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와 5·16혁명

【(세번째 글) 나는 5.16 革命軍 先鋒部隊 小隊長이었다!】

머린코341(mc341) 2015. 10. 26. 16:39

【(세번째 글) 나는 5.16 革命軍 先鋒部隊 小隊長이었다!】


5,16 혁명 수기( 3 )- 새벽, 한강 교에서의 ‘총격전’


김 피터 ( 박사, 교수)


(금년은 5 16 혁명,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지금까지 5 16에 관한 이야기들이 주도층에 의해서 많이 나왔습니다.
필자는 당시 혁명군 (해병) 선봉 소대장으로 참가 했었습니다.
하나의 말단 지휘관인 일선 해병소대장의 입장에서, 쓴 글도 필요할 것 같아,
이글을 올립니다.
이 글은 필자의 동의 없이 전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_ 필자)


우리 해병 혁명 궐기군을 실은 트럭 대열은 행진을 계속하여 눈에 익은 김포읍(당시) 시가지를 지났다.


트럭 앞자리에 앉아 달리면서 머리에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상념을 지우려고 차의 유리문을 내리니, 5월의 쌀쌀한 밤 바람이 볼을 스친다.


염창교 검문소 지역에 왔을 때 잠깐 행렬이 멈추었다.


전투모에 두 개의 별이 선명히 보이는 육군 장성을 비롯한 일단의 장교들이 우리를 향해서 손을 들어 흔들며 반갑게 인사를 보내고 있었다.


그 별 두개의 장성이 바로 '박 정희' 소장이었다는 것은 후에 안 사실이다.

 

‘염창교’에서 본 박정희 소장

 

그러면 왜 5 16 혁명군의 최고 중심인물인 '박 정희' 장군이 서울 시내의 ‘요충지대’에 위치하여 혁명을 진두 지휘하지 않고, 몇몇 장교만을 거느리고, 이 변두리 지역, 염창교까지 나와서 우리 해병부대의 행진을 환영하고 있는 것인가?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5월 15일 밤 10시경, 육군 참모총장 '장 도영' 장군은 방첩부대장으로부터 '박 정희'의 군사 혁명 전모를 보고받고, 혁명군으로 출동 준비중인, 김포의 공수부대, 부평의 33예비사단, 수색의 30예비사단 등에 출동 정지 명령을 내렸다.


김포 해병 여단에는 연락을 시도했으나 모든 통신이 두절상태였다.


그는 제 7헌병 대장에게 명하여, 한강 대교를 바리케이드로 차단하고 헌병대 병력을 배치하여 모든 통행을 저지하라고 명령했다.

 

일촉 즉발의 위기와 혼란 가운데서 ‘D-Day’, 16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6관구 사령부에 있던 '박 정희' 소장은, 0시 30분경


출동 예정부대들이 참모총장의 명에 의하여 저지당하고 있는 사실을 파악하고, 이제 믿을 곳은 공수단과 해병대라고 판단하여, 김포 가도로 달려 나갔다.


먼저 공수부대를 찾아가 출동을 독려했다.
그러나 공수단장 '박 치옥' 대령 역시 참모총장의 명령을 받고 부대출동을 막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해병대가 유일한 부대였다.


그래서 '박 정희'는 해병대의 서울 진입 예정지인 ‘염창교’ 지역으로 달려 왔던 것이다.


어둠을 뚫고, 거침없이, 용맹스럽게 달려오는 수많은 해병부대 추럭의 불빛 행렬!
그것을 바라보는 '박'장군의 두 눈에 이슬이 어른거렸다.


'박'소장은 '김 윤군' 준장에게 자세한 상황을 설명하지는 않았다.


다만 문제가 좀 생겼으니 해병대 가 ‘제 1진’으로, 한강대교를 통해 서울로 먼저 진입하라고 얘기했다.

(본래 계획은 공수부대가 제 1진으로, 해병부대는 제2진으로 서울로 진입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때, 겁 없는, 한 해병 소대장의 눈에는, 염창교에서 몇몇 장교들과 함께 서 있던 그 ‘2성 장군’의 모습이 좀 초라해 보였다고 하면, 아주 건방진 소리임에 틀림이 없다.

 

하나의 ‘잊혀진 전투’( A forgotten battle)

 

새벽 3시30분경, 드디어 우리 해병부대는 한강 대교(그때는 ‘한강 인도교’라고 불렀으며, 당시 한강에는 철교와 인도교, 두 개의 다리만 있었다.) 에 이르렀다.


그런데 거기에는 육군 헌병 찝차가 길을 막고 있었고 헌병들이 총을 겨누고 경계를 서고 있었다.


제일 선두에 있던 2중대장 '이 준섭' 대위가 차에서 내리며, 길 한가운데 서있는 헌병 대위에게 다가가,
 “우리는 연천으로 야간 기동훈련을 나가는 중이니 길을 비키시오”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헌병 대위는 험상궂은 얼굴 울 하며,
 “육군 참모총장의 명령에 의하여, 어떤 차량이나 부대도 한강을 넘어 갈수 없으니 돌아가시오.”
라고 응수하였다.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찝차 한대가 달려왔다.


대대장 '오 정근' 중령이 권총을 빼 들고 차에서 뛰어 내렸다.


그는 “ 빨리 물러서라” 고 소리쳤으나 헌병 대위는 완강하였다.

화가 난 '오 정근' 중령이 권총을 들어 방아쇠를 당겼다.  “탕!”


새벽 밤하늘을 가르며 퍼진 이 한방의 총소리야말로 수도 서울을 향하여, 5 16 군사혁명의 봉화 불을 올리는 하나의 신호탄이 되었다.


그러자 헌병 대위와 길을 막고 있던 헌병들이 급히 한강대교 쪽으로 사라졌다.

 

다음 순간, 한강교 쪽에서 헌병들의 사격이 개시되었다.


거기에는 이미 참모총장의 명령에 의하여 헌병들의 ‘방어 저지선’이 구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강다리 중간 ‘경찰 파출소’쪽과 노량진 쪽 한강 다리 입구에 여러 대의 GMC 트럭으로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헌병 병력이 전투 준비에 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해병들은 급히 트럭에서 뛰어내려 산개하며 전투 자세로 들어갔다.


드디어 헌병부대와 우리 해병부대간에 불꽃 튀는 총격전’이 시작되었다.


제일 앞 선두에서 지휘하던 예의 우리 2중대장 '이'대위가 먼저 총에 맞아 쓰러졌다.

 

 그런데 이 ‘전투’의 초기에는 우리 해병 쪽이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왜냐하면 모든 전투에서 중요한 것은 ‘정보’인데, 우리는 지금 상대 쪽의 병력 수나 화력이나 방어체계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


그리고 지금 전투 지역이 제한된 공간 즉 좁은 다리 위이다.


먼저 도착해서 방어체계를 구축해 놓은 ‘방어’ 쪽이 ‘공격’쪽보다 훨신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해병 부대의 김윤근 여단장을 비롯한 지휘부 장교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대부분 6 25 전쟁에서 싸웠던 역전의 용사들이다.
이런 작은 전투에서 당황할 사람들이 아니다.


더구나 우리가 누구인가?  귀신도 잡는다는 용맹한 ‘무적 해병’이다.

 

그러나 나 자신은 어떤가?
실전 경험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군대 생활도 얼마 안 되는, ‘소위’ 계급을 달고 있는 하급 장교이다.


피를 흘리는 부상자들을 볼 때 이 전투에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쳐가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 한강 다리에 이미 저지선이 구축되어 있다면, 서울 시내에는 ‘반 혁명’의 대규모 육군 부대들이 방어선을 구축하고 우리 해병 ‘혁명군’을 대항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허리를 굽히고, 다리 난간에 몸을 숨기며, 전진하면서도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가,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대규모의 전투도 아니 였지만 그때는 상황이 아주 당황스럽고 급박했었다.


이 한강 저지선을 돌파하지 못하면 우리의 ‘혁명 계획’은 실패될 것이고, 따라서 우리 모두는 국가변란을 획책한 ’반역자’가 되어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밤하늘에 콩뽁듯 교차되는 총소리, 다리 난간에 맞아 ‘핑’ ‘핑’ 소리를 내며 튀는 유탄 소리, 들것에 실려가는 부상병, 내속에서 하나의 ‘뜨거운’것이 솟구침을 느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전진 하라!’ ‘겁내지 마라!”  “쏘아랏!” 소리치면서 소대원들과 함께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총을 마구 쏘아댔다.


  첫 번째 ‘저지선’을 통과하고 전진하자, 제2의 저지선이 나타났다.


바리케이드로 만든 여러 대의 트럭이 완전히 길을 차단하고 있었고, 강한 ‘헤드라이트’ 불빛이 우리의 전진을 막고 있었다.


“헤드라이트’를 조준 사격하라!” 는 대대장의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의 집중사격을 받고 모든 불빛이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편의 트럭이 달려나가 바리케이드 트럭들을 밀어냈다.

 

드디어 한강의 방어선을 완전히 돌파하고 우리는 다시 부대를 재정비하고, 조심하면서 서울시내로의 진입을 개시하였다.


 뒤돌아보니 그 육중한 한강 다리는 우리들의 총탄에 가로등이 다 깨진 채, 어둠속에서 말없이 그 자태를 드러내 놓고 있었다.


말없는 한강 대교. 그러나 너는 후일, 거기서, 진정 아무 사심 없이, 오직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선, 우리 해병들의 흘린 피가 헛되지 않았음을 증언해 주리라. 

 

1961년 5월 16일 새벽의 그 ‘치열했던’(그때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한강교 총격전’은, 그러나 하나의 ‘잊혀진 전투’(The forgotten battle) 가 되었다.


거기서 부상당한 장병들에게 무슨 보상이 주어진 일도 없다.


‘5 16 혁명’의 최선봉에 서서, 최초의 ‘반 혁명군’을 물리치고, 그래서 5 16 혁명을 가능케 했던, 우리 해병부대 누구에게도 무슨 ‘공로’를 인정하는 ‘상훈’ 같은 것도 물론 없었다.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혁명 주도 측에서는, ‘ 5,16 이 ‘무혈 혁명’이라는 명분을 내 세우기 위해’, 그리고 5 16 혁명을 인정하지 않는 측에서는, ‘아무런 가치 없는 총격전’이라고 비하하는 가운데, 그날 새벽, 목숨을 걸고 싸운, 우리 해병대의 희생은 철저히 그렇게 역사에서 무시 되고 잊혀저 갔다.


======= To be continued No.6ㅡ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