最終【(여섯째 글) 나는 5.16 革命軍 先鋒部隊 小隊長이었다!】
5.16 혁명 참가수기(최종) : 5.16은 진정한‘구국’혁명이었다!
5월 18일, 남산 지역을 떠나, 우리가 도착한 곳은 중앙청 뒤, 경봉궁 안 비원 쪽이었다.
그곳에서 우리 해병부대는 12일간을 숨어(?) 지내며,역시 ‘기동 타격부대’의 임무를 띠고 경계에 임했다.
우리 해병부대가 시내에서 전면 철수하여,경봉궁 속에 자리잡은 것도 다 '김 윤근' 여단장의 깊은 뜻에서였다.
이제는 ‘혁명 과업’ 1단계가 어느정도 완료되었다고 봄으로,될수록 해병대는 전면에 나서지 말고 조용히 있자는 뜻에서였다.
중앙청, ‘내각 사무처’자리에 ‘수도 방위 사령부’의 간판이 내걸렸다.'김 윤근' 장군이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수도 방위’ 의 정식 임무를 띤 부대가 된 셈이다.
남산 지역에 있을 때와 같이 급박한 상황은 아니었지만,역시 ‘대항군’이 출현했다는 정보가 가끔 있어서 몇번의 출동이 있기도 했었다.
우리가 경복궁 내부에 자리를 잡은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모든 상황이 더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래서 낮에는 사병들에게 축구 같은 운동도 하게 하는 여유도 생겼다.
남산 파견대장 (?)
5월 20일, 아침 8시경, 대대장 실에서 호출이 왔다.
급히 대대장 막사에 갔더니, '오 정근' 중령이 나를 보고, ‘귀관은 소대 병력을 이끌고 남산에 가서, 임무를 수행하라!’는 것이었다.
많은 소대장 중에 대대장이 왜 나를 택했을까? 의문을 가졌었는데, 막사를 나온 후 중대장의 다음과 같은 설명을 듣고는 나의 책임이 큰 것을 알게 되었다.
"대대장이 특히 '김' 소위를 보내는 것은, 남산 일대가 우범지역이기 때문에, 신대 출신인 귀관을 보내는 것이다. 그러니 대원들 기강 확립에 특히 유의하기 바란다.”
추럭 한대가 배속되었다. 나는 사랑하는 나의 소대원들을 탑승케 하고, 남산으로 향했다.
남산 지역에 도착해 보니 거기 우리 해병 전차 3대가 포진하고 있었다.
나의 임무는 첫째로 그 전차들을 보호하며 경계에 임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임무는 남산 꼭대기에서 망원경으로 그 일대, 특히 서울 역 일대를 관찰하여, 만일 어떤 이상 징후가 있을 시 즉시 본부에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10일간 지나는 동안 나는 팔자에 없는 ‘시민 재판관’ 노릇을 좀 했다.
군사 혁명이 일어나, 군인들이 통치를 하는 세상이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그 지역에 가난한 사람들이 더러 찾아와 억울한 일 당한 것을 호소하며,해결해 달라고 청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경찰서’에 가보라고 했지만, 그들은 경찰은 믿을 수 없다며, 군인들이 해결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솔로몬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며, 선임 부사관, 또 분대장들과 함께,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사실은 할 수 있는게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일을 몇번 하기도 했다.
억울한 일, 고통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실감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또 남산으로 뛰어 올라오기도 해서, 그들에게 군대 ‘건빵’을 나누어 주었더니 무척 좋아하는 것을 보고 흐믓해 하기도 했었다.
이 남산 ‘파견대장’(?)으로서의 10일간이 나에게는 참 기억에 남는 재미있었던 시간들이었다.
5월 31일. 드디어 우리 해병 혁명부대에게 원대복귀 명령이 떨어졌다.
저녁 8시경, 한남동에 있는 ‘해병대 사령부 직할 경비부대’에 도착하여, 철수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1시에, 우리 해병부대는 고이 잠든 서울 시내를 조용히 빠저 나가, 일로 김포 반도를 향해 달려 나갔다.
구국 일념으로 혁명에 참여하여, 한강 저지전을 돌파하고, 서울로 들어 올때도 새벽이었고, 또 1단계 혁명과업을 완수하고 서부전선 방어, 본연의 임무로 복귀하고 서울을 빠저 나올때도 ‘새벽’이었다.
누군가 역사는 새벽에 이루어진다고 말했던가?
곧 그 새벽은 밝아 올 것이다.
동녘 하늘에서 찬란한 해가 불끈 솟아 올라, 모든 ‘어두움’을 물리치고, 온 누리를 환하게 비쳐 줄 것인가?
5,16 ‘군사 의거’는 진정한 혁명인가?
(역사에 남은 5 16, 그날의 한 유명한 사진)
얼마 전, 한 전직 대통령이란 분이, ‘민주 동지회’라는 단체의 신년 인사회에서, '박 정희' 전 대통령을 ‘이나라
군사 독재 정권의 원흉’이라고, 하면서, 5.16 으로 탄생한 ‘박 정희 정권’에 대하여, 예의 독설적인 표현으로 강하게 비난하였다.
5.16 군사 혁명이 일어난지 금년으로 어언 반 세기가 되었다.
그런데 5.16에 대한 바르고 공정한 역사적 평가는아직 완성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이른 바 ‘민주화’ 세력과 혹은 ‘친북 좌파’ 측에서는, 5.16을 단순히,‘군사 쿠데타’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 '민주화'를 위해 싸웠다는분들, 군인 출신 집권자에 의해 탄압 받았다고 하는 분들, 사실은 대부분 자기들의 '정치 생명'을 위해, '대통령 한번 해보겠다'는 개인적 야심 '때문에 싸우고 고통받은 것 아닐까?)
그런데, 과연 그들이, 해석하고, 보는 관점이, 5.16에 대한 올바른 평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선, 나는 5.16의 성격에 대하여, 그것은 단순한 ‘군사 쿠데타’가 아니고,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던 대한민국을 구하고 ‘국가 성장과 민족 중흥’의역사를 가저 오게 한 ‘구국적 혁명’이라고 규정한다.
‘쿠데타’와 ‘혁명’은 무엇이 다른가?
'쿠데타'란 단순히 ‘군대 같은 어떤 권위(authority)를 가진 집단이, 무력이나 강압적인 방법으로 국가 권력을 장악하거나 헌정 질서를 교체하는 것을 의미한다. 거기에는 국민적 동의나 지원같은 것은 관계없다.
그러면 '혁명(revolution)' 이란 무엇인가?
'혁명'이란 물론, ‘권력 및 조직 구조의 결정적이며 급진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는 정치 및 사회 체제의 변화를 의미하지만 경제, 문화 사상, ‘삶의 방식’ 등의 급격한 변화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성공은 대체로 국민적 공감이나 지원이 있을 때 가능하다.
역사적으로 대표적인 것은, 영국의 ‘명예 혁명’, 프랑스 혁명 및 미국의 ‘독립 혁명’ 등이다.
5.16 혁명은 단순히 국가 권력, 조직의 교체만을 이룬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사회, 경제, 문화, 사상, 국민 의식, 국민 생활 전반에 거처 대변혁을 가져온 진정한 ‘혁명’이었다.
역사가 '크레인 브린턴'은 혁명의 원인을 ‘그 사회의 가치체계가 무너져, 그 사회의 정치 질서와 사회 질서가 무너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5.16 혁명 때의 한국의 사회 상황은 어떠했었는가?
4.19 이후 생겨난 내각 책임제의 '장 면' 정권은국가를 정상적으로 유지할 수 없었던 유약하고 무능한 정권이였다.
정치권은 민생은 돌보지 않고, 부정, 부패 속에서 정쟁과 파당만 일삼고, 거리에는 매일 각종 데모로 사회 혼란과 무질서가 극에 달하고, 국가 경제는 파탄 나, 국민들은 굶주리고 모두 가난한 상태였다.
좌익들의 발호로 국가 안보는 벼랑 끝에 와 있었다.
학생들은 북을 향해 “오라 남으로’ “우리는 북으로!’ 를 외치며 판문점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었다.
그야말로 국가의 운명이 ‘백척 간두’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때 생각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대로는 안된다’라고 한탄하고 있었다.
국가의 현재나 앞날이 암담하고 희망이 없어 보였다.
국가를 그 위기에서 구해 낼 어떤 세력이 나타나야 했다.
기존 정치 세력인가? 노동자 농민인가? 학생들인가? 다 아니였다.
결국 가장 애국심이 강하고 의식이 깨어 있었던, 그리고 의협심이 강한 젊은이들이었던, 군인들이 나설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
5.16 혁명은, 그래서 국민들의 지지와 환영을 받았다.
나는 분명히 서울 시내에서 많은 시민들이 혁명군을 향해 열열한 환영과 박수를 보내는 것을 ‘내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허기진 우리 군인들에게 어떤 부인들은 빵이나 주먹밥을 싸다 주기도 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윤 보선'은 “올 것이 왔다” 라고 말하며 군인들의 ‘궐기’를 기대하고 있었다는 듯한, 호의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런 국민들의 지지 속에서 5.16혁명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5.16으로 탄생된 '박 정희' 정권 시절, 어떤 다른 잣대로 보면, 비판 받아야 할 일도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독재적 통치 형태, 인권 유린 사태, 데모의 과잉 진압 등 ‘반 민주적’ 요소들이 많았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휴전 상태인 분단 국가 상황 하에서, 결국 국가 안보를 튼튼히 세우기 위하여, 그리고 역사적인‘한강의 기적’을 이루기 위한국력 통합을 위하여, 어쩔 수 없이 발생케 된 ‘부작용’들이라고 말한다면
잘못된 해석일까? ‘건강’과 ‘성장’을 위해서는 언제나 ‘부작용’이란 것이 따르게 마련 아닌가?
지금의 대한민국이 누리는 발전과 번영, 세계 경제 10 위 권에 들어가고, G-20 의장국이 되고, 세계 및 미국의 하이웨이에 한국제 자동차들이 씽씽 달리고,삼성제품들이 백악관 및 미국인 가정에 들어차 있고…
더 나아가 ‘민주화’까지 이룩한 대한민국의 그 성장 기저(基底)에는 바로 ‘5.6 혁명’과 '박 정희/ 대통령의 뛰어난 ‘리더쉽’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누구도 부인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하나의 초급 지휘관인 ‘소대장’으로 참가했지만, 누가 무어라고 해도, 5.16 혁명군의 선봉에 서서 한강 다리를 건넘으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또한 새로운 ‘국가 재건’ 에조금이라도 이바지했던 것을 하나의 큰 자부심으로 간직하고 있다. (끝)
인사의 말씀
(그동안, 필자의 ‘ 5.16 혁명군 참가’ 수기를 읽어 주신데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글이란 언제나 쓰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달라질수도 있고, 또 편견, 과장, 축소 등의오류를 범할 수도 있는것이지만, 저는 그때, 제가 보고, 듣고, 느끼고, 뛰고, 참가했던 주위정황들 에 대해, 다시 기억을 되씹으면서, 되도록, 정확히 기록하려고 노력했다는 점만은이해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또 한가지 드릴 말씀은 제가 ‘해병대’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해병대의 관점에서 글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혹 타군 출신들께서, 제 글속에서, 혹시 어떤 ‘거부감’같은 점을느끼셨다면, 널리 양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다만 이글이 ‘시스템 클럽’을 통해서, 하나의 작은 ‘기록’으로라도 남게 되기를 희망해서 글을 썼다는 점을 혜량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부족한 사람의 글을,'지 만원' 박사님의 ‘최신 글’ page에 올려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지' 박사님과, 함께 하시는 분들, 또 회원 여러분의 건투를 빕니다. 김 피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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