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군대/대한민국 특수부대

바다에 산다! 해군 해난구조대(Navy SSU)

머린코341(mc341) 2017. 9. 21. 16:22

유 제독의 Periscope(잠망경) 〈4〉 해군 해난구조대(Navy SSU)


바다에 산다! 해난구조대!

⊙ 한성호·서해훼리호·세월호 침몰, 천암함 폭침 등 각종 해난사고 때마다 해난구조대 활약
⊙ 해난구조대의 첫 활동은 1954년 8월 독도에 등(燈)을 설치한 것
⊙ 북한 미사일 은하3호 수색작전에서도 활약


유영식
1962년생으로 해군사관학교를 39기로 졸업했다. 35년9개월간의 군 생활 가운데 17년간을 해군본부와 국방부 대변인실 등에서 정훈장교로 일했다. 2009년부터 5년 동안 해군 공보과장으로 재직하며, 최장수 해군공보과장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2014년 해군 준장으로 해군본부 정훈공보실장(해군 대변인)을 지냈다. 


경남 진해 군항기지에서 혹한기 내한(耐寒)훈련을 받는 해군 해난구조대(SSU) 대원들. 대한민국 바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건 SSU는 달려간다.


  세월호가 3년 만에 인양됐다. 그 선체를 보면 해난구조대(SSU) 대원들이 생각난다. 세월호 사건 이후 맹골수로의 잠수 바지선 위에서 해난구조대 대원들은 쉼 없이 세월호의 암흑 속으로 들어갔다. 해난구조 잠수사들의 잠수횟수는 1253회로, 6만3000m에 달한다.
 
  잠수조건은 시계 1m 이하, 수중전등 빛에 의존하고 문을 부수고 격벽(隔壁)을 잘라야 하는 난관의 연속이었다. 생명줄을 차고 호흡줄을 달고 기어서 더듬어 실종자들을 찾아 갔다. 동서남해의 전방함대에 배치된 구조대원 중 젊은 대원들이 순환배치돼 긴 수색작전이 진행되었다.
 
  세월호의 격실은 잠수하는 조간이 너무나도 열악했다. 미군 해난구조팀은 맹골의 조류에 단 한 번 잠수하고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며 철수했다. 맹골의 조류속도는 4킬로노트, 안전조류는 1킬로노트였기 때문이다.
 
  2014년 4월 16일부터 그해 11월까지 해난구조대원들이 줄을 이어 잡고 손으로 더듬어 생명을 구하려 실시하던 잠수는 어느새 시신을 찾아내는 임무로 바뀌었다. 한 사람의 주검 앞에 잠수사들은 물속에서 거수경례를 하고, “이제 집으로 모시겠습니다”라고 마음속으로 말하며 수색작업을 계속했다.
 
  늘 바다에서 벌어지는 생사 기로의 현장에 부름과 명령에 달려가야 하는 것이 해군 해난구조대이다. 바다의 119 역할을 해 온 해군 해난구조대의 발자취 중에서 꼭 기억해 볼 만한 기록을 찾아본다. 해난구조대는 1950년 9월 1일 ‘해상공작’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
 
  당시 해군총참모장이던 손원일 제독은 함정 손상 시에 복구의 중요성을 인식해 해군 구성원 중 상선학교 출신자, 일제하 일본식 근대 잠수장비 운용능력을 보유한 기술자(민간 구난회사 근무 경력자)와 선박구조 운용에 능숙한 민간인 16명을 선발했다. 1954년 8월 1일 ‘해상공작’이라는 이름이 ‘해난구조’로 변경됐다.
 
  독도에 최초로 등을 달다
 
  해난구조대의 첫 활동이 독도에 등(燈)을 설치한 것이다. 이는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근거로, 두고두고 작용한다. 1952년 1월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선 선언, 즉 한국연안의 50~60마일 수역에 대한 한국의 주권을 선포하자 독도를 둘러싼 한일 갈등이 고조됐다.
 
  1952년 2월 27일부로 미국은 독도를 미군 폭격 훈련지에서 제외시켰는데, 이 시기를 이용해서 일본은 한국전쟁의 혼란을 틈타 독도에 대한 침탈행위를 빈번히 일삼았다. 일본은 1953년 독도 어업허가권을 일본 어민에게 부여했다. 1954년 일본 참의원 쓰지 마사노부는 일본 기자들과 함께 독도에 잠입해 암벽마다 페인트로 일장기를 그렸다. 이 만행에 동행했던 일본 기자들은 ‘한국의 함정은 어디에 있느냐’며 대서특필했다.
 
  일본 언론의 주장은 “독도에 들어가는데 막는 사람이 하나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는 평화선 무효화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논리로 이어졌다. 이에 대응해 1954년 7월 24일 정부 조사단은 독도에서의 일본인 행적을 확인하고 대응책으로 ‘독도 등(燈) 설치안’을 정부에 건의한다.
 
  1954년 8월 8일부터 8월 11일까지 해군 함정 S-2 정과 해난구조대원들이 독도에 상륙하여 대한민국 정부의 이름으로 등을 설치했다. 군사적 목적 이외에 처음으로 해난구조대가 수행한 임무였다.
 
  최근 일본이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내용을 교육요령에 포함해 발표한 점에 비추어볼 때 1954년 대한민국 독도에 등을 설치한 것은 참으로 잘한 선택이다. 일본이 아무리 떠들어도 실효 지배가 우선이다. 해군의 독도방어 훈련은 연 2회 빠짐없이 진행하고 있으며 일본 순시선이 독도 근해 12마일 이내에 진입하지 않고 주위를 맴도는 일도 계속되고 있다.
 
  LST 문산호를 해체하다


초기 해난구조대원들은 6·25전쟁시 활약했던 LST문산호를 해체, 폭파하면서 실력을 닦았다.


  해난구조대가 수행한 군사임무 중에 손꼽히는 것은 상륙작전 중 경상북도 영덕 장사 해안에 좌초된 문산호를 해체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해난기술로 큰 선박을 해체한 것은 대단한 성과였다. 문산호는 상선이었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해군작전에 사용하기 위해 묵호경비부에 징발된 선박이었다.
 
  1950년 9월 14일 문산호에는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기만작전을 위해 특공대원 800명이 편승하고 경북 포항 장사동에 상륙했다. 특공대라지만 대구·밀양에서 모집된 중?고생들로 두세 차례 총을 쏴 본 게 훈련의 전부였다. 이들을 태운 문산호는 장사 해안으로 들어서면서 태풍을 만나 좌초된다.
 
  북한군 5사단을 동해안으로 끌어내 6일간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전사자만 139명을 남겼다. 징발된 상선인 문산호 구조를 위해 1950년 10월 16일 해군 해상공작대가 투입됐으나 북한군과의 지속적인 전투로 구조 활동은 불가능해졌고 그 다음해인 1951년 4월 11일부터 27일까지 17일간 재차 전장에 투입되어 좌초된 문산호를 해체하고 유실된 병기 등 주변 탐색 등을 실시했다.
 
  1954년 7월 9일부터 8월 6일까지 29일간 해난구조대가 3차로 출동하여 선체 내부를 해체하고 1966년에야 폭파작업을 실시하여 선체를 완전히 제거했다. 문산호 해체는 맨손으로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해난구조대는 선진 기술과 장비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교육, 장비, 기술축적 등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준비에 돌입한다.

  진도수로 침몰 여객선 한성호 구조작전!
 
  1973년에도 세월호처럼 화물을 과적(過積)한 한성호가 팽목항을 향하다 항해 중 침몰하는 참사가 발생한 적이 있다. 한성호는 목포와 조도간을 정기 운항하는 총톤수 70톤의 여객선이다. 1973년 1월 22일 24시경 서해남부 남해서부 해상에 폭풍주의보가 발효돼 여객선의 운항이 금지됐는데도 한성호는 정원(86명)보다 41명이 초과한 127명과 선원 9명을 포함한 승객 136명을 승선시키고 과적 상태에서 8시55분경 목포항을 출발했다.
 
  당일 시하도를 통과할 무렵에는 폭풍주의보가 해제됐다. 한성호는 장죽수로와 진도수로의 인근 섬들인 마진도, 장산도, 율도, 가학도 등을 거쳐 1월 22일 14시 다음 기항지인 팽목항을 향하여 가학도를 출발했다.
 
  각흘도(角屹島)를 통과할 무렵 파고 2~3m에 달하는 격랑이 일었다. 한성호는 진도 해안을 따라 조속 3~4노트로 흐르는 역조를 거슬러 항해 중 3~4m에 달하는 파도를 맞고 전복돼 삽시간에 침몰되었다.
 
  이날 사고로 선원을 포함한 승객 19명이 익사하고 76명이 실종됐다. 1973년 1월 22일 해난구조 심해 잠수사 6명이 현장에 출동했으나 익사체 탐색과 침몰선 인양에 전념하는 구조작업에 한정됐다.
 
  1973년도에도 사고해역은 수로를 따라 흐르는 강한 조류가 발생해 잠수사의 접근이 제한됨에 따라 수상구조작업을 주로 실시하고 사실상 수색작업과 인양을 위한 잠수작업이 불가한 상태라는 판단하에 3일 만에 구조작업을 지원한 뒤 종료했다. 그랬던 진도 인근에서 40여년 만에 세월호 같은 험한 일이 재연된 것이다.
 
  바다의 유물 발굴자-거북선을 찾아라 !


해난구조대는 충무공해전유물발굴 사업에 참여, 별황자총통을 비롯한 당시의 유물들을 다수 인양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정부 주도하에 충무공 이순신 현양(顯揚)사업이 활발했다. 이 연장선상에서 이순신 제독의 유물발굴이 정부와 학계의 관심이 됐다. 1973년 5월 당시 문화공보부는 이 충무공의 해저유물(거북선)을 발굴 인양해 애국애족 정신을 드높인다며 발굴조사단을 발족했다.
 
  유물발굴조사단은 1973년 7월 5일 조사작업에 들어갔다. 임진왜란 당시의 국내외 문헌을 검토해 칠천수로, 당포, 당항포 등 유물잠재 가능 해역을 선정하고 해군 해난구조 심해 잠수사들과 국립지질연구소가 조사작업에 착수했다.
 
  1975년도 시작한 충무공 해저유물 발굴조사 결과, 거북선과는 관계없는 총통 4점(당포 2, 노량 1, 고만 1)과 각종 토기류 철편, 목편류 등 100여 점을 인양하고 돌무덤 1개소와 침몰된 지 40~50년으로 추정되는 고철선을 발견했을 뿐 거북선의 실체는 찾아내지 못했다.
 
  7년간의 해저유물 발굴조사 작업을 통해 축적된 자료와 경험은 값진 것으로 이후 발굴조사 작업에 많은 도움이 됐다. 당시 7년간의 총 발굴조사 기간은 92주로, 칠천수로-노량-당포-안골포 등 조선 수군의 격전지 또는 수군 기지와 수로를 중심으로 실시됐다.
 
  1975년 8월 20일 전라남도 신안군 지덕읍 방축리 도덕도 앞 해상에서 한 어부(최평호·당시 35세)가 물때에 맞추어 내려놓은 그물에 걸린 청자화병으로 추정되는 유물을 발견하여 신안군청에 신고하는 일이 있었다. 이에 정부는 이곳에 다량의 유물이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보고 조사단을 구성해 조사작업에 착수하고 반경 2km 정도의 해역을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했다.
 
  1976년 10월 문화재위원회의 결정사항에 따라 문화재관리국에서는 해군 해난구조대 임시조사단을 편성하고1차 확인조사를 벌여 청자류 100여 점을 인양하고 다음 달인 11월에 청자류 1000여 점을 건져올림에 따라 당국에서는 이 해역에 다량의 유물이 잔존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후 문화재관리국은 해군 당국과 회의를 열고 정밀 발굴조사 계획을 수립한 후 1977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조사 작업을 추진했다. 이에 해난구조대는 1976년부터 1984년까지 9년간 11차에 걸쳐 신안 해저유물 발굴조사를 펼쳐 도자기류 기타 유물 2만2007점과 동 약 28톤, 자단목 1017본, 선체편 445편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유물을 인양했다. (출처 : 해난구조대 60년사)
 
  이때 동원된 장비가 총 872종이었으며 잠수사는 연인원 9896명으로, 이들의 잠수시간은 3474시간이었다. 1970년대 해저유물 발굴조사단은 발굴 및 인양 장비를 갖추고 있지 못한 상태여서 유물인양 작업은 오로지 해군 심해 잠수사에 의해 이뤄졌다.
 
  해상사고 그 자리에 언제나 해난구조대
 

세월호 사고를 비롯해 해난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SSU는 어김없이 출동한다.


  1993년 10월 10일 9시40분경 전북 부안군 격포리를 항해 중이던 여객선 서해훼리호가 임수도 근해 해상에서 기상악화로 장항으로 회항하다 침몰해 승객과 승무원 292명이 사망하는 엄청난 해상 참사가 발생했다.
 
  1993년 10월 11일 해군은 민군 구조대의 지휘권을 인계받아 1993년 10월 27일까지 구조작업을 시행했다. 골든타임이라는 용어가 없던 시대이기도 했지만 사고 이후 구조작업은 사체인양이 중심이었고, 2~6노트의 조류와 수심 18m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선체 내부의 좁은 격실에 들어가 무거운 시체를 안고 수면 위로 올라와야 하는 것이었다.
 
  훼리호는 선체가 단순하고 작아서 세월호보다 수색작업이 수월했다는 해난구조대 한 잠수사의 말이 생각난다. 당시에도 선체인양 작업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하다는 논의가 있었으나 10월 26일 23시30분경 선체를 2차로 인양해 10월 27일 동방호(서해훼리호 바지선)에 탑재한 후 군산항으로 돌아와 지방해운항만청에 인계함으로써 구조상황이 10월 27일 11시30분에 종료됐다.
 
  서해훼리호 구조작전 시 1차 사체인양은 해난구조 SSU 심해 잠수사 78명, UDT요원, 해경 특수구조 20명 등에 의해 실시되었으며 2차 선체인양은 해난구조 심해 잠수사, 구미함, 설악호, 바지선 2척, 예인선 5척에 의해 진행되었다. 당시에도 구조작전의 긴박성을 고려하여 야간잠수 작업을 강행했다.
 
  미 해군 잠수 교리에는 조류 1노트 이상 잠수작업 금지, 1일 1회 잠수, 야간잠수 작업 지양토록 되어 있으나 해군은 단기간 내에 수색과 인양 작업을 종료했다. 이 과정에서 해군 헬기 1대가 해상에 추락하여 순직자가 발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서해훼리호 작전에 참가한 해난구조 심해 잠수사 가운데 상병 이태원은 이런 구조 체험담을 남겼다.
 
  “10월 14일 선체의 3등 격실 내부를 탐색하여 사체 1구를 안고 상승하던 중 뒤에서 잡아당기는 느낌을 받고 놀랐다. 시정은 전무했고 격실에는 시체와 부유물밖에 없는 상황으로 자세히 살펴보니 낚시에 잠수복이 걸린 것을 알았다. 모골이 송연하다는 느낌으로 공포가 밀려 왔지만 부상(浮上) 후 사체를 인계한 뒤 다시 잠수해 5구의 사체를 더 인양했다.”
 
  상사 반석동은 10월 14일 19시경 선미 펄 굴착작업으로 잠수후 4m 지점까지 굴착하고 나오는 순간 펄이 무너져 내려 퇴로가 막혔다. 반 상사는 “시야는 전무하고 오직 생명줄에만 의지한 상태로 구조신호가 전달되지 않으면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엄습했다”고 회고했다. 그를 구조한 것은 5분쯤 후에 펄을 뚫고 들어온 동료 잠수사였다. 당시 반 상사는 5분이 5시간 같았다고 증언했다.
 
  상사 함동호는 10월 15일 3시경 선수에 체인을 묶는 작업을 끝내고 상승하던 중 어망에 공기통이 걸려, 탈출을 시도하다 격한 조류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죽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용기를 내어 잠수용 칼로 어망을 제거하고 탈출한 후 공기량을 보니 잔량이 거의 바닥에 가까웠다.
 
  하사 이용호는 10월 16일 10시경 선체인양을 하는 중 선미 부분 굴착작업 시간이 경과됨에 따라 빨라지는 조류를 느끼고 이번 작업을 종료하지 못하면 다음 정조시까지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강박관념 사로잡혔다. 그 때문에 작업을 무리하게 강행하는 바람에 펄 굴착을 마치고 나서 공기량을 보니 바닥이 나서 18미터 깊이에서 해면까지 비상탈출했으나 수면에서 의식을 잃었다.
 
  그 후 조류에 떠내려가다 고무보트에서 발견되어 즉시 구미함으로 이송돼 감압챔버(잠수병 치료실)에서 약 50분이 지난 후 의식을 회복했다. 그는 3시간 치료 후 챔버실에서 나와 수많은 유가족의 고통을 생각하며 10월 16일 야간작업부터 다시 잠수에 참가했다.
 
  송무진은 10월 17일 10시경 배수작업차 선체에 올라갔을 때 심한 악취와 함께 부패된 시체 50여 구를 목격하고 심한 구토 등으로 시신들의 처리작업이 매우 어려웠다고 기록했다.
 
  하사 최세안은 야간에 수중등 하나만을 들고 2~3m가 넘는 파도를 헤쳐 18m 아래로 내려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격실을 더듬어 가며 무거운 사체를 찾아 젖먹던 힘까지 다해 고무보트로 계속해서 올렸다. (출처 : 서해훼리 작전 소감문 )
 
  해난구조 심해 잠수사들이 이토록 험난한 과정을 잘 참고 견디어 낼 수 있었던 것은 해군 SSU 요원으로 명령에 죽고 사는 군인이었기 때문이며 유가족 여러분께 한시라도 더 빨리 인양을 해 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이후 성수대교 붕괴 현장, 충주호 유람선 화재 사고뿐 아니라 70년대 간첩선 인양작전, 해군함정의 좌초 현장, 공군기 추락 현장, 남해 간첩선 격침 현장 등 수십 차례의 간첩선 침몰 현장에서 증거를 찾고 인양하는 등 해난구조대의 역사는 늘 구조대원이 목숨을 던지는 일의 연속이었다.
 
  별빛 같은 잠수사 한주호 준위


천안함 폭침 후 구조작전을 수행하다 순직한 고(故) 한주호 준위.


  2010년 3월 26일 21시22분경 서해 백령도 서남방 해역에서 경비 중이던 천안함이 북 잠수정의 어뢰공격으로 선체가 함수, 함미 부분으로 분리돼 침몰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생존 장병들은 일사불란하게 행동해 해경-501함에 의해 구조되었다. 승조원 58명이 구조되고 46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다. 함정에서 탈출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해군은 3월 27일부터 수상함 구조함을 비롯해 해군 해난구조대 등을 현장에 투입해 침몰한 천안함과 실종자 수색작업에 돌입했다. 백령도 근해는 조류가 최대 4노트였으며 사고 해역은 50m의 수심과 강한 조류에 의한 퇴적물과 육지에서 유입되는 담수 부유물질로 10m 이상의 수심에서는 거의 0m의 시계 상태를 보이는 수준이었다.
 
  나쁜 기상조건과 빠른 조류 때문에 수색·구조 작업은 난관을 겪었다. 작전 초기부터 현장에 있던 한주호 준위는 3월 30일 14시경 장병 등을 한시라도 빨리 가족에게 찾아줘야 한다는 생각에 현장의 감독을 해야 하는 나이임에도 잠수를 선택했다. 이 과정에서 한주호 준위는 사망했다.
 
  잠수활동으로 순직한 한주호 사건을 계기로 전사자 가족들은 또 다른 장병들의 희생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고 공감하게 됐고 구조 및 수색 작업을 중단하고 인양작업에 돌입한다는 결단을 내렸다. 50m에 이르는 깊은 수심으로 어려움을 겪던 함미 인양과정은 4월 12일 오후 함미를 백령도 해안 방향 수심 25m 지역으로 이동시키는 작업에 성공했다.
 
  4월 14일 21시 크레인을 이용해 세 번째 인양용 체인 연결작업이 성공해 20일 동안 서해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던 함미 부분이 15일 만에 최종 인양됐다. 하지만 인양된 함미 부분에는 실종 장병 36명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돼 온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2010년 3월 26일 천안함이 폭침한 후, 해군 SSU 잠수 요원들은 헌신적으로 구조작전을 수행했다.


  인양된 함미에서 순직 장병 수습 후, 함수 인양작업은 함미에 비해 더욱 어려웠다. 선체가 오른쪽으로 기운 데다 상부 구조물이 돌출해 있어 인양 과정에 유도 와이어와 인양 체인이 끊어지는 등 난관이 많았다.
 
  4월 22일 네 번째 체인까지 연결한 군과 민간 인양팀은 4월 23일 함수 바로세우기 작업에 성공하고, 24일 08시부터 인양작업을 시작하여 12시경 마침내 함수를 바지선에 탑재하면서 침몰 한 달여 만에 인양작업을 마무리했다.
 
  인양된 함수에서 실종 장병 시신 1구를 확인하고 이에 앞서 22일 연돌에서 시신 1구를 추가로 확인하면서 실종자 46명 중 40명이 숨진 것으로 최종 확인했다.
 
  그 후 천안함 폭발원인 규명, 주요 잔해물 수거, 실종자 시신 탐색 및 수습을 위해 탐색수거 작업이 실시되었다. 참가 전력으로 청해진함, 평택함, 양양함, SSU 대원 73명이 투입되었다. 기뢰탐색함이 해저 음탐기로 탐색하여 목표물이 확인되면 그 지점에 위치 부이를 설치하고 일일이 그 자리에 SSU 대원과 구조함이 위치하여 수거 또는 인양하는 절차로 진행되었다.
 
  바다에 떨어지는 증거물은 샅샅이 찾는다-북한 미사일 은하 3호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안보상황이 매우 복잡해졌다. 북한은 위성발사라고 주장했지만 국방부 등 안보 부처는 탄도미사일 위험으로 발전될 가능성에 주목했으며 일정 고도에서 분리된 페어링의 크기와 성공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 이유는 장거리 미사일에 핵 탄두를 장착할 가능성에 대한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전문가들은 이 미사일 발사에서 비행궤도를 분석하고 그 잔해를 수거하는 것이 관심 사안이었다.
 
  정보에 따라 미사일 발사 탐지를 위해 고도의 감시 태세를 유지한 상태에서 해군의 이지스함은 북한 미사일을 탐지했다. 특히 탐지한 궤적 이외에도 분리 과정과 그 분리된 낙하물의 고도와 위치를 정확히 탐지하여 낙하 지점을 일정한 해역으로 예측할 수 있는 탐지 정보를 제공하였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잔해물 수거작전을 위해 청해진함과 해난구조대 잠수사들이 현장으로 직파됐다. 그리고 2012년 12월 12일 평안북도 동창리 시험장에서 발사된 장거리 로켓 은하 3호의 대형 잔해물이 12월 14일 서해 해저에서 인양됐다.
 
  해군 청해진함이 군산 서방 160km 해저에서 인양한 대형 잔해물은 1단 추진체 잔해로, 연료가 연소될 수 있도록 산소를 공급하는 산화제통이었다. 산화제통은 길이 7.45m, 직경 2.4m, 두께 3.8mm의 원통 모양으로 중량은 1.13t이었다. 인양장소는 변산반도 서방 82NM, 수심 85m 해저로, 소해함인 옹진함이 식별하고 인양은 구조함인 청해진함이 임무를 수행했다.
 
  수중 잔해물을 음파로 탐지하고 수중카메라로 확인한 다음에 청해진함의 심해잠수구조정(DSRV)을 이용하여 접근하고 인양 조건을 확인한다. 그 이후 잠수사들이 잔해물의 연결을 위해 칠흑같은 바닷속에서 연결색과 인양색 연결작업을 하면 청해함이 위치를 고정시키고 매우 천천히 이를 들어올리는 방법이다.
 
  청해진함이 현장에 도착해 수중카메라로 잔해물 상태를 확인한 1단 로켓은 해저 85~88m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인양작업은 밀물과 썰물이 없는 정조 시간대를 이용해 해난구조대 잠수사가 인원수송캡슐(PTC)을 타고 수심 80m 아래로 내려갔다.
 
  잠수를 위해 청해진함 가압 챔버에서 수심 80m 압력에 맞춰 몸을 적응하고 있었다. 수중라이트를 켜도 50cm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이들은 잔해 한쪽 끝에 인양용 특수 로프를 거는 데 성공했다. 또 다른 로프를 연결해야 하는 나머지 한쪽은 펄에 30~50cm 정도 묻혀 있어 잠수사들이 손으로 펄을 직접 파내야 인양색을 연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업은 오후 6시17분 중단됐다. 조류속도가 작업제한 규정인 0.5노트를 넘어 0.7노트로 빨라졌기 때문이다. 0.7노트의 조류는 물속에서 1초에 약 30cm씩 잠수사를 움직일 정도의 힘을 가졌다고 한다.
 
  해군은 오후 8시58분 2차 인양작업을 개시했다. 인양작업을 지휘한 55구조군수지원대장 김진황 대령은 “야간작업을 금하고 있지만 물살이 점점 더 세질 기미가 보이고 기상이 나빠진다는 일기예보가 있어서 불가피하게 결정했다”고 했다.
 
  새로 투입된 잠수사 3명은 손으로 펄을 파낸 끝에 오후 10시50분쯤 두 번째 로프를 잔해물에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 청해진함은 오후 11시13분부터 1단 로켓을 올리기 시작했고 14일 0시26분 인양작업을 완료했다.
 
  이 모든 과정이 잠수사들의 손과 발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고 장비와 함정이 일체화되어야 인양이 가능해진다. 완전한 준비가 이루어져도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기상이다.
 
  포화잠수 기법은 해군 해난구조대의 유일한 기술로서 장비와 체력과 기술을 갖춘 잠수사, 훈련시설 등을 통해서 가능한 잠수기법이다. 이런 준비가 없었다면 그저 바다에 떨어지는 낙하체를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광명성 미사일 잔해도 91m 해저에서 순식간에 찾아내
 

알몸 구보는 SSU의 전통이다. 겨울바람을 뚫고 SSU 대원들은 진해기지를 달린다.


  2016년 2월 7일 북한이 발사한 장거리 미사일 발사체에 대한 수거와 인양 작전이 해난구조전대장 제병렬 대령의 지휘로 서해에서 진행됐다. 이 수색전대에는 통영함과 33명의 잠수사로 편성됐다. 이지스함에서 탐지한 낙하체의 구역을 가로 10NM 세로 60NM로 정하고 이를 약 3NM을 소해함이 탐색하고 근접해서 통영함의 수중무인탐사기(ROV)를 이용하여 물표를 확인하면, 통영함의 ROV와 잠수사들이 낙하체에 대한 결색을 진행하고 인양기를 이용하여 들어올리는 절차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때도 약 90m의 해저에서 인양체의 결색은 표면공급식 혼합기체 방법으로 준비하고 잠수사들이 해저로 진입하여 연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작전은 그야말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공했다. 한계 수심 91m에 육박하는 혼합기체 방식의 잠수는 잠수사들의 고난도 훈련과 준비를 입증하는 대단한 성과였다.
 
  도대체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했는데, 발사체의 일부이기는 하나 어떻게 만들었지에 모두가 관심을 보였고, 바다에 떨어진 이것을 찾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으나 이를 순식간에 찾아낸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결과였다.
 
  해군으로 근무하면서 늘 이렇게 바다에서 마지막 국면을 담당하는 것은 해난구조대였다. 그동안 언론에 알리는 일들 중에 기억을 되살려 보면 이들의 노력을 꼭 기록하고 싶었다. 지금도 해난구조대는 대한민국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어느 곳에든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들은 숨 막히는 삶을 살면서 바다로 뛰어든다.⊙ 


[월간조선 5월호] 바다에 산다! 해난구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