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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승전 70주년, 서방불참 속 개방이후 최대 군사퍼레이드

머린코341(mc341) 2015. 5. 8. 23:10

러 승전 70주년, 서방불참 속 개방이후 최대 군사퍼레이드 (연합뉴스, 2015.05.08)

 

러시아에서 2차대전은 '大조국 전쟁'…승전 자부심 '각별'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나치군에 치명타…전쟁중 러시아인 2천400만명 희생

 

(모스크바=연합뉴스) 유철종 특파원 = 러시아가 9일(현지시간) 모스크바에서 제2차 세계대전 승전 70주년 기념식을 성대하게 치른다.

 

러시아는 올해 붉은광장에서 펼쳐질 승전 기념 군사 퍼레이드에서 개방 이후 최대 규모의 무기를 선보일 예정이다. 그동안 개발한 신무기도 처음으로 공개한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서방과의 대결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에 막강한 군사력을 과시함으로써 옛 소련 시절 강대국의 면모를 회복해 가고 있는 러시아가 결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님을 느끼게 하겠다는 계산으로 보인다.

 

이번 승전 행사엔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러시아의 개입을 이유로 서방국 정상들이 대부분 참석하지 않는다. 러시아가 초청장을 보낸 68개국 정상 가운데 27개국 지도자만이 참석한다.

 

지난 2005년 60주년 기념행사 때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 등 53개국 정상들이 참석했던 것에 비하면 절반밖에 되지 않는 참석률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사태로 애국주의가 절정에 이른 러시아에서 느껴지는 축제 분위기는 역대 어느 기념행사 때보다 뜨겁다.

 

러시아가 제2차 세계대전 승전을 특별히 중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러시아 전승기념일 행진 리허설(AP=연합뉴스)

 

◇ 제2차 세계대전 vs 대(大) 조국전쟁

 

서방에선 흔히 제2차 세계대전(1939~45년)을 미국·영국·프랑스 등의 연합군과 나치 독일군의 전쟁으로 이해한다. 나치 독일이 패망한 것도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러시아의 생각은 상당히 다르다.

 

제2차 세계대전은 무엇보다 나치 독일에 맞선 소련의 전쟁이란 생각이 지배적이다. 승전의 주역도 러시아라고 생각한다.

 

러시아는 1812년 모스크바를 침공했던 나폴레옹과의 전쟁을 '조국전쟁', 나치 독일과의 전쟁을 '대(大) 조국전쟁'이라고 부르며 두 전쟁에서의 승리를 민족적 자부심의 근거로 삼고 있다.

 

군인뿐 아니라 온 국민이 힘을 합쳐 세계 제패를 꿈꾸던 정복자들을 무찌르고 나라를 지켜냈다는 의미다.

 

유럽 정복에 나선 나폴레옹 군대를 제정러시아 군대와 민중이 힘을 합쳐 무찔렀듯이 세계 지배를 꿈꾸던 히틀러의 강철 군대 역시 소련군과 온 국민이 엄청난 희생을 치러 가며 끝내 굴복시켰다는 민족적 긍지가 깔려 있는 용어다. 러시아가 두 번씩이나 세계를 정복자의 손아귀에서 구해 냈다는 자부심이다.

 

2차 대전에서 러시아(옛 소련)의 역할은 냉전 이데올로기로 말미암아 축소된 면이 적지 않다. 실제로 대부분 역사학자는 전쟁 승리에 소련군이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심지어 전쟁 과정에서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과 적잖은 갈등을 겪은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조차 "소련군이 파시스트 독일의 배를 갈랐다"고 소련의 공을 인정한 바 있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 전장은 독일군과 소련군이 1941년부터 맞붙은 동부전선이었다. 전체 전쟁을 통틀어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것도 동부전선이었다. 독일이 패전으로 가는 결정적 타격을 입은 것도 바로 이곳에서였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서부에 제2전선을 만들어 달라는 소련의 오랜 요청을 뒤늦게 받아들인 연합국이 독일 패망을 1년 정도 앞둔 44년 6월 실시한 작전이었다. 이 작전의 성공조차 동부전선에서 대규모 공세를 펼친 소련군이 나치군 전력의 상당 부분을 붙잡아 둔 것이 주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 노르망디 상륙작전 vs 스탈린그라드 전투

 

1939년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불을 붙인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총통은 단기간에 영국을 제외한 서유럽 대부분을 손아귀에 넣고 41년 6월 소련 침공에 나섰다.

 

불과 2년 전 체결한 스탈린과의 불가침협정을 무시한 기습 공격이었다. 불의의 공격을 당한 소련군은 우세한 독일군의 장비와 전력에 밀려 후퇴를 거듭했다. 5개월 만에 소련 서부 지역 대부분이 히틀러의 수중에 떨어졌고, 11월 독일군은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 근교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소련군의 항전도 거세졌다. 위기에 처한 조국을 살리자는 러시아 국민의 전통적인 애국심이 살아나 독일군이 점령한 각지에서 비정규군이 봉기해 게릴라전을 벌였다.

 

소련은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의 지휘하에 모스크바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치러 냈다. 제2도시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약 900일(1941년 9월~44년 1월) 간에 걸친 독일군의 포위 공격을 버텨냈다. 여기에 1942~43년에 벌어진 두 차례의 전투는 나치군에 치명타를 가했다.

 

소련군은 1942년 7월부터 6개월여 동안 계속된 남부 스탈린그라드(현 볼고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에 대승을 거두며 전쟁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 이 전투에서 나치군 22개 사단이 후방 부대와 고립된 채 괴멸당했다. 14만 7천여 명의 군인이 전사하고 나치군 제6군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원수를 비롯한 9만 1천여 명이 포로가 됐다.

 

히틀러의 동맹군이던 이탈리아·루마니아·헝가리 군인도 30만 명 이상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혀갔다. 이 전투의 승리를 얻고자 소련군은 47만 8천여 명의 목숨을 바쳐야 했다. 민간인도 4만여 명이 희생됐다.

 

소련군은 뒤이어 1943년 7월 서부 쿠르스크에서도 130만 명의 병력과 3천600여 대의 전차를 동원해 80만 병력에 3천여 대의 전차로 무장한 독일군을 대파했다. 역사가들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가 제2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고 평가한다.

 

소련은 서방 연합국의 직접적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자국민의 막대한 희생을 통해 이 같은 승리를 얻어냈다. 그 뒤 소련군은 맹렬한 반격을 펼쳐 나치군을 베를린까지 몰아냈다.

 

◇ 독일 600만명 vs 소련 2천400만명 희생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을 주로 상대한 것은 소련이라는 주장은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있기 전까지 미군과 영국군은 한 번에 독일군 10개 사단 이상을 맞아 싸운 일이 없었다. 

 

반면 소련군은 전쟁 기간 거의 내내 200개 이상의 독일 사단과 직접적으로 대결해야 했다. 독일군은 소련 침공 이후 줄곧 전체 병력의 3분의 2, 때론 4분의 3까지를 동부전선에 투입해 소련군과 맞섰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된 뒤에도 서부전선엔 불과 56만 명의 독일군이 투입된 반면 동부전선에선 450만 명의 독일군이 소련군을 상대했다.

 

당연히 소련의 희생이 클 수밖에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세계적으로 모두 6천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중 약 2천400만 명이 러시아인이었다. 일부에선 2천700만명이 희생됐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약 880만 명의 군인 전사자와 이보다 훨씬 더 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포함한 수치로 당시 러시아 인구의 12%에 해당한다.

 

우방인 미국과 영국(각각 약 400만~450만 명)은 물론이고 패전국인 독일(약 660만 명)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피해였다. 말 그대로 '몸을 던져 싸운' 전쟁이었다.

 

소련은 전후 인구조사 결과를 비밀에 부쳤다고 한다. 전쟁 전후의 인구 차이를 살펴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됐는지를 파악할 수 있고, 엄청난 희생자 수가 알려질 경우 스탈린의 정치적 위상이 흔들릴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인명뿐 아니라 물질적 피해도 엄청났다. 전체 국부의 약 3분의 1이 날아갔다. 1천700개의 도시와 600만 채의 건물, 3만여 개의 공장과 10만여 개의 농장이 파괴되는 손실을 봤다. 소련이 종전 뒤 연합국을 상대로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던 근거도 엄청난 인적·물적 희생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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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모스크바=연합뉴스) 유철종 특파원 cjyou@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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