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와 5·16혁명

【(첫번째 글) 나는 5.16 革命軍 先鋒部隊 小隊長이었다!】

머린코341(mc341) 2015. 10. 26. 16:19

【(첫번째 글) 나는 5.16 革命軍 先鋒部隊 小隊長이었다!】  


 김 피터 (박사, 교수)
 
 (금년은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지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필자는 해병소대장으로,  그때 혁명군의 일원으로 참가했었습니다.
하나의 역사적 기록을 남기기 위해 이 글을 여기에 올립니다.
한가지 말씀드리는 것은, 이 글은, 어디까지나, 5 16을 긍정적으로, 그리고 한 해병대 초급장교의 경험과
관점을 바탕으로, 쓴 글임을 미리 말씀 드립니다.)
(이 글은 필자의 동의없이 전재하는 것을 허락지 않습니다.- 필자)


김포 반도!
동쪽으로는 한강 하류, 서쪽으로는 ‘염하’를 건너 강화도, 북쪽에는 ‘조강'(한강이 서해로 들어가는, 한강의 최하류), 그리고 그 너머에 북한의 개풍 땅과 마주하는작은 반도, 서울 외곽인 일산에서 불과 30분 정도 밖에 안 걸리는 그 지역은 155마일 휴전선의 서부 방어 최 일선 지역이다.


거기 ‘귀신 잡는 해병’중에,‘해병 제1 여단’(당시) 이 자리하고 있었다.

 
 서부 방어, 주 저항선, 최 1선 해병 소대장!
 
 그 당시 해병 제1 여단은 김포반도는 물론 강화도, 교동도 등,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서북부 지역, 가장 중요한 요충지대의 전선을 지키고 있었다.

 
 1961년, 그 ‘해병 제1 여단’ 산하, 제 2연대 제1대대 제 3중대 제 2소대!
최전방 소대장으로 내가 근무하고 있었다


 ‘조강’ (한강 하류) 건너 편, 북한지역에는 간혹 인민군들의 움직임, 일하는 농부들과 트럭터, 그리고 선전용 건물(내부는 비어 있음), 산등성이에 설치해 놓은 ‘미제 타도’등 상투적인 구호들이 을씨년스럽게 보이고, 스피커에서는 대남 선전용 방송이 24시간 귀청을 때리고 있었다.


그 뿐인가?
밤이 되면 무장 간첩의 도강을 저지하기 위해, 우리 측의 강한 ‘써치 라이트’ 불빛이 밤새도록 한강 하류 전체를 훑으며 지나다니고 있었다.

 
무장 간첩이 밤에 어떤 일선 소대장 막사에 침투해 들어와 소대장의 목을 따갔다는 무시무시한 얘기 같은 것이 내려오고 있어서, 나는 밤이 되면 언제나 나의 소대원들이지키고 있는 각 ‘초소’ 들을 순찰하며, 소대원들과 함께 경계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5 16의 ‘여명’


3개월 간의 최전방 근무가 끝나고 후방 부대와 임무교대를 하여, 우리 제1대대는 ‘오리정’이라는 곳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런데 ‘예비 부대’로 후방 지역에 있으면 좀 편할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일들이 계속되었다.


우선 갑자기 부대 자체 내에서 ‘테프콘’ 상황을 격상시키며, 밤중에 ‘비상소집’명령이 자주 내려왔다.


비상소집 영이 하달되면 각급 부대는 신속히 완전 무장을 하고 연병장에 집합한 다음 명령을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여단 본부에서 장교들을 위한 ‘특별 교양 강좌가 자주 진행되었다.


서울에서 당시 유명한 강사들을 초청해서 애국심 함양을 위한 일종의‘시국 강연‘ 정신 무장 강연’ 등이 실시되었다.
 
그 강연회에서는 강사의 강좌가 끝나면 의례히 '김 윤근' 여단장의 짤막한 ‘훈시’가 주어지기도 했다.


또한 특별 ‘훈련’이 계속 진행되었다.
‘C.P.X.(도상 훈련)’나 ‘F.T.X.(실제 야전 훈련)’등, 훈련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여단’내의 분위기가 좀 긴장감이 있는 가운데, 어느덧 5월(1961년)에 접어들었다.
 

그런데, 5월 초부터 우리 부대에 하달된 훈련 명령은 ‘독수리’ 작전이라 이름 붙여진 ‘수도 서울 방어’ 훈련이었다.


내가 속해 있는 제 3중대에게 주어진 임무는 한강의 행주 나루터에 설치되는‘부교’(떠 있는 다리) 지역을 장악하여, 의정부 쪽에서 후퇴하는 미군이나 국군이(서울 시내를 통과하지 않더라도) 안전하게 ‘행주 부교’를 통해서 이동할 수 있도록, 적으로부터 그 지역을 방어하는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물론 또 다른 부대는 서울 방어의 다른 지역에서의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울 근교로 이동하곤 했다. 

5 16 전야(前夜), ‘상황실’에서.


5월 15일 저녁이 되었다.
연병장으로 많은 트럭들이 집결되고 있었다.


7시경 ,‘전령’이 하나의 ‘전통문’을 가지고 소대장 벙커로 달려 왔다.
즉시 대대본부, ‘작전 상황실’에 집합하라는 명령이었다.


‘상황실’에 도착하니, 헌병들이 상황실 주위를 경계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보통 때에는 상황실에 헌병이 지키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좀 이상한 기분을 안고 상황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 우리 해병 제2 연대, 제1 대대장은 '오 정근' 중령이었다.
키가 과히 크지 않은 다부지게 생긴 체구에 퍽 온화한 표정을 지니고 있는 분이다.


그런데 단상에 올라선 그의 얼굴에 평소에 보지 못하던 근엄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따라서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모든 장교들도 자연히 모두 허리를 꼿꼿이 하며 자세를 바로 하기도 하였다.


대대장의 입에서 어떤 중대한 명령이 떨어질 것처럼 보였다.


좌중을 한참 무겁게 둘러보던 그의 입에서 드디어 청천 벽력 같은, ‘혁명’이라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말이 튀어 나왔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백척 간두’의 위기에 처해 있다.
정부는 무능 부패하여 국정은 표류하고 있고, 정치인들은 매일 파당, 계파로 분열되어 싸움질이나 하고 있고,
민생은 모두 가난하여 보릿고개를 넘지 못하고 굶어 죽는 자가 부지기수이며,
서울의 거리는 매일 온통 ‘데모’대가 판을 처, 혼란은 국에 달해 있다.


이런 틈을 이용하여 적색분자들이 국가, 사회, 학원 각층에 침투하여, 그대로 놓아두면,
대한민국이‘적화 통일’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보라.

지금 ‘빨갱이’들의 책동에, 철없는 대학생들이 판문점으로 달려가고,북에서 빨갱이 청년들이 남으로 내려와
서로 만나 대한민국을 김일성의 손아귀에 넣어주려 하고 있다.


이런 ‘낭떠러지’에 떨어지지 게 된 조국의 운명을 구할 자가 누구인가?


어디에도 희망이 없다.


이제는 우리 각성된 ‘군인들이 일어설 수 밖에 없다.

우리는 피를 흘려 우리의 조국을 원수 빨갱이들의 침략에서 구해냈었다.
 
이제 다시 한번 총을 들고 조국을 이 위기에서 구해 내자.


우리의 혁명군의 앞에 여단장이신 '김 윤근' 장군이 앞장 서있으며, 육해공군의 뜻있는 장병들이 모두 궐기하였다.


우리는 이제 이 구국 혁명에 목숨을 내놓았다.
성공하면 우리는 ‘구국 용사’가 될 것이나, 만일, (그는 비장한 얼굴로 한참 있다가,) 만에 하나, 실패하면 우리는 ’역적’이 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자, 친애하는 나의 동지, 동료 부하 장교 여러분, 이 '오 정근'을 믿고 나와 함께 이 ‘엄숙한’ 구국 대열에 따라 나서겠는가?”
 


지금, 여기에 내가 진술하고 있는 대대장 '오 정근' 중령의 비장 어린 이 연설 내용은, 벌서 50년의 세월이 흘렀으므로, 아마 정확하게 기술했다고 장담은 못하지만, 대체로 여기 기술한 것 같은 내용을 담은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이 내용은 아마도 우리 해병대의 혁명군 총지휘관인 '김 윤근' 여단장이 했던 연설 내용과 일부 겹친 것이었을 수도 있다.

 
대 대장의 ‘혁명 봉기’의 진군 나팔 같은 연설이 끝나자, 거기에는 폭발할 것 같은 긴장감과 함께, 한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고, 옆 사람의 숨소리도 들릴 정도의 ‘침묵’의 순간이 잠깐 흘렀다.


그리고 좌중의 얼굴들을 훑어보던 대대장이 또 이런 말을 했을때는 정말 긴장의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한 것처럼 보였었다.


 “자, 군대는 명령이지만, 이번 ‘혁명’에 참가하는 것은 ‘군사작전이 아니므로, 귀관들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나를 따라 혁명 대열에 참가할 장교는 그대로 남아 있고, 혹 다른 이유로 참가하기를 원치 않는 장교가 있으면
조용히 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 주기를 바란다.”


그러자, 무겁던 침묵의 순간이 깨지면서 서로 처다보며 웅성웅성함이 있었다.
아무도 자리를 뜨는 장교는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혹 누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라도 한다면 아마 대기하고 있는 헌병에게 체포되어
총살이라도 당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모두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드디어 모든 장교들의 얼굴에, 구국의 대열에 참가하겠다는 결연한 빛이 감돌게 되었다.


중대장 하나가 벌떡 일어서더니 주먹을 높이 처들고,
“우리는 대대장님을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대대장님과 생사를 같이 하겠습니다.”
하고 큰소리로 외첬다.

이것이 하나의 신호가 되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주 먹을 불끈 쥐고
“대대장님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소리를 치고 있었다.


사실, 그때 우리 젊은 장교들은, 들어내 놓고 말은 안 했어도, 모두 국가의 위기를 체감하고 있었고, 나라를 살리기 위한 어떤 획기적인 일이일어나야 한다고 생각들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가 5,16 혁명에 참여한 것은 '군대 명령'으로, 억지로 나간 것이 아니라, 적어도 장교들은,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 참여한 것이라고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작전 참모가 단에 올라서더니 ‘상황판’가리개를 걷어 내렸다.

아 ! 거기에는 서울 시내 지도가 크게 나타나지 않는가?


그리고 괘도를 하나 하나 넘기면서 ‘독수리 작전’의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각부대 임무와 점령 목표, 및 행동지침이 자세히 하달되었다.


우리 3 중대에게 주어진 점령 목표는 그 당시 경찰의 총본부인 ‘치안국’이었다.


우리가 그 동안 연습에 열심히 참가했던 ‘독수리 작전’ 훈련은 결국 ‘5 16 군사 혁명 ’해병대 작전이었던 것이다.
 
작전 참모의 작전 명령 ’브리핑이 끝 난 후, 잠깐 ‘질문 시간’이 주어졌다.


지금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장교들은, 누구도 건너보지 못했던, ‘루비콘 강’ 도강을 앞두고, 당연히 여러가지 질문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한가지 뚜렷이 기억나는 것이 있다.


어떤 장교 하나가 이런 질문을 했다.

“만일 혁명군에 대항 하는 자가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이때 대대장은 단호하게 “상황에 따라 사살해도 좋다.”
고 대답하였다. 

모든 작전명령과 시달사항이 끝나고, 상황실 문을 나섰을 때, 나의 마음은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한다는 ‘뜨거움’이 솟아 오르고 있었으나, 동시에 머리는 무언가 착잡한 것으로 가득 차 있는 느낌이었다.

 
밤하늘을 처다 보니, 캄캄한 밤에 무수한 별들이 작은 빛들을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도 이제 저 별들 같이, 어두운 조국의 앞길을 밝히는 하나의 작은 별빛이라도될 수 있을까?
 
그런데 그 수많은 별들 중에 유난히 밝은 빛을 발하는 하나의 큰별이 있었다.


새로운 지도자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인가?
나는 마치 하나의 점성가가 된것 같은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5월 15일 밤, 그날 밤은 그렇게 내 생애에서 ‘가장 긴 밤’(the longest night) 의 하나로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