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혁명 해병부대 선두 출발하다
김포 해병여단장 김윤근 준장은 부관이 시간에 맞춰 깨우는 바람에 일어나 보니 밤11시였다.
인사참모 최용관 소령, 통신참모 문성태 중령이 기다리고 있다가 '출발준비가 끝났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여단내 미 군 고문단도 눈치채지 못하고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최 소령은 전차중대의 출동문제를 제기했다. 원래 출동계획에는 전차중대를 출동시키면 그 굉음으로 한강다리를 넘기 전에 폭로될 위험이 있다고 해서 제외되어 있었다.
최 소령은 주력부대가 서울시내로 들어가는 시간에 맞추어 전차중대가 출발하도록 하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자정을 넘어서 5월16 일로 넘어간 뒤 드디어 오정근 대대장이 전화로 보고해 왔다.
"지금 부대의 선두가 출발했습니다."..
지휘반은 주력부대의 후미에 붙게 되어 있었다. 김윤근 여단장은 출발을 기다리는 동안 군종 참모 김광덕 대위를 찾아나섰다.
그는 여단내의 교회로 들어가서 군목을 모셔오라고 했다. 자다가 일어난 김광덕 대위는 옷매무새를 고쳐 입으면서 들어왔다. 김윤근은 한밤중에 깨워서 미안하다고 사과한 뒤 거사계획과 취지를 설명해주었다.
"지금 막 거사부대의 선두가 서울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잘하는 일이라고 믿고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잘못된 일이라면 우리가 하려는 일을 쳐부수어 주시겠지만, 출동목적을 모르고 나가는 많은 장병들이 피를 흘리지 않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놀란 표정이 된 김 군목은 곧 침착을 되찾더니 뜨거운 기도를 올려 주었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김윤근은 교회를 나왔다.
그는 지프를 타고 전차중대로 향했다.
이미 주력부대의 트럭 종대가 엔진소리를 우르렁거리면서 김포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중대본부에 도착한 김윤근은 정문 보초에게 "지금 중대장을 보러가니 전화로 깨우라"고 명령했다.
중대장 막사에 들어가니 김현호 대위가 옷을 입고 있었다.
김윤근은 그에 게 또 거사 취지를 설명해주었다.
"여단장님이 나가신다면 기꺼이 나가겠습니다."
"오전 4시에 출발할 수 있소?".
"언제든지 명령만 내리신다면 출발할 수 있는 준비가 다 되어 있습 니다."
"좋소. 오전 4시에 서울로 출발하시오.".
김윤근의 후미에 붙은 60여대의 트럭종대는 대대병력을 태우고 김포가도를 달렸다.
달은 없었지만 별빛이 영롱한 밤이었다.
해병대가 염창교에 이르렀을 때였다.
길가에 박정희 장군과 일행이 서 있는 모습이 헤드라이트 불빛에 들어왔다.
김윤근은 급히 차를 세우고 내렸다.
철모 를 쓴 김 장군은 박정희에게 뛰어오더니 거수경례를 붙이면서 보고했다.
"해병대 이상 없이 출동했습니다."
"수고 많았소.".
박정희는 김 장군의 손을 잡은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김 장군, 30사단에서 거사계획이 탄로가 났소. 그래서 30사단, 33 사단, 공수단 다 나올 수 없게 되었소. 이제는 해병여단만 가지고 강행 하는 길밖에 없게 되었으니 김 장군만 믿소."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는 수 없지요. 해병여단만 가지고 강행해 봅시다.".
김윤근은 담담하게 말하고 다시 차에 올랐다. 이때의 심정을 김윤 근은 이렇게 고백했다.
<다시 지프에 올라 강변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헤드라이트 불빛 은 앞을 비치고 있었지만 눈앞이 캄캄해져서 아무 것도 안보이는 기분이었다. 굵직한 몽둥이로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해 졌다. 처음부터 잘못되면 죽게 된다는 것을 각오하고 시작한 일이지만 막상 육군부대가 출동할 수 없게 되었다는 엄청난 차질에 부딪히게 되니 이것저것 모두가 후회되었다.>(회고록 '해병대와 5·16').
김윤근은 한강으로 다가가면서 어제(5월15일) 아침에 있었던 일이 기억났다.
출근하려고 삼각지를 지날 무렵이었다.
해군 참모총장 차가 앞질러 가기에 들여다보니 이성호 총장 옆에 함대사령관 이맹기 소장이 동승하고 있었다.
김윤근은 손짓으로 앞차를 세우게 한 뒤 이맹기 소장을 내리도록 했다.
"내일이 D일인데 알고 있소?"
"D일? 그게 무슨 말이오?".
"김동하 장군에게서 무슨 말 듣지 못했소?"
"글쎄, 아무 말도 들은 것이 없는데….".
"내가 무슨 착각을 한 것 같으니 용서하십시오.".
김윤근 준장은 정중히 사과드리고 인사를 한 뒤 김동하 장군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김동하는 '이맹기 장군도 거사에 찬동했고 거사일에 는 해군함정 수 척을 인천항에 배치시키기로 했다'고 말했던 것이다.
한강으로 접근하면서 이 일 저 일을 생각하다가 김동하 장군을 떠올린 김윤근은 선배를 너무 믿었던 것이 후회가 되었다고 한다.
박정희와 장교들은 염창교 입구에 서서 지나가는 해병대 차량들을 향해서 손을 흔들고 만세를 불렀다.
지축을 울리면서 출동하는 해병대는 박정희에게는 그야말로 기사회생의 기적이었다.
한때 "부대가 나와 야 산속에 들어가서 게릴라전이라도 하다가 협상이라도 할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박정희는 이젠 성공의 확신까지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염창교에는 6관구 사령부에 모였던 육군 장교들 10여명이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박정희와 해병대를 만났다.
박정희는 이들 장교에게 "이제는 부평33사단으로 가서 출동을 독려하라"고 명령했다. 단호하고 자신감이 붙은 말투였다.
박정희 차는 해병대를 뒤에서 따라갔다.
해병대 뒤에는 출동이 늦었던 공수단 트럭이 따라붙었다.
이로써 해병대는 선두부대가 되었다.
이는 김윤근이 피하고자 했던 상황이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해병대는 육군으로부터 당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해병대와 공수단은 새벽 3시30분경 한강 인도교의 남단인 노량진쪽에 도착했다.
남한강파출소의 경찰관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나오는데 해병대 병사들이 공포를 쐈다. 경찰관들은 달아났다.
해병여단의 선두인 제2중대가 한강 인도교로 진입했을 때 트럭 두 대를 여덟 팔자로 배치한 헌병들의 제지를 받는다. 중
대장 이준섭 대위는 참모총장도 이번 혁명을 지지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헌병들이 총장의 명령을 받아 자신들을 환영하러 나온 줄 알고 헌병 중대장 김석률 중대장과 반갑게 악수를 했다.
그런데 김 대위는 "우리는 총장님의 명령에 따라 어떤 부대의 통과도 허용할 수 없다"고 말하는게 아닌가.
이 보고를 전해들은 오정근 대대장은 김윤근 여단장에게 뛰어갔다.
오 중령도 참모총장이 혁명을 지지하고 있다고 알고 있었으므로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하고 따지듯 말했다.
김윤근은 박정희 소장한테 들은 대로 설명해준 뒤 "해병대만 가지고 혁명을 강행하기로 했으니 헌병이 계속해서 막으면 밀어버리시오" 라고 명령했다.
오정근 중령은 "알았습니다. 밀어버리겠습니다"하고 시원하게 복창하고 앞으로 달려갔다.
오정근 중령은 원래부터 해병대 단독거사를 꾀했던 이였으니 이런 상황에서도 주저할 이유가 적었다.
그뒤 앞쪽에서 총성이 들려왔고 곧 조용해지더니 오정근 중령이 무전기로 보고했다.
"헌병을 쫓아버리고 지금 저지선을 통과해서 인도교로 들어갑니다.".
한강인도교 남단에 설치한 트럭 바리케이드를 넘는 총격전에서 헌병 3명, 이준섭 대위 등 해병 6명이 부상했다.
해병대 후미쪽에 붙어 있던 김윤근 여단장이 탄 지프도 인도교로 들어갔다.
바리케이드로 놓아둔 트럭은 엔진이 꺼져 있어 치우는데 시간이 걸릴 듯했다.
김 윤근 여단장은 지프에서 내렸다. 중지도쪽에서 또 총성이 들렸다. 오정근 중령이 달려왔다.
"중지도에 제2 저지선이 있고 헌병이 저항합니다. 혹시 이 다리에 폭파장치를 해두었을지 모르니 병력을 일단 노량진쪽으로 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폭파장치가 그리 쉽게 되겠소. 걱정 말고 밀어붙이시오. 그런데 저 저지선의 트럭 헤드라이트 불빛이 눈에 거슬려요. 저것부터 깨부 숴버려요.".
오정근 중령은 중지도 지점에 설치된 제2 저지선의 헤드라이트를 겨냥해서 일제 사격을 하게 했다.
불빛이 꺼지자 제2 저지선도 돌파 되었다.
김윤근 준장은 한강 인도교의 반을 지나 이제는 용산쪽으로 걸어갈 수 있었다.
서서히 움직이던 해병대 차량종대는 다시 정지했다. 오정근 중령이 다시 달려왔다.
"큰 일입니다. 또 다른 저지선이 있습니다."
"큰 일은 무슨 큰 일이오. 저지선이 있으면 돌파해버려야지."
그러나 김윤근도 앞으로 저지선을 몇 개나 더 돌파해야 할지를 생각하니 걱정이 되었다.
'날은 이미 밝아오기 시작하는데 아직 한강다 리에서 우물거리고 있으니…. 실패라면 살아서 욕을 보느니 자결해 버려야지'하는 생각을 하니 아내와 세 아이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그러다가 트럭을 탄 장병들을 보고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니다. 내가 살아 있어야 아무것도 모르고 출동한 장병들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것을 증언해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이때 박정희도 차에서 내려 한강다리를 걸어서 건너고 있었다.
그를 호위하던 장교들 가운데 한웅진 준장과 이석제 중령의 증언을 통해서 상황을 복원해본다.
박정희 일행은 중지도, 즉 한강다리의 중간 지점을 지나 북쪽으로 걸어갔다.
북단에는 제3의 저지선이 있었다. 트럭 4대를 동원하여 차단벽을 만든 것이다.
트럭들 좌우측에서 헌병들이 매복하여 총을 쏘고 있었다.
해병들은 상체를 숙이고 뛰어가 저지 선 앞에서 엎드려 응사하고 있었다.
헌병들의 병력이 얼마인지를 알 수가 없었으니 불안감은 더했다.
박정희 소장이 상체를 숙이지도 않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카빈을 든 이석제 중령이 따랐다. 그는 6·25동란 때 중대장으로 전투한 경험이 생각났다.
'사람이 아무리 빨라도 총알을 피할 수는 없다. 총알이 사람을 피하지, 사람이 총알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경험칙이 있었다.
전쟁터에서 그런 믿음에 따라 행동하니 부하들이 용감한 중대장이라고 존경해마지 않았다.
총알을 고개 숙여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는 이석제와 박정희가 꼿꼿하게 걸어가는데 총알이 옆으로 쌩쌩거리며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김윤근 준장이 박정희에게 뛰어왔다.
"또 다른 저지선이 있습니다. 앞으로 저지선이 몇 개나 더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날이 새기 전에 목표 점령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대로 밀어버리시오.".
박정희의 침착하고 단호한 태도에 김윤근 준장도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박정희는 해병대가 작전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난간에 기대어 담배 를 피워물었다.
이석제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각하, 일이 끝내 안되면 각하 바로 옆 말뚝은 제 것입니다.".
박정희는 씩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더란 것이다.
"사람의 목숨이 하나뿐인데 그렇게 간단하게 죽어서 쓰나.".
잠시 후 박정희는 "이 중령"하고 불렀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제2안대로 합시다.".
박정희가 생각한 제2안이란 출동한 부대로써 일정한 지역을 점거하고는 정부와 담판한다는 것이었다.
한웅진은 "박 장군은 총격전이 오고 가는 상황에서 난간을 잡고 물끄러미 강물을 내려다보더니 일본말로 '주사위는 던져졌어'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나중에 한웅진은 "형님, 그때 강물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하고 물었다고 한다.
박 정희는 "가족들 얼굴이 강물에 떠오르더군"이라고 말하더란 것이다.
이 순간 박정희의 결연한 태도가 흔들리는 장교들의 마음을 다잡아 주었다는 증언은 많다.
예기치 않은 저항을 받은 혁명군 장교들 모두가 박정희를 주시하고 있었고 박정희는 그들에게 용기와 확신을 심어주는 행동을 보였다.
결정적 순간의 이런 결정적 행동이 그 뒤 18년간 단 한 번도 정면도전을 받지 않은 그의 지도력과 권위의 원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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