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글), 나는 5.16 革命軍 先鋒部隊 小隊長이었다!】
나는 5 16 혁명군, 선봉 부대 소대장이었다. (두번째 글)
김 피터 (박사, 교수)
‘하나의 ‘가장 길었던 밤 (The Longest Night)’
대대본부 ‘상황실’에서의 ‘작전 명령’ 하달을 받고, 중대 본부로 돌아오자, 또 중대장으로부터의 중대 행동 계획에 대한 자세한 지시 사항들을 들은 후,소대장들은 각자의 소대 막사로 돌아왔다.
우선 소대원 전원을 비상소집 시켰다. 해병대의 전투 소대는 그당시, 육군 체제보다 수가 많은 43명이 정원이였다.
왜냐하면 해병대는 상륙 공격전을 수행하는 부대로서, 공격 쪽에서는 방어 측 보다 희생이 더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소대원들에게, 대대장이 상황실에서 했던 거창한 내용이 아닌, 간단한 ‘혁명 봉기’의 당위성과앞으로의 각 분대 행동지침을 시달하였다.
그리고는 출동 준비에 들어갔다.
각자 총기 점검, 탄환, 수류탄, 건빵 등 필요한 장비, 비품들의 지급 등등, 준비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모두 눈이 돌아갈 정도로 뛰어 다녔다.
모든 출동 준비가 끝났다.
철모를 쓰고 권총을 차고, 완전 무장한 소대원들과 함께 배당된 트럭에 올랐다.
굳게 입을 다문 소대원들의 사기는 충천해 보였다.
드디어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한 우리 해병 혁명군을 실은 긴 차량 행렬이 수도 서울을 향하여 김포 반도 지역을 서서히 빠져 나가고 있었다.
5 16 혁명군 해병 부대 지휘관들
그때 우리 5 16 혁명군, 해병부대의 총지휘관은 해병 제1여단장인 '김 윤근' 준장(당시)이였다.
그는 강직하고, 부정을 모르며, 욕심이 없는 청렴한 전형적인 군인이다.
그는 만주 신경 군관학교 제 6기생 출신인데,그의 선배로 같은 군관학교 1기생 출신인 '김 동하' 해병 소장이 있다.
'김 동하' 소장은 6 25전쟁 때, 저 유명한 ‘펀치 보울{Punch Bowl}’ 전투에서의 승리 등 수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역전의 용사이다.
(그는 5.16 혁명후에, ‘군의 원대 복귀’ , '김 종필'의 권력 견제 등을 강하게 주장하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그는 이른 바 ‘알라스카 토벌 작전’의 희생자가 되어 감옥에서 고생하기도 했었다.
말년에 그는, 해병대 사령부가 결국 박정희의 육군측에 의해 해산되었다고 생각해,
해병대를 5 16 혁명에 끌어 드린 것에 대해 후회를 많이 했다고 한다.)
'김 동하' 소장은, 같은 ‘군관학교’ 후배인 '박 정희' 소장(2기)과 국가를 구하기 위하여 군이 궐기해야 된다는 것에 대한 뜻을 같이 하고 있었었다.
같은 군관학교 출신이며 해병대 후배인 '김 윤근' 준장이 '김 동하' 소장 집에서 역시 군관학교 선배인 '박 정희' 소장을 만나게 된 것은 우연 만은 아니다. ,,.
바로 이 세사람의 만남이 결국 후일 대한민국 역사를 바꾸는 ‘운명’의 만남이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 주목할 것이 하나 있다.
'김 윤근'은 전형적인 군인이므로, 아무리 사회가 어지러워도, 군이 나서서 무언가 ‘혁명’ 같은 것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에 대해 처음에는 전혀 찬성하지 않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 동하' 소장과 '박 정희' 소장이‘이 위기에 처한 조국의 현실을 그대로 두고 볼수 없다.
이제는 군이 나서야 한다’ 는강한 설득에 의하여, 그들의 계획에 어느정도 동조는 했으나, 마음 속으로 ‘그것은 아닌데’라는 생각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그만큼 그는, 군은 ‘국방’이라는 군 본연의 위치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는 정신을 가지고 있었던, 철저한 ‘군인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여기 또 하나 해병대가 혁명의 선봉에 서게 되는, ‘정의에 불타는’ 32세의 젊은 해병 장교가 있었다.
그는 해병 제 2연대, 제 1대대장 '오 정근' 중령이다.
(그는 5.16 혁명후, 국가 재건 최고 위원회 의원, 국세청장, 국회의원 등을 역임했었다)
그리고 제2연대의 부연대장, '조 남철' 중령, (추후 그도 국가 재건 최고회의 의원, 국회의원 등을 역임)과 연대 인사참모였던 '최 용관' 소령 등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나, 해병대의 5.16혁명 거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핵심 인물 들이였다.
'오 정근', '조 남철', '최 용관', 이 세사람은 서로 만나면 국가의 현실과 장래에 대하여 걱정하는 얘기들을 나누며 의기 투합하는 가까운 사이 들이엿다.
1961년, 3월의 어느날, 같은 해병 여단 관활 지역인 강화도의 어느 조용한 식당에서 이 세사람이 만나 식사하면서, 드디어 그들은 해병대 단독으로 ‘혁명’을 일으키자는데 뜻을 모았다.
그리고 그들이 존경하는 '김 윤근' 여단장을 지휘관으로 모시기로 결의하는데 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그당시, '오 정근' 대대장의 직속상관인 제 2연대장으로 '박' 모 대령이 있었는데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혁명 대열’에서 제외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 '오 정근'이나 '김 윤근'은 그를 신뢰할만한 인물로는 보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그 얼마전, 최전방 소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중대장으로부터 소대장 전원, 중대 본부로 집합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철모를 쓰고 권총을 차고, 전령 1명을 대동하고 중대 본부로 달려갔다.
연대장이 시찰 나온다는 것이였다.
그때 중대장은 '허 만수' 대위였는데, 그는 아주 호탕한 성격으로 먹고 마시고 노는데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다.
신학대학 출신인 나를 무척 신뢰하고 중대 내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나를 불러 의논하거나, 또 내게 해결을 맡기는 일이 더러 있었다.
중대장을 비롯해서 우리 소대장들, 그리고 중대 본부 요원들이 모두 도열해 연대장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연대장의 찝차가 도착했다.
우리는 모두 거수 경례를 부치며 큰 소리로 ’필승!’을 외쳤다.
그런데 연대장은 찝차에서 내리자마자 중대장을 향하여
"너 이새끼, 무슨 일을 그따위로 해. 아직도 정신차리지 못했어?”
라고 소리치며 군화발로 ‘쪼인트를 까고’
( 무릎 아래 다리뼈를 차는 것을 말하는데 무척 아프다.),
지휘봉으로 머리를 마구 때리는것이었다.
물론 철모를 쓰고 있었으므로 머리는 아프지 않겠지만, 이는 일종의 모욕인 것이다.
중대장이 아무리 잘못했어도, 부하들 앞에서 상관인 중대장을 그렇게 모욕을 주는 연대장의 행동을 보고, 나는 그 후 부터 그 연대장을 전혀 존경하지 않게 되었다.
이런 ‘사려’ 깊지 못하고, 즉흥적인 행동을 잘하는 면이 있는 관계인지는 모르나, '조' 연대장은 혁명대열에서 제외되었다.
'오 정근' 대대장, '조 남철' 부연대장, '최 용관' 인사참모, 세사람은 '김 윤근' 여단장에게 찾아가 조국을 향한 자기들의 불타는 애국심을 토로하고 해병대 단독의 ‘혁명 봉기’를 제의하였다.
'김 윤근' 여단장은 “해병대 단독으로는 성공하기 어렵다. 육군의 '박 정희' 장군 쪽에서 거군적으로 계획하고 있으니 거기에 함께 합류하자.” 고 설명하여, 결국 그들은 육군쪽과 연대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렇게 해서 해병대 혁명 세력이 '김 윤근'을 통하여' 박 정희', '김 동하'의 거사 계획 세력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박 정희'는 서울에 가까이 있는 해병 여단을 혁명대열에 끌어드리기 위해 '김 동하'를 통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한 것은 물론이다.
‘채플’에서 군목과 함께 기도한 사령관’
'오 정근' 중령의 지휘아래, ‘오리정’의 제 1대대 지역에서 출동 준비가 급하게 진행되던 같은 시각, 여단 본부에서는 여단장의 지휘 아래 혁명에 동조하는 각급 참모들이 발에 불이 날 정도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특히 통신참모 '문 성태' 소령은 김포반도로부터 한국군, 미군, 경찰, 등 서울 및 외부로 연결되는 모든 통신 선을 일시 절단하는 일도 하였다.
밤 11시경, 최종 준비를 하고 있던 '김 윤근' 장군은 비장한 마음을 안고, 부관을 대동하고, 여단본부 ‘채플’(교회)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김 윤근'은 본래 신앙심이 깊은 독실한 기독교 가정 출신이다.
여단 본부 교회는 여단 본부 지역내의 약간 언덕에 위치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퀀세트{Qunset}’ 건물이다.
그 옆에 군종참모실 막사가 위치해 있었다. (그당시는 군종도 하나의 참모부서였다)
그때 군종참모는 '김 광덕' 목사(소령)였다.
부관으로부터 여단장이 ‘채플’로 기도하러 간다는 연락을 받고, '김' 목사는 이 밤중에 왠일인가? 의아해 하며 채플에 가서 문을 열어 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채플에 함께 들어간 후 여단장은 '김' 목사에게 혁명에 대한 얘기를 간단히 설명해주고
“나를 위해서가 아니고, 이 혁명이 성공하여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도록,위하여 기도해 달라"
고 요청하였다.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김' 목사는 ‘나라를 위하여, 혁명의 성공을 위하여, 그리고 여단장과 혁명대열에 참가하는 모든 장병들의 안위를 위하여, 특히 피를 흘리지 않게 되기 위하여’ 정말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였다.
기도를 마치고 난후 여단장이 '김'목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목사님.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이제 마음이 편안합니다.”
아무리 군인 정신이 강한 '김' 장군이라 해도, 국가의 운명이 좌우되고, 또한 생사의 갈림길이 될수 있는 ‘군사 혁명’ 의 장도에 나서는데, 그 마음이 어찌 불안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그래서 목사의 기도를 받고 난후에 새로운 힘을 얻게 되고, 그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말한 것이였다.
모든 출동준비를 마친 우리 해병 ‘혁명군’의 각부대는 ‘구국’의 뜨거운 마음을 다지며, 드디어 새벽 1시경, 목표 서울을 향하여, 김포반도에서 출발하였다.
해병 혁명군 부대 인원은 모두 약 1300명 정도의 수였지만, 모두 일당백의 사기 충천한 ‘귀신 잡는’ 해병들이다.
주력부대는 해병 제 2연대, 제1대대이고, 그 뒤로 다른 대대에서 보충되어 온 부대들, 그리고 1개 전차중대, 1개 포병중대, 1개 공병 중대, 통신 중대 및 본부 지원 중대 등이 따랐다.
부대를 출발할 때, 우리는, 지시에 의하여 모두 자동차의 ‘헤드 라이트’를 끈 채, 될수록, 저속으로 차를 움직였다.
이유는 그 당시 여단본부 옆에 있는 ‘미군 고문단 요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만일 ‘미군 고문단’에서 알게 되면 이것은 큰 문제가 될 수 있고, 우리는 출동을 저지 당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최전방 방어에 임하고 있는 부대를 이동 시키려면 미군 측의 동의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서부전선 병력의 약 3분의 1이 자리를 뜨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얘기지만, 만일 그때에, 지금처럼 미국 측에 ‘인공위성’을 통해 지상의 이동 물체를 일일히 추적하는 장치가 있었다면, 우리의 출동은 즉각 발각이 되었을 것이고 혁명계획은 아마 좌절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그런 ‘위성 추적’ 씨스템이나, 또한 ‘휴대폰’ 같은 것도 없었다.
여단 본부와 미 고문단 막사가 있는 지역을 통과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자동차의 헤드 라이트를 밝게 켜고, 일로 서울을 향해서 속도를 내며 달려 나갔다.
나는 트럭의 운전석 옆 자리에 앉아, 스처가는 김포 평야의 어둠을 바라보면서, 여러가지 상념에 잠겼다.
‘과연 총을 들고, 대한민국의 심장부 서울을 향하여, 다른 말하면 ‘나라를 뒤엎으려’나가는 이 길이 바른 길인가?'
‘ 지금 서울에는 나의 사랑하는 부모 형제, 친구들이 있다.
‘구국’의 결단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현정부를 무력으로 전복시키려고 나가는 길이다.
그때 내가 비록 말단 초급 장교, 1개 소대장에 불과했지만 ‘목숨을 내걸고 나가는 ’ 혁명대열에 참가하면서 어찌 착잡한 감정이 없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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