부가 한국·일본 근해에 설치한 해상 경계선으로 한국 측 경계선 안에서의 일본어선 조업과 밀수 행위가 금지됐다.
그러나 일본 어선들은 경계선을 넘어 동해와 제주도 남쪽의 우리 어장을 자주 침범했는데 해경이 없던 때여서 해군에 그 임무가 부여됐다. 그 임무를 수행하던 중 처음 제주도에서 4·3사건이 일어나 302정은 공비의 해상침투를 봉쇄하는 작전에 투입됐다.
4·3사건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다시 맥아더 라인 경비근무를 하고 있던 1948년 10월 19일이었다. 제주도 남쪽 해상을 침범한 일본어선 2척을 나포해 세관에 인계하기 위해 여수항에 들어간 나는 업무를 마치고 승조원들을 모두 외출시켰다. 잔무를 처리한 뒤 저녁 때가 돼 평소 알고 지내 온 안과 병원장을 불러 내 술을 한잔 하고 있었다.
신분 밝혔어도 반란군에 연행당해
밤 11시쯤 됐을 때 밖에서 총소리가 들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여러 발을 연발로 쏘는 소리에 놀라 일어나 여수경찰서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해군 302정 정장입니다. 지금 밖에서 총소리가 들리는데 무슨 일이오?”
수화기 저쪽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다가 ‘탕’하는 총성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 배로 돌아가려고 술집을 나섰다. 배가 정박된 곳까지는 불과 500m였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데 어둠 속에서 “손 들엇!” 소리와 함께 무장군인 2명이 나타났다.
검문이었다. 훈련 중이라 했다. 해군 302정 정장 공정식 대위라고 신분을 밝히자 통과시켜 줬다. 다시 얼마를 갔을까. 또 검문을 당했다.
“난 해군 302정 정장이란 말이야!”
화를 꾹 참고 신분을 밝혔는데도 그들은 손을 들고 서 있으라고 했다. 총을 겨누고 손을 들고 서 있게 하는 데 화가 나서 검문병사의 뺨을 후려갈겼다. 뺨 맞은 병사는 당장 쏘아버릴 기세로 씩씩거리더니 나를 북항 파출소로 연행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끔찍한 일이었다. 파출소 안은 피범벅이었다. 여기저기 총을 맞은 경찰관·장교 시체가 널부러져 있었다. 무장 군인들은 분주히 파출소를 드나들면서 공포를 쏘아댔다. 그들이 떠들어대는 말로 보아 반란이 분명했다. 피가 흥건히 고인 파출소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난감했다.
자정이 되자 그때까지 파출소에 있던 군인들이 나가고 다른 군인들이 들어왔다. 근무교대인 모양이었다.
“아니 정장님 아니십니까? 공대위님이 왜 여기 계십니까?”
그들 가운데 하나가 나를 알아보며 반색을 했다. 여수 주둔 14연대 소속 하사였던 그는 남항부두 정부미 창고 경비를 설 때 곧잘 우리 함정에서 식사를 제공받아 나와 302정 병사들과 친분이 있었다.
그는 지금 분위기가 심각하니 배까지 호위해 주겠다면서 앞장서 줬다. 그래서 나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뒷날 생명의 은인인 그를 찾아보려고 임시 포로수용소에 가 봤지만 허사였다)
302함 정장으로 1948년 10월 20일 여순반란 진압작전에 참가하였다.
여순 발란사건 최초 보고
나는 승선과 동시에 출항을 명령해 항외로 나가면서 해군본부에 급보를 타전했다.
‘여수읍이 폭도에 점령당함. 경찰서가 방화되고 읍내는 총성으로 충만함’.
서울에서는 내가 보고하기 전까지 여수에서 그런 폭동이 일어난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고 한다. 모든 관공서와 기관 단체가 점령당했기 때문에 다른 채널이 없었던 것이다.
1949년 10월 20일 새벽 5시 박옥규 작전국장을 통해 내 보고를 받은 손원일 해군총참모장은
“흔히 있는 소규모 소요가 아닌지 재확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매스미디어와 통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못한 시대였다. 국방부도 육군도 처음 듣는 사실이어서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외항에서 여수 내항으로 천천히 항해하면서 여수 시내의 상황을 체크하고 있는데, 남항 부두에서 누군가 손을 흔들어 신호하는 사람이 희미하게 보였다. 반란군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보트를 내려 그를 데려오도록 지시했다.
“아니 오중령님 아니십니까.”
보트에서 배로 올라선 사람은 광주에 주둔 중이던 제5연대 참모장 오덕준 중령과 14연대장으로 갓 부임한 박승훈 중령이었다. 그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맙다는 말을 연발했다. 오중령은 4·3사건 진압 지원에 투입될 14연대 병력 파견을 점검하기 위해 출장왔다가 부대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부두에 숨어 있었다고 했다.
이 상황도 즉시 보고됐다. 본부로부터 두 사람을 부산으로 이송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다음날인 21일에는 임시 정대를 편성해 진압작전에 참가하라는 손제독의 명령이 하달되었으나 이는 실행되자 않아 302정 단독으로 해상작전을 수행하였다. 반란군의 해상탈출 저지도 중요한 임무였다.
계엄령 선포되고 경고문 발표
같은 날 육군에서도 반군토벌전투사령부가 설치됐다. 22일에는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이승만 대통령의 경고문이 발표됐다.
302정에는 37㎜ 포가 장착돼 있었다. 그때는 포가 부족해 작전에 나가는 함정에만 달아 줬다. 이 포는 철갑탄이어서 목표물에 맞아도 폭발하지 않고 관통하기만 하는 대전차포다. 불법 어로나 밀수선을 침몰시키지 않고 나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도 소리는 다른 포와 다를 것 없었다. 그 소리만은 제값을 할 수 있었다.
부산에서 돌아왔을 때 나에게는 새로운 임무가 부여됐다. 부산에 있는 5연대 1대대 병력수송을 지휘하라는 것이었다. (1대대장은 훗날 ‘백두산 호랑이’로 유명해진 김종원 대위였다) 교통부가 운용하던 LST에 대대 병력을 태워 여수에 상륙시키라는 것이었다.
반란군이 장악한 적지에 LST를 상륙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반란군들의 집중사격을 뚫을 방도가 없었다. 토벌군에게 쫓긴 반란군이 남항 부두에 집결해 해상탈출을 시도하면서 그 와중에 인민재판을 하고 있었다. 부두에는 붉은 깃발이 나부끼고 붉은 완장을 찬 사람들이 설쳐대면서 ‘반동분자’의 처형을 선동하고 있었다.
나는 억울하게 죽어갈 선량한 시민을 한 사람이라도 구출하기 위해 즉각 작전을 개시했다.
“부두로 진입하면서 37㎜ 포를 쏘라”고 명령했다.
엄청난 포성에 놀란 반란군은 혼비백산했으나 전열을 가다듬어 소총을 쏘며 저항해 왔다. 날이 저물어 일단 퇴각했다가 다음 날에야 격퇴했다. 그 사이 LST는 무사히 남항 부두에 상륙할 수 있었다.
이 작전에서 해군 전사자 제1호가 발생한 것을 나는 잊지 못한다. 302정 갑판에서 상륙군을 통제하고 있던 기관장 석기찬 병조장이 적탄을 맞은 것이다. 훗날 나는 2계급 특진을 상신해 그를 소위로 추서시켰다.
이 전투는 우리 해군 사상 초보적인 상륙작전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작전이 끝난 뒤 나는 전투 경과를 보고하면서 해상전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해병대가 꼭 있어야겠다고 건의했다. 보고를 받은 손제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 줬다.
302정의 대전차포
몇 해 전 어떤 TV 방송에 여순사건 당시 해군에서 함포를 쏘아 양민 1000여 명을 학살했다는 내용이 방송됐다. 너무 어이없는 일이었다. 나는 즉시 해병대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당시 우리 함정에는 함포가 아니라 대전차포밖에 장착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고 항의하도록 요청했다.
전차를 공격하는 37㎜ 포는 명중돼도 목표물을 관통만 할뿐 폭발이 일어나지 않아 인명살상 효과가 없는 포다. 그런 포로 어떻게 1000명을 학살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런 황당한 얘기가 방송에 나갔는지 이해가 안 간다.
작전이 끝난 뒤 공격무기가 빈약해 작전에 차질이 있었다는 내 전투보고서가 그 증거가 될 것이다. 나는 직속상관 신현준 정대사령관에게 올린 종합보고서에 다음과 같은 사항을 적시했다.
1. 방어무기가 불충분하여 근접교전에 불리하였음.
2. 공격무기가 빈약하여 적을 철저하게 제압하기가 어려웠음.
3. 통신연락 시 해군 본부와 기지, 함정의 주파수가 동일하여 상호 통신에 지장이 있었음.
4. 해군은 해상작전이 주목적이지만, 이번과 같은 사태에 상륙작전을 할 수 있는 해병대 창설이 절실히 요청됨.
이 보고서를 받은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은 신현준 중령에게 해병대 창설을 지시했고 그 결과 1949년 4월 15일 해병대는 380며의 병력으로 창설되었다. 신현준 중령이 해병대 창설을 정식으로 건의했고 이미 그 전에 손원일 해군 참모총장이 임석한 자리에서 내가 작전 결과를 보고하면서 해병대 창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결과론이지만, 나는 여순사건이 우리 군의 사상 무장을 강화하고 군내 좌익세력을 척결하는 숙군(肅軍)의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전화위복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군내에는 좌익분자들이 우글우글했다. 육군에서는 대대 병력이 통째로 월북하는 사건이 잇달았고, 해군에도 남로당 비밀요원이 많아 함정 납북사건이 빈발했다. 내가 지휘하는 함정이 납북 직전에 위기를 모면한 일도 있었다.
만일 그런 조치 없이 6·25가 일어났다면 어떻게 됐겠는가. 그 많은 좌익분자가 군내에 남아 있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출처 : 해사1기, 예비역 해병중장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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