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 군벌과 군조직 -9-
김포에 주둔하고 있던 수경사 야포단장 구명회 대령이 수경사령관 장태완 소장의 긴급소집 명령을 하달받은 것은 밤 8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수경사 야포단은 1979년 7월 1일, 12.12로부터 약 5개월 전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이던 차지철이 ‘무장세력의 청와대 기습위험’을 이유로 수경사에 155미리, 105미리 곡사포와 병력 1천 5백여명을 들여 창설한 부대였다. 하지만 수경사령관 장태완의 평가는 ‘경호에 별 필요도 없는’ 것들이었다.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하달하고 김기택 참모장이 하달한 소집지시에 응하여 김포 수경사 야포단 주둔지에서 필동 수경사령부로 달려가던 구명회 대령은 김포가도의 인공폭포 앞에서 야포단과의 거리도 머니 단장이 부대에서 병력과 포를 장악하고 대신 부단장을 사령부로 보내라는 장태완 사령관의 지시에 의하여 차를 돌려 다시 야포단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수경사 야포단 부단장 이승남 중령이 사령부로 향하게 되었다. 그는 9시 30분경 수경사에 도착하였다.
“사령관님께서 단장이 이탈한 부대에서는 부단장이, 부단장도 이탈했으면 작전주임이 부대지휘권을 행사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여기 와보니 상황이 매우 심각합니다. 그러니까 단장님께서 무엇보다도 판단을 잘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구명회 대령은 이를 듣고 수경사 예하부대들 중 가장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는 야포단을 이끌고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반란군을 진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야포단 본부에서 구명회 대령이 수경사 작전참모 박동원 대령으로부터 출동지시를 받은 건 10시 반 경이었다. 이들은 비록 출신은 각각 포병간부후보생과 육사로 달랐지만 1970년도 육군대학 정규과정 동기생으로 잘 아는 사이였다.
구명회 대령은 즉시 야포단 작전과장 서종표 소령에게 병력을 연병장에 이동대령으로 집결하게 하고 정보과장 박성빈 소령에게는 선발 정찰대와 함께 사령부로 이동할 도로를 선점하고 제2한강교쪽으로 부대를 선도할 것을 지시했다.
야포단이 이동준비를 완료했을 즈음 박성빈 소령이 구명회 대령에게 연락을 해 왔다.
“단장님! 지금 저는 제2한강교 남측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교량 양쪽의 검문소에서 통행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22시 13분 경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9공수 출동을 막기 위해 지시한 한강다리 차단 명령으로 인한 결과였다. 이때 행주대교를 제외한 모든 한강다리의 한 쪽을 막아버리고, 차량이 꽉 찰 때 쯤 다른 한쪽도 막아 차량이 전혀 움직이지 못하게 하여 다리 이용 시도 자체를 차단하고자 하는 목적이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진압군 병력이 출동할 때에도 상황이 똑같이 작동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제2한강교는 포기하고 지금 즉시 제1한강교쪽으로 가서 그쪽 사정을 살펴보고 나에게 보고하라.”
제1한강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구명회 대령이 이를 사령부에 보고하니 사령부에서는 수경사 관할이 아닌 행주대교를 통하여 진입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하여 구 대령은 즉시 박 소령에게 행주대교로 출동하여 상황을 파악할 것을 지시했으나 박 소령으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놀랄만한 것이었다.
“사령관님. 지금 박희도 제1공수여단장이 직접 공수여단 병력을 이끌고 행주대교를 건너고 있습니다.”
특전사령부에 복귀한 직후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집무실에서 차규헌 수도군단장의 전화를 받았다. 특전사령부 작전처장 신우식 대령의 장군 진급 소식에 대해 말하던 차규헌 장군은 정병주 사령관에게 “이리로 오라”고 말했다. 그를 회유하려는 작전이었다.
정병주 사령관은 그때 누가 정 총장을 납치해간건지는 모르고 있었지만, 경복궁에 모여있는 장성들이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낌새가 들어 “내가 거길 왜 가요?” 하고선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후 자리에 없던 1, 3, 5공수여단장들 중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가 부대로 복귀했다. 정병주 사령관은 거여동에 위치한 특전사령부 바로 옆에 있는 최세창 준장을 사령부로 불러 물었다. “총장이 납치되었다는데 어떻게 된 거요? 혹시 무슨 정보라도 있소?” 정 사령관은 최 준장이 경복궁에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최세창은 확답을 피하고 어물대다 돌아갔다. 몇몇 기록에서는 이때 최세창이 경복궁 모임과 정 총장의 연행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신중히 행동할 것을 정 사령관에게 건의했다고 쓰고 있으나 정병주는 이에 대해 ‘그런 일은 없었다며 선을 긋고 있다.
1공수가 신월동까지 출동했다는 첩보는 거여동 특전사령부에도 흘러왔다. 정병주 사령관은 장태완 사령관이 요구하던 9공수여단의 출동을 서두르는 한편 1공수여단의 출동을 막고자 특전사 부사령관 이순길 준장, 특전사 전발처장 홍덕현 중령, 특전사 인사처장 강리건 대령을 1공수로 보내 1공수의 출동을 막을 것을 명령하였다. 육군본부 측에서도 9시 30분 작전처장 이병구 준장이 출동을 명령하였다.
다만 이때 9공수여단장 윤흥기는 출동을 적어도 자정 이후에나 하려고 마음먹은 이후였는데, 이는 그가 정 총장 납치 등의 서울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해 설명을 듣지 못 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통금이 걸려 이동이 매우 편해지는 12시 경에 부대를 출동하고자 했고, 어차피 차량도 부족했다.
9공수의 1개 대대가 충남 서산으로 훈련을 나가 있었고, 여단에는 5분대기조인 1개 대대만을 수송할 수 있는 차량밖에 없었다. 특전사령부에서는 이 때문에 1공수의 차량을 9공수로 보내 1공수의 출동을 막고 9공수의 출동을 독려하고자 했으나 1공수가 말을 들을리는 없었다. 결국 진압군 지휘부는 3군수지원사령부에 차량지원을 명령했다.
하지만 차가 오지 않고 있었다. 아마 보안사의 방해공작의 일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간은 11시를 넘어 11시 30분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때 장태완 사령관의 독촉을 받은 정병주 특전사령관이 윤흥기 준장에게 독촉전화를 걸어왔다.
왜 출동하지 않느냐는 정 사령관의 물음에 윤 준장이 차량이 준비되지 않았다고 말하자 정병주 사령관은 우선 차량이 준비된 병력 먼저 출동시킬 것을 지시했다. 그리하여 11시 40분경 제9공수여단은 윤흥기 준장이 선두하는 5대대가 위병소를 빠져나갔다. 경로는 부천-경인고속도로-영등포-노량진-한강 인도교-용산-육본이었다.
9공수 출동 직후부터 9공수 상황실에는 정체를 밝히지 않은 수많은 전화들이 빗발쳐 회군을 지시했다. 그러나 신수호 대령과 상황실의 부하들은 그에 여의치 않고 오히려 3군지사에서 차량이 도착하면 바로 윤 여단장을 따라나설 생각이었다. 그때 유일하게 자신의 신원을 밝히는 전화가 왔다.
“나 육군참모차장이다. 내가 지휘하고 있다. 9공수를 복귀시키라.”
전화를 받은 신수호 참모장은 임무 확인을 위해 특전사령부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누구도 전화를 받지 않고 있었다. 결국 신수호 참모장은 여단장에게 복귀하라는 교신을 보냈다. 그때 보안사 보안처 2과장 오일랑 중령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갑종 155기로 신수호 참모장과 동기였다.
그는 ‘10.26 관련 수사 마무리 과정에서 정승화 총장을 모셔가려다 충돌이 있었으나 지금은 합수부 쪽에서 대세를 장악하고 있다’며 ‘그런 형편에 9공수가 서울로 진입하면 유혈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르고, 그럴 경우 9공수 쪽이 큰 실수를 하는 것이니 병력을 되돌리도록 무전을 치라’고 말했다.
이미 여단장에게 복귀하라는 무전을 친 이후였던 신수호 참모장은 잠자코 듣고 있다가 ‘병력이 복귀하도록 무전을 쳤다’고 말했다. “정말이냐? 너만 믿겠다!” 라는 말을 끝으로 전화는 끊겼다.
보안사의 철저한 회군공작은 결국 그 결과를 보았다. 11시 경(장태완 회고록에는 10시 경) 윤성민 참모차장과 통화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유혈 충돌을 막자’는 뜻으로 서로 병력 출동을 자제하자는 신사협정을 맺는 데 동의했다.
이 신사협정을 근거로 9공수 출동 사실을 모르고 있던 윤성민 차장에게 강력하게 항의하는 동시에 보안사 내부에 있는 인맥을 총 동원하여 9공수 참모들에게도 회군공작을 벌이던 합수부는 결국 9공수의 회군을 이끌어낸 것이었다.
참고로 9공수여단 5대대가 회군한 지점은 부천 인터체인지에서 조금 못 미친 곳이었다. 만일 9공수가 부천IC를 넘은 시점에서 회군지시를 받았다면 9공수는 꼼작없이 당시 경인고속도로 7번 나들목이자 경인고속도로의 종점인 신월IC까지 가야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자정 직후 출동한 1공수 병력과 마주할 가능성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 또한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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