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의 기적] 1. 대한민국을 한문으로 쓰시오.
“대한민국을 한문으로 쓰시오."
해병대 입대시험에서 치른 첫 문항이었다. 나는 해병대 지원자들과 함께 중학교 운동장에서 신문지를 깔고 앉아 치른 시험에서 만점을 자신하고 답안지를 제출했다. 결과는 보기 좋게 낙방이었다. 입대경쟁이 5대1이었지만 낙방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해병대를 지원한 이유는 학업을 지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사업을 실패하여 여동생이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있는 현실에서 장남이라는 이유로 대학을 계속 다니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내가 다닌 대학은 공주에 있었고 나는 하숙을 했다. 공주는 작은 도시로 대학이 2개나 있어서 나처럼 객지에서 와서 학교를 다니는 사람은 가정교사와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찾는 것은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나는 하숙비를 벌려고 공사판을 찾아다니기도 했지만 공주는 작은 도시이고 소비도시여서 일거리가 없었다. 그래서 해병대 입대를 결심하게 되었다. 청룡부대로 월남전에 참전하면 월급을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운이 좋아 살아서 돌아오면 학비 정도는 벌 수 있다는 것이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군 생활을 통해서 인내심을 단련시키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해병대는 훈련이 세다고 하므로 복무기간 동안에 강인한 정신과 인내력을 키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또 복무기간이 짧은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 당시 육군은 30개월을 복무했지만 해병대는 24개월 만에 제대를 했기 때문에 어차피 치러야 할 군복무라면 해병대에 입대하여 복무기간을 단축하는 것이 이익이라는 생각도 했다.
나는 신체검사를 받고 보충역으로 편입되었다. 보충역을 받은 사람 중에는 운이 좋아서 입대를 안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1년 내에 입영통지서가 발부될 예정이어서 해병대 지원을 결심하게 되었다.
해병대 입대시험은 매월마다 있었다. 나는 지원서를 다시 제출했고 자신만만하게 시험을 치렀다. 그러나 또 낙방이었다. 내가 입대시험을 두 번이나 치르자 안면 있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들 중에는 7번이나 낙방한 사람도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물었다.
“알 수가 없어. 왜 떨어지는지.”
“이렇게 막혀서야 원, 뇌물을 써야지 뇌물을 말이야. 쯧쯧”
“뇌물이라고? 입대하는 데도 돈을 써야 한단 말이야?”
물정에 어두운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시험은 형식일 뿐이야. 자네는 지금 세상이 돈을 쓰지 않으면 군대도 못 가는 세상이라는 것도 모르는가?”
“그렇다면 자네는 왜 합격을 못하나? 돈을 안 써서 그런가?”
“돈을 많이 쓴 사람 순서대로 합격을 시키기 때문이야. 나는 만원밖에 돈을 쓰지 않았거든.”
“만원이이라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에게 만원은 큰 돈이었다. 내가 노동판에서 받은 하루 일당이 400원이었으니 군대를 가기 위해서는 1개월 동안 뼈 빠지게 일한 돈을 병무청 직원에게 뇌물로 바쳐야 하니 내가 놀란 것은 당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렇게까지 해서 군대를 가야 하는 현실에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병대 입대는 조 중사와 신 수병 2명이 담당하고 있었다. 나는 조 중사를 만나서 입대를 지원하게 된 이유를 말하면서 사정했지만 조 중사는 맨 입으로 사정하는 나를 묵살했다. 3번째 시험에서 또 낙방했다.
시험에서 한 번도 낙방한 적이 없던 내가 세 번을 거푸 낙방했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제야 나는 맨 입으로는 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신 수병을 찍었다. 조 중사는 나이가 많고 직업 군인이어서 돈을 많이 밝히지만 신 수병은 젊은 사람이고 사병이어서 때가 덜 묻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신 수병에게 3천원을 뇌물로 썼다. 3천원이 약효가 되어 나는 4번째 시험에서 합격하게 되었다.
내가 해병대를 입대한 그 당시는 모두가 어렵게 지낸 때였다. 박정희 정부가 경제부흥을 목표로 삼고 있었지만 경제개발의 낙과가 국민에게 돌아오게 된 것은 많은 세월이 지나서였다.
내가 대전에서 입대열차를 타야 할 날자는 공교롭게도 12월 25일 0시 50분, 대전발 0시 50분이라는 가요의 그 열차였다. 사람들은 모두 크리스마스 기분에 취하고 있었지만 나는 열차의 군용칸에 몸을 실어야 했다.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배웅을 받고 대전역에 도착한 것은 12월 24일 저녁이었다. 낯선 도시에서 내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크리스마스 캐롤과 사람으로 뒤범벅이 된 거리를 정처 없이 배회했다. 나의 눈에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차 있는 쌍쌍족이 모두 거슬려 보였다.
(왜 나는 사랑을 하지도 못하는 바보일까?)
내 밑에는 여동생이 3명이나 줄줄이 있었다. 여동생들은 여자를 사귀지 못하는 오빠를 위해 자기들 친구를 소개하는 일에 열심이었지만 나는 동생 친구들이 모두 동생으로 생각될 뿐이었다. 맏동생은 2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데도 나는 동생 친구들이 모두 동생으로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동생 친구가 아닌 때는 달랐다. 동생 친구들에게는 말도 잘 하고 스스럼도 없지만 상대방을 이성으로 생각하기만 하면 그 순간부터 가슴이 떨리고, 얼굴이 붉어져 입에서 말이 나오지도 않고, 벌벌 떨려서 오금이 저리기도 하고,
어쩌다가 여자의 손이 몸에 닿기만 하면 두드러기가 생기기도 했다. 여자를 사람으로 대할 때는 아무렇지 않다가 이성으로 대하기만 하면 태도가 나도 모르게 180도로 바뀌곤 했다.
그것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깊은 내면에서는 여자를 사람으로는 상대하게 하지만 이성으로는 상대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통제하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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