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후의 발전기 - 해병대의 킨바에 스토리
일찌기 군에서 유행했던 킨바에(일본어의 금색 파리)란 말의 정의(定義)를 나름대로 규명해 본 바에 따르면 이익을 위해, 또는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모여드는 사람들, 말하자면 그렇게 해서 남의 것을 슬쩍 가져 가 버리는 행위를 음식물이 있는 곳으로 날아와 있다가 홀연히 날아가 버리는 똥파리와 같은 금색 파리에 비유한 말로 해석이 된다.
그리고 '킨바에'라는 이 좋지 못한 행위도 일본 해군으로부터 전수가 된 것으로 여겼지는데, 그렇다면 그 동안 해병대에서는 어떠한 킨바에 사건(행위)들이 일어났었는지 간략하게 그 내력을 더듬어 보기로 한다.
해병대의 킨바에 사건은 워낙 가난해서 가진 것이 없었던 창설기의 덕산시절이나 진주 및 제주도 주둔기에는 이렇다 할만한 얘깃거리가 없었으나 견물생심이란 말이 있듯 가진 것이 많아지고 눈에 띄는 것이 많았던 6.5전쟁 때부터는 일선지구에서나 후방부대 할 것 없이 간간이 실물사건이 일어나 대원들에게 비상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1.4후퇴 직후에는 1951년 2월 하순경 1연대 장병들이 진해에서 영덕으로 출동할 때 그들이 승선한 미 해군 LST 선상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지프차 안에 놓아 둔 준장 계급장이 붙어 있는 신현준 사령관의 가죽 털모자가 없어져 전속부관 염태복 견습사관이 함내 스피커를 통해 그 털모자를 제자리에 갖다 놓으면 처벌하지 않겠다고 방송을 한 끝에 그 범인(?)을 잡아 아구통 한 대를 갈겨 갑판 위에 쓰러뜨리는 것으로 처벌을 대신 했는데, 그 이튿날 수송선이 하저동 해안으로 근접하기 전 그 함정에 승선해 있던 미 해병대의 고문관들이 그 날 저녁에 먹어야 할 C레이숀을 죄다 킨바에 당해 울상을 짓는 바람에 연대장 김성은 대령의 입장을 몹시 난처하게 했었다.
1951년 여도(麗島)에서 발생했던 영국해병대 소대장의 자책(自責)과 관련된 여도부대 대원들의 킨바에 사건은 앞에서 언급을 했으므로 생략한다. 1952년 3월 중순경 평화도로(판문점-개성간) 오른쪽에 배치되어 있던 미 해병사단의 좌 일선부대의 어느 벙커에서는 모기장을 쳐 놓고 취침 중에 있던 미 해병대 병사들이 총기를 비롯한 많은 군수품을 도난 당한 사건이 발생하여 미 해병사단에서는 '차이늬스아미 보다 더 무서운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서 특히 좌측방 경계를 강화하라는 지시가 내렸다고 하는데, 그들의 좌측방에는 배수의 진을 친 KMC 뿐이었고, 또 가끔 백주에 평화도로를 횡단하여 접근해 가서는 물물교환을 해 간 사례가 있었으므로 그들로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KMC의 소행 일 것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전투단장 김석범 준장의 귀에까지 그러한 소문이 들어가게 되었는데, 전투단장 앞에서 그러한 얘기를 꺼낸 미 해병대 고문관은 "KMC 대원들은 모기장을 쳐놓고 잠을 자고 있는 USMC 대원들을 그 모기장으로 멍석말이를 하듯 꼼짝 못하게 해놓는 비상한 재주가 있는 모양인데, 그 비법을 좀 가르쳐 줄 순 없겠냐"고 하는 바람에 전투단장은 매우 곤혹스러운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휴전이 성립된 후 해병대의 전투 주력부대가 금촌과 파주지구에 주둔하고 있는 동안 외출 외박을 하러 나간 장교들 중에는 종로 2가에 있는 국일관에 들러 춤을 즐긴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러한 사람들 중에는 회대(稀代)의 엽색가(獵色家)라며 신문지상에 대서특필된 P 모라는 장교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대대의 중대장 유 모 대위에 관한 얘긴데 어느 날 오후 3시경 국일관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보니 골목길에 세워 둔 지프차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된 그 유 모 대위(해간 3기)는 때마침 현장에 도착한 육군 지프차 운전병이 시동을 걸어 둔 채 국일관 안으로 들어가자 저 차로 보충을 해야지 하는 생각이 뇌리에 스쳐 용감하게 그 차에 올라타곤 용케도 골목길을 빠져나가고 있었으나 잠시 후 뒤를 쫓는 육군 헌병대 차에 추격을 당하는 바람에 구파발 부근에 위치하고 있던 한·미 헌병대 검문소의 바리케이드를 돌파할 때까지 시속 100키로 이상의 속도로 필사적인 질주를 감행함으로써 그 검문소의 덕분으로 아슬아슬하게 육군 헌병대 차의 추격을 따돌리게 되었는데, 얼마나 악세레다를 밟아 댔던지 부대로 돌아와 점검을 해보니 죄다 녹아 버리고 없었다고 한다.
휴전 후 킨바에가 가장 성행되고 있던 곳은 신병훈련소였다. 그래서 훈련소의 훈련병들은 자신들의 모자나 총기의 부속품 같은 것을 잃어버릴세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한 훈련병이 어떤 물건을 잃어버리게 될 경우 그 소대의 전 훈련병이 단체기합을 받기 마련이었으므로 킨바에를 당하지 않으려고 철저한 경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열 사람이 도둑 하나를 못 당한다'는 속담이 있듯 아무리 경계를 해도 속수무책인 경우가 없지 않았다.
실례를 들면 소년 통신병으로 입대하여 후일 소설가가 된 오유권 씨의 말에 따르면 도어의 높이가 불과 1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 변소 안에서 대변을 보고 있던 중 소속을 알 수 없는 훈련병 하나가 등 뒤편으로부터 다가와 자기가 쓰고 있는 모자를 홀랑 벗겨 가는 바람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자신도 어쩔 수 없이 같은 수법을 구사했다고 하니 군 내부에서는 킨바에는 되풀이 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니고 있었다.
필자가 알고 있는 해병대 최대의 킨바에 사건은 1958년 파주지구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25사단 연병장에서 일어난 6군단장의 지프차 킨바에 사건이다. 정확한 날짜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그 사건의 개요는 이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3성장군(6군단장)을 예우하는 19발의 예포가 발사되는 가운데 6군단장(P 모 중장)이 도열한 행사부대 장병들 앞에서 거수경례로 답례를 하고 있을 때 대담하게도 귀빈 주차장에 나타난 해병대의 하사관 하나가 별판이 가려져 있지 않고 시동이 걸린 채 방치되어 있는 군단장 지프차를 몰고 행사장을 빠져 나가는 바람에 거수경례를 하고 있던 군단장이 한눈을 파는 등 졸지에 행사장의 분위기가 엉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해병대 하사관이 별판이 달린 군단장 차를 몰고 달아나자 현장에 있던 28사단 헌병대 차가 즉시 크락숀을 울리며 추격전을 벌였으나 금촌 어구에 있는 해병대 검문소에서 육군 헌병대 차가 정차를 강요당하는 바람에 결국 검문소를 무사 통과한 군단장차를 놓치고 말았던 것. 그 군단장 차 킨바에 사건의 말미는 이렇게 장식이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즉 입장이 난감해진 28사단장(S 모 준장)이 해병 제1사단장 김성은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해병대 하사관이 몰고 달아난 군단장차를 찾아 달라고 호소를 하자 김성은 사단장은 "내 차도 잃어버리면 찾지 못하는데···" 하고 난색을 표명했다는 그러한 얘기이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傳統과 秘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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