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 전통·비화

해외 출전<1편> - 안호아 관측소

머린코341(mc341) 2016. 10. 8. 23:07

해외 출전<1편> - 안호아 관측소


  1965년 8월 16일부터 9월 19일에 이르는 기간 중 투이호아지구로부터 추라이지구로 북상 이동했던 청룡부대는 9월 하순경부터 10월 하순경에 이르기까지 월남군과 미 해병대와 협동하여 바탄간반도 일대의 해안선을 차단하는 가운데 지역 내의 촌락에서 베트콩을 색출 소탕하고 양민들을 구호하기 위한 작전(비봉작전)을 전개했는데, 그 비봉작전 기간 중 추준호 대위가 지휘하는 청룡부대 수색소대는 명령에 따라 여단본부 동북방 약 20마일 지점에 있는 안호아(安和) 고지(해발 141미터)로 공수 이동하여 미 해병대의 정찰대가 월남군 1개 소대를 배속 받아 운용하고 있던 안호아 관측소와 '몬타냐' 산족중대가 배치된 약 10마일 밖의 '뉴트론' 관측소를 인수하게 되었는데, 그 안호아 관측소를 방어하는 동안 수색소대장 추준호 대위와 소대원들은 안호아촌의 재건을 위해 지극한 정성을 기울였다.


  고지 위에 2개의 헬기 착륙장이 마련되어 있는 그 안호아 관측소의 임무는 라오스와 베트남의 국경지대로부터 침투해 오는 월맹군의 동태를 감시, 보고하는 것이었고, 침투해 오는 적이 발견될 경우 그 관측소에 파견된 미 해병대의 엥글리코맨이 즉각 폭격과 포격을 유도하여 그 적을 공격하게 돼 있었다.


  사낭을 4단으로 쌓아올려 5~6미터 높이로 구축해 놓은 그 안호아산의 관측소 하부에는 견고한 동굴진지가 있고, 꽤 넓은 그 동굴진지 일각에는 1964년 월맹군의 기습공격으로 전멸을 당한 원남군 장병들(1개 중대)의 무덤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고지 아래에 있는 안호아촌에는 관측소의 보호를 받고 있는 약 1000명의 난민들이 있었는데, 남달리 신앙심이 깊었던 수색소대장 추 대위는 전혀 배움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그 마을 어린이들을 위해 교사도 지어 주고 운동장도 만들어 주려는 생각에서 무슨 두려움 때문인지 매사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촌장에게 대원들의 성금으로 구입한 소(청룡우로 명명) 한 마리를 제공하고서야 가까스로 부지를 확보한 다음 그 곳에 5칸짜리 교사도 짓고 배구와 축구를 할 수 있는 운동장도 마련해 주었을 뿐 아니라 학용품과 피아노까지 구해 주는 등 난민촌 어린이들의 계몽과 향학열 제고를 위해 헌신적인 사랑을 불태웠다.


  그리고 1967년 2월 하순 그 안호아 관측소에는 추 대위와 임무를 교대한 곽충도 대위가 부임을 했는데, 곽 대위가 부임한 후 '뉴트론' 관측소에서는 이런 일이 발생했다. 즉 어느 날 대낮에 벼락이 떨어져 관측소의 대원들이 기절을 하여 가사상태에 빠지고 말았는데, 그 때 그 뉴트론 고지에 살고 있던 몬타냐 산족들이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희한한 비법으로 기절해 있는 그 대원들을 소생시켜 준 것이었다. 그들이 썼던 그 비법이란 그 어떤 풀 잎사귀를 가지고 기절해 있는 대원들의 코와 입에 바람을 불어 넣어 입과 코에서 김이 나오게 하여 깨어나게 하는 마법 같은 것이었다.


  한편 그 무렵부터 안호아 관측소 밑의 난민촌에는 간혹 '라오스조선인연맹‘이란 글자가 적힌 수건과 삐라 및 인공기 등이 밤중에 뿌려지고 있었는데 그 삐라에는 해병들에게 전향(轉向)을 하여 라오스 국경을 넘어오라는 선동문도 적혀 있었다. 또한 바로 그러한 시기에 안호아 관측소의 아군 대원들과 미 해병대의 엥글리코 대원들은 한 차례 적의 야간기습공격을 받았으나 야포부대의 지원하에 용전분투함으로써 자신들의 무덤으로 알고 있던 그 관측소와 동굴진지를 고수했다.


  그리고 그 피습사건이 있은 직후 M16 소총으로 숲속을 배회하는 호랑이 한 마리를 포획했던 수색소대장 곽충도 대위는 동굴진지의 보강작업을 위해 진지 일각에 매장되어 있는 월남군 수비대원틀의 시신을 고지 8부 능선 쪽에 이장시킨 계획을 추진했는데, 그 일에 협력해 준 나민촌의 촌장은 불교의식에 따라 간소한 제를 지낸 다음 이장작업을 도와 주었다. 한데 이장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대원들은 시신들이 썩지 않은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판초로 싸서 양철판 위에 얹어 야트막하게 묻어 둔 그 시신들이 어떤 이유로 썩지 알았던 것인지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안호아 관측소에 배치되어 있던 수색소대는 1967년 12월 청룡부대가 호이안지구로 이동할 때 월남군에게 인계되었는데, 월남군에 의해 수비되고 있던 그 안호아 관측소와 그 난민촌은 월맹군의 구정공세 때 피비린 쑥밭으로 화하였고, 그런 참화 속에 학교 선생들은 피살되고 교사는 불타버렸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傳統과 秘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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