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역대 해병대사령관

6.25 전쟁영웅, 김성은 장군의 거대한 생애

머린코341(mc341) 2016. 8. 13. 07:14

6.25 전쟁영웅, 김성은 장군의 거대한 생애


한국 해병대 사상 최초로 단독 상륙작전 지휘   

6.25 전쟁영웅 김성은 전 국방장관이 지난 15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3세. 고인은 지난 1946년 해군 소위로 임관해 6.25 전쟁 당시 진동리 전투, 통영상륙작전, 도솔산 전투 등 수 많은 전장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워 태극무공훈장과 미 은성무공훈장 등 총 19개의 무공훈장을 받았다. 이에 <프리존뉴스>는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의 앞날을 염려했던 고인의 거대한 생애를 되짚어본다. <편집자 주>


▲ 6.25 전쟁 당시의 김성은(사진 중앙) 장군의 모습.ⓒ 해병대전우회중앙회 홈페이지 

 
해병대 출신 최초로 국방장관을 지낸 고(故) 김성은 장군(1924년 3월 14일~2007년 5월 15일)은 19세의 나이로 만주 하얼빈 농대를 수료한 엘리트로 해방 이듬해인 1946년 4월 1일 해군병학교를 특임으로 졸업하고 해군 참위(소위)로 임관했다.

 
해병대사령부 창설당시 중령으로 진급한 그는 참모장으로 보임되어 해병대의 육성 강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하자 김성은 중령은 500여명의 해병대원으로 구성된 ‘김성은 부대’를 지휘해 전쟁 초반 남원·함양·진주지구에서 지연작전을 전개했다.

 
진동리지구전투: 1950년 8월 1일 서부지구전투사령부로부터 진동리 서방에서 적을 저지·섬멸하라는 명령을 받은 김성은 부대는 다음날 고사리 지서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적정파악을 위한 정찰을 실시해 제2중대를 부현에, 제3중대를 고사리 남방 428.3고지 서측에 배치했다. 8월 3일 북한군 정찰대대가 전차를 선두로 진동리를 향해 다가오자 334.8 고지의 제7중대와 428.3 고지의 제3중대는 맹렬한 화력을 집중해 이들을 격퇴시켰다.

 
진동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성은 부대는 이후 미 제25사단 예하 제24연대에 배속돼 마산방어에 투입됐다. 부산 서방 50킬로미터에 위치한 마산은 부산 서측방의 관문으로 마산방어의 성패는 부산교두보 확보와 직결되는 전략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한편, 미 제8군은 적의 주공이 대구전선에 집중되자 이를 분산시켜 압력을 완화할 목적으로 미 제25사단에 역습을 명령했다. 이에 김성은 중령이 지휘하는 한국 해병대는 ‘미 제24연대는 킨(Kean) 특수임무부대의 예비대로서 서북산 일대를 공격해 진동리-함안 도로를 확보한다’는 기동계획에 의거 8월 5일 15시 30분 진동리에 도착했다. 이윽고 마산-진동리 가도의 타개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해병 제7중대는 적이 진출해 있던 340.4 고지를 공격했다.

 
제7중대는 적진 최단거리에 접근해 일제히 수류탄전을 거듭하면서 적진을 돌파, 피아 식별이 어려운 진내전이 전개되는 가운데 육박전을 감행해 다음날 13시 10분에 전략상 요지인 340.4고지를 탈환하고 미군에 인계한 다음 진동리로 철수했다.

 
이후 마산에서 다시 미 제 24사단으로 배속된 김성은 부대는 진해로부터 병력을 보강 받아 재차 진동리로 이동했다. 8월 10일 새벽 적이 해병기지로 침공해 오자 부대는 2시간 이상이나 계속된 접전 끝에 적을 격퇴시키고 날이 밝자 완강히 저항하는 적을 계속 추격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 11일 아침 8시를 기해 해병대의 공격목표인 서북산 능선일대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다. 포격의 지원 속에 이곳을 완전히 장악해 마산으로 통하는 보급로를 확보한 해병대는 이 지역을 미 제 25사단에 인계하고 다음 전투지 중암리로 이동했다. 중암리 전투에서도 대승한 김성은 부대는 8월 14일 진해로 개선했다.


▲ 김성은 장군은 6.25 전쟁 당시 한국 해병대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인 '통영상륙작전'(사진)을 성공적으로 지휘해 해병대가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애칭을 얻게 만들었다.ⓒ 유용원의 군사세계 

 
▲통영상륙작전: 서부지역의 진동면을 공격해 마산과 진해의 점령을 꾀했던 북한군은 김성은 부대의 굳건한 방어와 역공으로 침공이 좌절됐다. 이에 일부 병력을 남쪽으로 돌려 무방비상태에 있던 통영을 먼저 점령하고 이곳을 거점으로 해 견내량(見乃梁) 해협을 건너 마산항과 진해항을 봉쇄할 것을 기도했다.

 
이 같은 적의 작전에 대비해 우리군은 해병대를 통영에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이 임무를 역전의 부대인 김성은 부대에 맡겼다. 8월 16일 김성은 부대는 해군참모총장으로부터 즉시 거제도 서해안에 상륙해 통영에서 거제도로 침입하려는 적을 섬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거제도 방면의 전황이 급박하지 않음을 현지의 정찰대 보고로 접한 김성은 부대는 작전을 변경해 줄 것을 해군본부에 건의하였다. 그의 작전은 소규모 병력으로 거제도 일원을 지키기 보다는 전 병력을 통영군 장평리에 상륙시킨 다음 일부병력을 원문 고개로 진출시켜 북한군의 후속을 차단하고 주력부대로 통영읍내의 적을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변경된 작전의 수행을 위해 17일 밤 해군은 해병대가 적의 저항 없이 성공적인 상륙작전을 감행할 수 있도록 함정을 동원해 통영 해안에 대한 일제 포격을 가했다. 마침 이때 북한군은 우리 해병대가 통영항구 정면으로 상륙해 올 것이라고 판단하고 북쪽고지에 있던 병력들을 야음을 타 급히 남해안일대로 이동 배치한 상황이었다.

 
북한군의 허를 찔러 무혈상륙에 성공한 해병대는 목적지점으로 진격하면서 적에게 기습공격을 가해 대다수의 적을 섬멸한 뒤 곧바로 통영 시내로 진격했다. 뜻하지 않은 곳으로부터 아군의 공격을 받은 적은 당황해 제대로 대응치도 못하고 전의를 잃고 도주했다.

 
18일 하오 해병대는 최후목표인 178고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해 완강히 저항하는 적을 패주시키고, 19일 새벽 고지를 탈환한 후 통영 읍내로 진입해 잔적들을 모두 소탕했다. 작전에 성공한 해병대는 적의 반격에 대비하기 위해 원문고개에서 방어 작전을 폈다.

 
그러나 최후의 활로를 찾기 위해 인해전술로 해병진지에 침입한 북한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이 교전에서 아군은 4시간에 걸친 혈전 끝에 적군을 격퇴했다. 이후 20일과 22일에도 적의 침공은 계속됐으나 김성은 부대는 적을 무난히 격퇴시켰다.

 
해병대의 통영지구전투는 6.25 전쟁 중 전무후무하게 한국군 단독으로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전투이자 철수작전 수행 중 결행된 유일한 공격작전으로 전사에 남아있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적 사살 469명(아군 전사 15명), 포로 83명, 야포 3문, 중기관총 6문, 경기관총 22문, 다발총 128정, 박격포 2문 그밖에 각종무기·차· 장비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당신들은 정말 귀신도 잡을 만큼 놀라운 일을 해냈소.” 이 말은 전광석화와도 같은 김성은 장군의 묘수에 경탄을 금치 못한 외신 기자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당시 외신 기자들은 이 작전의 성공을 보도하는 기사에 ‘귀신 잡는 해병대’(The might capture even the Devil)라는 찬사를 썼다.


▲ 6.25 전쟁 참전 미군 전우(제럴드 러셀)와 재회(2004년 6월 23일)한 김성은 전 국방장관의 모습. 두 인물은 1950년 10월 도라산에 진을 친 해병대 제1전투여단에서 만났다. 당시 김성은 장군은 여단장이었고, 러셀 씨는 미 군사고문단 수석 중령으로 중공군과 대치하던 전선에서 6개월간 함께 머리를 맞대고 작전 수립에 골몰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병대전우회중앙회 홈페이지 

 
한편, 통영상륙작전을 승리로 이끈 김성은 부대는 이 전투 후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는 또 9.28서울 수복 작전에도 참가했다. 연희고지 전투와 104고지 전투에서도 그의 능력은 유감없이 발휘됐다. 그와 함께 전선에 투입된 해군사관학교 1기 졸업생 60여 명 중 대다수의 장교가 전사했다.

 
그는 1952년 10월 수도권 관문이었던 판문점인근 ‘사천강-장단지구전투’에서 중공군 2,700여 명을 전멸시켜 중공군의 남하를 막아내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당시 교착상태에 빠진 사천강-장단지구의 지휘관으로 발령받은 그는 함께 배치된 군목이었던 김덕순 목사와 함께 3일을 기도한 뒤, 중공군을 선제공격해 대승을 거두었다.

 
이처럼 6.25 전쟁 전 기간에 걸쳐 명장으로서 명성을 드높인 김성은 장군은 부하에 대한 사랑도 특별했다. 연일 계속된 전투로 기진맥진한 부하들의 참호를 일일이 찾아가 독려하고, 그들의 어려움을 이해함으로써 부하들이 안도하고 전투에 임할 수 있게 했다.


이후 그는 제1전투단장을 거쳐 해병대교육단장으로 근무하던 중 휴전협정 조인으로 전선이 안정되자 1953년 9월 16일 대령으로 해병학교장에 임명되어 해병교육단장을 겸임하며 정예해병 육성에 주력했고, 곧바로 해병 준장으로 진급했다.

 
▲전쟁 이후의 생애: 고인(故人)은 1957년 6월 소장으로 진급해 해병 제1사단장에 부임, 해병대가 오늘의 해병으로 발전 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59년 6월 해병대 부사령관에 이어 10월에는 참모장으로 임명됐으며, 1960년 6월 25일 해병 중장으로 진급과 동시에 해병대사령관에 보임되어 1962년 7월 예편할 때까지 복무했다.

 
군문을 나선 후 대한중공업 사장과 재향군인회장을 역임하고, 1963년 3월 국방부장관(당시 39세)에 발탁된 김성은 장군은 재임기간 중 자주국방을 위한 기초를 마련했을 만큼 국가방위력 증강에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군 최초로 구축함을 도입하고, 합동참모본부를 설치했다. 특히 그의 재임 당시 이루어진 월남 파병은 군사적으로는 군 전력향상의 토대가 되었고, 경제적으로는 1970년대 비약적인 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던 초석이 됐다.

 
한편, 1968년 1월 북한 무장공비의 청와대습격사건과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이 발생하자 안보태세의 강화를 위해 향토예비군을 창설했다. 그는 이 시기 미국의 군사원조를 당시 최강의 전폭기인 F-4 팬텀기 18대로 받아낼 정도로 군사적으로의 외교 감각도 뛰어나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신임을 받았으며, 미군의 장기 주둔을 예측하고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을 체결했다.

 
일생을 군과 나라를 위해 일한 고인은 마지막까지 대한민국의 앞날을 걱정했다. ‘한미연합사 해체 반대 1000만 명 서명추진본부’를 이끌었던 것. 실제로 그는 별세하기 며칠 전 본지 편집인을 비롯해 다수의 우파 인터넷 매체 관계자들과 만나 서명운동 확대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1000만 명 서명을 반드시 달성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피력하기도 했다.

 
[서울포스트]2007.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