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와 5·16혁명

【(네번째 글) 나는 5.16 革命軍 先鋒部隊 小隊長이었다!】

머린코341(mc341) 2015. 10. 26. 16:46

【(네번째 글) 나는 5.16 革命軍 先鋒部隊 小隊長이었다!】


5.16 혁명 수기(4) - 가장 길었던 날 (The longest Day)


한 소대장의 5,16 혁명 수기 (4) – ‘가장 길었던 바로‘그날'
                                           
김 피터 (박사, 교수)


 (5,16 군사 혁명 50주년의 해를 맞이하여, 그 당시 혁명 선봉군으로 한강다리를 돌파했던, 한 일선 소대장의,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했던 것을, 기억을 더듬으며 후세들에게 알려주기 위하여 여기 글을 올립니다. _ 필자)
 
'장 도영' 육군 참모총장의 지시에 의해, 한강대교에 바리케이드저지선을 설치해 놓고 대항하던 헌병 병력을 물리치고, 우리 해병혁명군은 서울 시내로 경계를 철저히 하면서 들어갔다.
 
 그러나 아직도 잠자는 서울 시내!방금 격전을 치르고 난 우리들의 눈에 비친 서울 거리는너무도 조용해 보였다.


한강교 전투시 내가 추측했던 ‘서울 시내에는 이미 혁명을 저지하려는‘반 혁명군’이 대거 포진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틀린 것이었다.


그러나 용산 경찰서 지역과 서울역 지역에서 경찰들의 총격이 좀 있었다.
소수의 경찰력이므로 그것은 쉽게 진압되고 말았다. 
  
‘목표지역’ 점령


서울역에 왔을 때는,그 역사적인 5월 16일이 훤하게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나의 생애에서 ‘가장 길었던’ 그 밤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새벽녘인데도 사람들이 꽤 많이 다니고 있었다.


아직도 상황을 잘 모르는 대부분 시민들은 총소리와,무장한 군인들을 보고 무슨 일인가 불안스런 표정을 보이기도 했다.


어떤 나이 좀 들어 보이는 사람이, 나에게 다가와, 새벽에 나는 총소리를 들었다고 하면서, “해병대는 이렇게 쎄게 훈련을 합니까?” 라고 질문을 던지기도 하였다.
 
서울역 지역에서의 가벼운 총격을 물리치고, 이제 각 부대는 명령 받은 목표 지역을 향해 떠나 갔다.


우리 3중대는 그당시 경찰의 총 본부인 ‘치안국’을 점령 확보하였다.


경찰력의 본부인지라 혹 강한 저항이 있을까 염려하며 처들어 갔으나, 치안국 내에는 여자 교환수들을 제외하고는한 명의 경관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마 4,19 때 혼이 난 경찰들인지라, 이미 군사 혁명의 방송을 듣고, 모두 도망쳤던 것 같다. 
  
‘외곽 방어’에 투입
 
 얼마 후,우리 제 3중대는 최초‘작전 명령에 하달된대로,외곽 방어를 위해 미아리로 향하였다.


이때는 이미 시민들이 거리에 많이 나와 있었다.


그런데 그때 나는 분명히 보았다.

차량을 타고 가는 우리를 향해, 얼굴에 웃음을 띠며 손을 흔들어 환영하는 시민들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길을 멈추고 우리를 향해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아마 새벽에 긴급뉴스로 나간 '박 종세' 아나운서의‘군이 궐기했다’는 방송을 듣고 나온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긴장해 있던 나의 마음이 비로소 좀 안도가 되며, 그들을 향해 손을 들어 답하는 나의 눈에 이슬이 맺히기도 한 것 같다.
 
미아리고개 마루에 와서 (그 당시 미아리 고개 꼭대기 지역에는 지금처럼의 집이 없었다.밭이나 혹은 풀, 나무들로 덮여 있었다) 우리는 산개하여 방어진을 구축하였다.


혹 동두천 지역에서 ‘반 혁명군’이 서울로 진입한다면 여기서 그것을 격퇴 하기 위해서였다.


기관총, 60 미리 박격포, AR 자동소총 등으로 화력 계획을 세우고, 각 소대 별로 방어 체계를 구축하여 언제라도 적이 나타나면 이를 물리칠 태세를 취하였다.


임시 검문소를 설치하고 서울로 들어가는 모든 차량이나 수상한 사람은 우리 대원들에 의하여 검문을 받았다.

 
중대장이 나에게 인근에 있는 경찰 파출소를 조사하라고 해서 똘똘한 대원 몇 명을 대동하고, 파출소로 내려갔다.


파출소에 들어서자 나는 부하들에게 파출소 내를 조사해 보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분대장인 하사 하나가 ‘무기와 탄약을 다 내놓으라’ 고 경찰 중에 높아 보이는 사람에게 소리를 쳤다.


그러나 그 경찰은 ‘우리 경찰은 군인의 지시를 받지 않는다’ 며 거부하였다.


그러자 그 하사는 “이 새끼가 뜨거운 맛을 보아야 정신 차리겠어?” 하면서 총개머리판으로 그 경찰의 배를 후려쳤다. 경찰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러자 다른 경찰들이 그 쓰러진 경찰 쪽으로 몰려들며 대항할 자세를 취했다.


그때 예의 그 하사가 “다 죽여버리겠어’ 하며 총을 겨누었다.


동시에 우리 대원들이 누가 명령한것도 아닌데 모두 경찰들을 향해 총을 들었다.


노리쇠를 당겨 실탄을 장진하는‘철커덕’하는 소리들이 들렸다.
여차하면 쏠 것 같은 태도를 보고 경찰들이 모두 두 손을 번쩍 처들었다.
 
 한번 전투를 치른 대원들인지라 미리 선수를 친 것이다.


평상시 같으면 내가 대원들을 야단 처야 하겠지만 때가 때인지라, 그럴 수 없었다.


사태를 수습하고, 만일을 대비하여 경찰의 실탄은 모두 압수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고개 위에 있는 해병 부대에 속히 보고하라 고 지시(?)하고는, 그곳을 나왔다.


내가 왜 이런 사소한 사건을 여기 쓰느냐 하면, 그때 우리 해병들의 심리 상태가 얼마나 날카로워저 있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밤을 꼬빡 새우고, 아침도 못 먹어서 입안이 깔깔하다.


그러나 배가 좀 고픈 것 같아 대원들과 함께 마른 건빵을 입에 넣으니 그래도 맛이 있었다. 
 
‘시청 앞’ 지역 경계
 
아침 10시쯤 작전 참모가 오더니 시내로 철수하여 시청 앞 일대를 방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다시 추력을 타고 시내로 이동하는데, 연도에는 아까보다 더 많은사람들이 우리를 향하여 손을 흔들며 환영해 주었다.


시청 앞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거기에는 육군 공수부대가 도로 양 옆에 늘어서서 총을 들고 당당하게 경계에 임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공수부대는 '박 치옥' 단장과 참모총장이 보낸 ‘특전감’의 완강한 방해로 처음에는 출동이 저지 되었었으나 '차 지철' 등 젊은 장교들의 활약으로 서울 진입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심리란 묘한 것이다.


서울 시청 앞 도로에 쭉 서 있는 ‘우군’인 공수부대를 보고 우리 해병들은 반가워 해야 할텐데, 해병들 특히 하사관들 입에서 ‘개새끼들!’ 이라는 욕이 튀어 나왔다.


본래 계획에는 공수부대가 1진으로 먼저 서울로 들어가야 했었는데 그들은 그때 나오지 않았었다. 대신 우리 해병들이 한강 다리에서 피를 흘리며 사투를 벌려야 했었다. 
 
 그리고 미아리고개로 나가 외로이 외곽 방어까지 하다가 와 보니, 서울의 요충지대, 시청 앞 지역에 공수부대가 떡 버티고 서서 그야말로 ‘광’을 내고 있으니(?) 우리 해병들의 심사가 편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생각은 다 잠깐이었다.
 
즉시 우리 해병들은 산개하여 각각 지시 받은 위치에 배치되어 경계 임무에 들어 갔다.


나의 ‘제 2 소대’ 의 경계 지역은 시청 앞에서 미도파 백화점이 있는 도로, 즉 소공동 쪽 방향이었다.


나는 바로 조선 호텔 앞을 소대장의 위치, 즉 ‘소대 본부(?)’ 로 정하였다. 
 
혁명 지휘부가, 우리 해병대를 시청 앞쪽으로 불러 들인 것은,  서울의 중심부이며, ‘정치 1번지’ 지역인
(그 당시는 국회의사당이 서울 시청과 광화문 사이에 있었다),  광화문, 시청, 남대문 일대에, 용맹을 자랑하는 공수부대와 해병대를 같이 세움으로, 혁명군의 위용(?)을 과시하려고 그렇게 한 것 같다
.   
어디선가 가까이서 총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우리 대원들도 연쇄적으로 땅에 엎드리며, 총을 마구 쏘아댔다.

그 지역의 모든 부대가 다 사격을 하는 것 같았다.
한동안 총소리가 서울의 중심부에서 천지를 진동하였다.


무슨‘적’이라도 나타났는가 해서 사방을 둘러 보아도 아무 일 없는 것 같다.


그렇게, 어디서 총소리만 났다 하면, ‘엄호사격’ 차원에서 덮어 놓고 공중을 향해 쏘아대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처음에는 아마 ‘정치 1번지’지역에 심리적 위협을 주기 위해서, 어느 쪽에서 시작한 것 같았으나, 너무 자주 그런 일이 일어 나자, 지시 없이 사격을 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런데, 그때 나는, 후일, 경호처장으로 ‘권력의 화신’ 이 되었던 '차 지철' 대위와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때 그는 공수부대 중대장의 하나로 시청 앞에 있었는데, 가까이, 조선 호텔 앞에 서 있던 해병 소대장인 나를 보았던 모양이다.


나에게 달려 오더니 예의 그 험상궂은 표정으로,
“왜 해병대쪽에서 자꾸 총을 쏘아대는가? 지시 없이 사격하지 말라!"  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나는  “우리 해병대는 육군의 지시를 받지 않소. 불만이 있으면 우리 대대장에게 하시요.”  소리치면서,
손을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에 대며 대들었다.   


나는 해병대 장교지만, 평소에는 별로 과격한 편은 아니다.


그런데 그때는 ‘한강에서의 전투’를 치렀을 뿐 아니라 밤새 잠 한잠 못자고 아침밥도 못먹어, 악이 치받쳐 있는 상태였다.


또 ‘무임승차’한 것 같은 공수부대에 대한 감정이 있어서, 나도 모르게 과격한 태도가 나왔던 것이다.


그 공수단 대위는 악에 받친 것 같은 해병 소대장의 당돌한 태도를 보고,
‘그래, 그럼 그러지” 하고는 자기부대 쪽으로 가버렸다.


물론 그 대위가 바로 ‘차 지철’이였다는 것은 그 때는 몰랐었다.  

그러나 그의 독특한 인상이 나의 뇌리에 박혀 있었기 때문에,
그후 사진 등에서 그가 바로 그 사람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엄호 사격’중에 오발로 분대장 하나가 총상을 입는 불상사가 일어 났다.


 피를 철철 흘리는 그를, 압박붕대로 상처부위를 싸매고는 급히 수도 육군 병원으로 데려갔다.
군의관들이 무척 친절히 대해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 낮 12시 가까이 되었을 때인가?‘ 주먹밥’이 식사로 배부되었다.


다 식은 뻑뻑한 주먹밥이지만, 오늘 처음 대하는 밥인지라 맛있게 씹어 먹었다.

그런데 그때 어떤 아주머니들이 빵과 과자 등 먹을 것들을 가지고 왔다.
자발적인 시민들의 호의에 나는 감사하면서 콧등이 시큰해짐을 느꼈다.
 
오후 5시경, 남산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남산 위의 과거 '이 승만' 대통령 동상이 있던 공간 지역에 우리 모든 해병부대는 다 집결하였다.


거기서 우리는 그날 밤, 야영을 하며 대단히 불안한 밤을 보냈다.


밤중에 ‘비상소집’ 이 몇 번이나 있었다.


‘반 혁명 부대’가 처들어 온다는 정보가 입수되어, 모두‘단독 무장’을 한채 추럭에 올라타고, 출동을 하다 보면, ‘반 혁명 군’이 아니라고 하여, 다시 되돌아 오기를 여러 번 하였다.


그렇게 16일의 역사적인 밤은 대단히 불안한 가운데 지나가고 있었다.


========= To be continued No.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