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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기(‘52년) - 육군1사단장을 홀대한 백남표 중령

머린코341(mc341) 2015. 11. 20. 15:02

6·25전쟁기(‘52년) - 육군1사단장을 홀대한 백남표 중령

 
과거(6․25 전쟁 전) 해군제 1정대사령부 참모장 겸 헌병대장을 역임한 데 이어 소령의 계급으로 해군본부 초대 헌병감을 역임했던 백남표(白南豹중경은 통제부 방위대에 소속되어 있던 ‘50년 8월 초순경 마산에 주둔하고 있던 미 25사단장의 통역관으로 부임 중인 현봉학씨를 납치하여 진동리의 김성은 부대장에게 인계해 줌으로써 해병대와의 인상깊은 첫 인연을 맺었고, 9․28 수복 직후 (10,2)에는 통제부 방위사령 (김석범대령)의 명령으로 1개 중대의 병력을 이끌고 목포에 상륙, 목포 형무소의 옥문을 열어 380명의 수감자를 석방해 주었을 뿐 아니라 목포 시민들의 수복을 위해 아비지한 공로로 미국 정부로부터 리전오브메리트훈장을 받았던 그는 또한, 독립5대대장 재임 시에는 육군 1사단장 강문봉 준장을 홀대(忽待)한 일이 불씨가 되어 국일관(國一館)에서 강문봉 사단장을 추격하는 기인적(奇人的)인 드라마를 연출하기도 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하얼빈 대도관중학 출신인 백남포 중령은 8․15 후에 귀국하여 46년 2월 창군기의 해방병단 에 입대하여 그해 10월 소위로 임관했고, 6․25 전쟁 초기에는 통제부방위대에 배치되어 있던 중, 8월 초 미 25사단장 통역관으로 부임하는 현봉학씨가 해군본부의 지프를 타고 마산에 도착하자 그를 진동리로 연행, 통역할 사람이 없어 불편을 느끼고 있는 김성은 부대장에게 인계하여 큰 도움이 되게 했었다. 뒤늦게 알려졌지만 그 현봉학씨는 현시학제독(해사1기)의 친형으로 그 해 4월 도미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모교인 세브란스의대 병리학 교수로 재직 중에 있었다.

 
한편 9․28수복 직후인 10월 2일 1개 중대의 병력을 이끌고 703함을 타고 목포에 상륙했던 백남표 중대장은 목포 형무소의 옥문을 열어 모든 수감자들을 석방시켜 주는 조치를 취하는 한편 영암지구에 대한 적 패잔병 소탕전을 벌였는데, 그러는 과정에서 수색조가 찾아낸 한국은행권 지폐가 가득 들어 있는 가마니 32개를 목포 시내의 금융기관장들에게 제공 해 줌으로써 공황상태에 있던 금융기관에 생기를 되찾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 당시 폭포에는 수십 명의 서울 유학생들이 있었는데 ‘우국학생계몽단’이란 단체를 조직해 놓고 있던 그 학생들을 위해 극장에서의 반공강연회와 웅변대회 또는 시민 위문공연 등 그들이 주최한 모든 행사가 원만하게 추진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해 주었고, 또 백남표배(柸)를 제정하여 각 중․고등학교 대항 배구시합도 개최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후 중령의 계급으로 해군본부 헌병대장을 역임했던 백남표 중령은 51년 해병대로 전입하여 독립5대대장으로 임명되었는데, 그 5대대장 재임기간 중 그는 이런 일들을 겪었다.

 
즉 부임 후 처음으로 대대본부를 방문한 육군1사단장 강문봉 준장을 전임 대대장 이봉출 소령처럼 누산리까지 가서 마중을 하지 않고 대대본부 정문에서 마중을 했고, 또한 브리핑이 끝난 후에도 인천으로 모시고 가서 극진하게 오찬을 대접했던 관례를 깨고 대대본부 식당에서 대접한 것이 감정상의 앙금이 되어 1사단 본부(파주)에서 소집한 지휘관회의 석상에서 강문봉 사단장이 정학한 국사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핀잔을 주어 모욕감을 느끼게 하자 백납표 중령은 감문봉 사단장의 신경군관학교 선배인 김동하 대령(당시 1연대장)의 도움으로 화해술을 내기 위해 강문봉 장군을 국일관(國一館)으로 초대했는데 미인들이 시중을 들고 김동하 대령도 합석한 그 만찬장에서 당사자 간에 어떤 말을 주고받다가 그렇게 되었는진 알 수 없으나 바깥에서 들으니 갑자가 술상을 뒤엎는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만 이내 감문봉 장군이 2명의 수행장교(대령급)와 함께 그 방에서 뛰쳐나왔고, 그러한 경황 속에 “이 새끼들 죽여 버리겠어!”하고 소리치는 백남표 중령의 노기띤 목소리와 “백 중령, 참으시오 참아”하는 김동하 대령의 말소리가 엇갈리며 흘러 나왔다. 그런데 헤프닝은 그것으로 끝장이 나지 않고 제2장이 연출되었다.

 
만취한 상태에서 권총을 빼들고 있던 백남표 중령이 허겁지겁 지프차에 올라타고선 운전병에게 이미 자취를 감춰 버린 감문봉 사단장의 지프차를 추격하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운전병과 전령(강윤희 해병. 4기)을 난처하게 했다. 그러나 졸음에 겨워 꾸벅거리고 있던 백 중령은 운전병과 전령에 의해 부대로 호송됨으로써 아무런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당시 5대대는 육군1사단의 작전 통제를 받고 있었다.

 
장단지구에서 수행한 수십 차례의 야간 기습전 중 52년 7월 3일 밤에 수행한 5대대 53중대의 기습전처럼 실패했던 기습전은 없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에 사천강을 건너갔던 2개 소대의 기습대는 목표지역에 도달하는 시간과 도착하여 공격을 개시하는 시간이 지체된 상태에서 기도가 탄로나 적군의 일제사격이 가해지는 바람에 공격소대나 지원소대 할 것 없이 지리멸렬하여 강변으로 철수했으나 엄청나게 불어난 강물 때문에 경기관총과 화염방사기 등 모든 화기를 강물 속에 집어 던져 버리고 맨몸으로 헤엄쳐 철수하는 과정에서 10 명의 익사자가 발생하는 등 피해가 막심했다.

 
다행이도 그 화기들은 그 이튿날부터 나흘 동안 53중대장 박병호 중위가 수영을 잘 하는 제주도 출신 대원들을 야간에 투입하여 한 정도 빠짐없이 건져내었지만 그 일로 인해 평소 연대장(김석범 대령)으로부터 기습대를 내 보내라고 종용을 받을 때마다 포로 때문에 대원들을 죽일 수는 없다며 항명(抗命)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 그는 결국 연대장에 의해 직위 해제를 당하는 불운을 겪었다.

 
그 후 (휴전 후) 2 연대 부연대장을 역임했던 박남표 중령은 년 중령의 계급으로 예편한 뒤 고향인 경기도 파주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여당 후보에게 1500표의 표차로 석패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후 (80년대 초) 몇 몇 동지들과 뜻을 모아 을지로 3가에 ‘하얼빈 친목회‘의 간판을 내 걸고 김종식, 한예택, 정봉익씨 등 군복을 벗은 몇몇 옛 동지들과 마작을 즐기며 친목을 도모해 왔던 그는 몇 해 전 그 동지회 사무실에 들렸다가 귀가하던 중 보행사고로 전철역 계단에 쓰러져 타계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1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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