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179기 황석영의 해병이야기 -
[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4. 땡볕 <188>
없다고 생각했던 귀신… 있다고 믿게 돼
아아, 어떻게 이런 기억들을 모두 말할 수 있을까.
목격자는 모든 도덕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세계에 널린 참상의 진실을 객관적으로 목격하기만 하는 일이 과연 가능한가.
나는 전장에서 현상계에는 귀신이 없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제대하여 민간인이 되었을 때,
그리고 먼 훗날 신천 학살사건에 관한 소설 '손님'을 쓸 때에
당시의 목격자들과 만나 회상을 취재하면서
귀신이 있다고 생각을 바꾸게 된다.
바로 '헛것'은 우리 자신의 내면에 잠재된 기억과 가책이면서
우리 스스로 일상에서 지워버린 또 다른 역사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추장이 부비 트랩에 날아갔다가 양팔이 떨어져 나가던 순간은
나도 부근에 엎드려 있어서 잘 기억하고 있다.
고통을 못 참고 내지르던 그의 비명 소리는
밀림을 뚫고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처음에는 목청이 찢어지는 듯하다가
차츰 나약한 울음소리로 변했다.
응급조치가 끝난 다음에 팔이나 다리가 떨어져 나간
다른 부상자들과 함께 그가 헬기에 실려간 뒤에
우리가 진입했던 마을에는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있었다면 병사들은 그 누구라도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산개하여 먼저 마을의 지형 지물에 따라
의지가 될만한 집이나 바위 또는 무너진 담벽을 목표 지점으로 정하여
달려가 확보하고 물결처럼 차례로 진입하는 식이었다.
마을 중앙에는 공회당 비슷하기도 하고
사원 같기도 한 기와를 올린 건물이 있었는데
차례로 접근하는 중에 분대장인 하사와 내가 제일 먼저 접근했다.
하사가 먼저 도착해서 입구를 커버하고
내가 어두컴컴한 실내로 돌입하면서
몇 발 사격하면서 안으로 뛰어들어가 엎드렸다.
나는 그 순간에 무슨 기계가 갑자기 가동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부웅,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이십여 평쯤 되어 보이던 실내가 새카만 어둠으로 변해 버렸다.
허공을 가득 채운 것들은 거대한 파리떼였다.
나는 양장점이며 전파사가 늘어선 중심가의
네온 불빛 아래서 택시를 기다리며 잠깐 서 있었다.
등 뒤에서 붉은 진열등이 똑같은 간격을 두고 한없이 깜박거렸다.
기다랗게 늘어나 괴물 거인이 된 내 몸집이
불이 꺼질 때마다 캄캄한 유리창 속에 떠올랐다.
붉은 불빛이 터지듯이 확 밝아지며
무수한 넓적다리가 내 몸 위로 솟아올랐다.
팔 없는 몸뚱이들,
빨강 노랑 은빛의 뱀 같은 머리를 단 그물 모양의 모가지들,
허공으로 치켜진 손목들,
팬티바람에 상반신이 잘려나간 하체들,
불이 탄다, 타오른다.
썩어 집채만큼 부풀어 오른 물소의 시체,
햇볕을 가리는 야자수 같은 거대한 파리떼의 그늘.
무전기가 말한다. '모조리 요리해라, 요리해.'
밀림 가운데 솟은 불기둥은 초원을 지나
사나흘 동안 흰 연기를 낸다.
자나깨나 흰 연기가 하늘가를 흐늘거리며 기어올라간다.
나는 본능적으로 불빛에서 멀어지기 위해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무대 장치 같은 불이 꺼졌다.
여자들의 스타킹과 속옷을 파는 상점이었다.
이것은 전장에서 돌아온 자의 상흔을 빌려서
베트남 전쟁의 본질을 말하려 했던
내 단편소설'낙타누깔'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이 작품은 70년대 초반에 여러 잡지사에서 퇴짜를 맞으면서
전전하다가 가까스로 검열로부터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림=민정기
출처 : 중앙일보,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ctg=12&Total_ID=1622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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