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 군벌과 군조직 -完- (하)
12.12에 대한 판결은 최초의 판결은 1996년 8월 26일에 이루어졌다. 12.12에 대한 기소유예와 내란죄 불기소 처분(이때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말이 유행했다), 총 3회에 걸친 헌재의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대한 판단, 5.18 특별법 제정, 그리고 사상 초유의 전 대통령 2명 동시 구속이라는 사태까지 많은 사건들이 사슬처럼 이어진 결과였다.
이날 재판부는 12.12가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이미 그 동안의 수사과정에서 혐의가 없는 것으로 밝혀진 정승화 총장을 김재규와의 관련 혐의에 대해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강제 연행하여…군의 정식지휘계통이 이를 저지할 경우 무장병력을 동원하여 제합하기로 결의하고…이를 저지하는 군의 정식지휘계통을 무력으로 제압”한 행위라고 인정하였다. 피고인 전두환에게 사형, 피고인 노태우에게 징역 22년 6개월이 선고되었다.
이후 항고를 거쳐 2심에서 전두환은 무기징역, 노태우를 징역 17년으로 각각 선고하였으며, ?재판부는 성공한 쿠데타가 처벌 가능한지의 여부에 대해서 “쿠데타정권의 합법성과 쿠데타행위 자체의 범죄성의 문제는 구별하여야 한다.
쿠데타정권이 전면적이든 부분적이든 합법성을 부여받는다고 하여 쿠데타정권을 탄생시킨 반란 또는 내란의 범죄행위적 본질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며, “기존의 헌법과 법률은 쿠데타가 비록 성공하여도 그 효력을 잃는 일이 없고 따라서 기존의 법률에 의하여 쿠데타가 반란이나 내란에 해당하여 범죄가 된다면 이 점은 쿠데타정권이 합법성을 부여받는다고 하여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며 쿠데타행위 자체는 범죄로서 마땅히 처벌되어야 하며 쿠데타 처벌이 “법의 효력이나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법의 집행과 실천의 문제”라는 것을 밝혔다.
3심이자 최종심인 대법원 판결에서는 “군사반란과 내란을 통하여 폭력으로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의 권능행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고 정권을 장악한 후 국민투표를 거쳐 헌법을 개정하고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가를 통치하여 왔다고 하더라도 그 군사반란과 내란을 통하여 새로운 법질서를 수립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고 “헌법에 정한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폭력에 의하여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음을 밝히면서 12.12라는 군사반란 및 내란행위에 대한 처벌 가능 이유를 설명하였다.
이후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연행이 적법한 행위였다는 피고인측 주장에 “피고인 허삼수 등이 피고인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정승화 총장을 체포함에 있어서 사전에 구속영장을 발부받지 아니하였고 군검찰관의 지휘를 받지도 아니하였으며, 미리 영장을 발부받을 수 없는 긴급한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인정되지도 아니하므로, 정승화 총장의 강제연행행위는 법률에 규정된 체포절차를 밟지 아니한 것으로서 위법함을 면할 수 없다”라 반박하며, 육군의 정식지휘체계가 완전히 붕괴되어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의 명령, 지휘가 위법이라는 주장 또한 “윤성민 차장 등 육군의 수뇌부는 그 무렵 육군 지휘부를 수도경비사령부로 옮긴 뒤 국방부장관 및 예하부대와 통신축선을 유지하면서 피고인들의 반란에 대처한 사실을 인정한 다음, 당시 육군의 정식 지휘체계가 붕괴되어 윤성민 차장 등의 명령과 지휘가 위법하다거나 무효인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재판부는 “군형법상 반란죄는 다수의 군인이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국권에 반항함으로써 성립하는 범죄이고, 여기에서 말하는 국권에는 군의 통수권 및 지휘권도 포함된다고 할 것인바, 피고인들이 대통령에게 정승화 총장의 체포에 대한 재가를 요청하였다고 하더라도, 이에 대한 대통령의 재가 없이 적법한 체포절차도 밟지 아니하고 정승화 총장을 체포한 행위는 정승화 총장 개인에 대한 불법체포행위라는 의미를 넘어 대통령의 군통수권 및 육군참모총장의 군지휘권에 반항한 행위라고 할 것이며, 원심이 적법히 인정한 바와 같이 피고인들이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위와 같은 행위를 한 이상 이는 반란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로 12.12가 전두환, 노태우를 수괴로 한 반란임을 인정하였다. 대법원이 2심을 확정하면서 전두환 무기징역, 노태우 17년형이 확정되었다. 이들은 각각 안양교도소와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이들이 사면된 것은 15대 대통령으로 김대중이 당선된 직후인 1997년 12월 22일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12.12를 막을 방법은 없었을까. 아니, 질문을 바꿔보자. 왜 12.12에 대한 진압은 실패했는가.
당시 수경사령관 장태완은 자신의 저서에서 그 이유로 여섯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군에서는 절대 존재 할 수 없는 사조직, 대전복부대가 전복부대로 전환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비의 미비, 군 통수계통의 마비, 대전복 정보기능의 마비, 비상시국 하에서의 대전복부대 지휘관의 교체, 정치군인들의 행포가 그것이다.
한편 그의 비서실장이었던 예비역 중령 김수탁은 “장성들은 지휘관으로서의 상황 판단 능력도 제대로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마치 사태 이후에 자신의 행동이 쿠데타 세력에 의해 어떻게 비춰질지를 걱정하는 듯했다. 대세가 신군부 측으로 기울어지자 ‘늦었다’ ‘역부족이었다’는 말만 반복했다”라 말하며 육본 측의 의지 부족을 지적하기도 했다.
12.12때 육본측의 적법한 명령을 받고 서울로 출동했다가 회군한 윤흥기 9여단장은 “12·12의 책임은 노 장관 같은 사람을 참모총장에도 모자라 국방장관까지 시킬 정도로 박정희 대통령의 군인사가 엉망이었기 때문”이라 주장하며 박정희 정권의 군인사 능력과 노재현 국방장관을 질타하고 있다.
또한 김진기 헌병감은 “윤 차장은 노 장관의 병력 동원 불가 방침에 따라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이는 총장 연행에 대한 것이지 신군부의 반란 움직임까지 무대응하라는 것은 아니었다. 윤 차장은 당시 신군부의 명백한 반란이라는 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면서도 현장의 지휘관으로 이를 사실상 묵인했다”라며 윤성민 당시 육군참모차장을 비판하였다.
군 통수권자였던 대통령 최규하 또한 비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태완은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재가도 없이 일개 소장이 계엄사령관인 육군 대장을 불법 연행했다면 이는 명백한 하극상에 의한 반란임을 뻔히 알 수 있음에도 국방장관만 마냥 기다리고 있은 것은 군 통수권자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라고 말하며, “설사 장관이 없으면 참모차장이나 수경사령관을 찾아서 상황을 보고받고 ‘조기 진압하라’는 한마디 명령만 내렸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상황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묵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12.12에서 맞붙은 두 군집단의 성격이 다르다는 점일 것이다. 용산 육군본부의 장군들이 “서울이 불바다가 되는 것을 막는다”거나 “서울 시민을 보호해야 한다” “아군끼리 유혈충돌이 일어난다면 김일성이가 달려들수도 있다”라며 병력출동을 자제하려고 했을 때, 경복궁에서는 어떠한 거리낌 없이 북괴군이 남침한다면 1.5선과 임진강 방어선에서 방어를 맡을 9사단 29연대와 30연대, 압도적인 수로 아군 병력에 대한 우세를 차지하기 위해 남쪽으로 밀려들어올 북괴군 기갑전력을 막아낼 2기갑여단 16전차대대, 서울의 예비군 병력들을 끌어모아 부대를 편성해야 할 30사단 90연대, 정규전에 앞서 선행될 대규모 특작 침투에 맞서 대침투작전을 수행해야할 특전사 1, 3, 5공수여단을 모두 서울로 출동하였다.
육군본부측의 적법한 지휘체계와 명령 대신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위주로 한 하나회끼리의 지시를 따르도록 한 건 덤이었다.
실제로 12월 12일 북괴군이 기습적으로 남침을 실시했다면 정규 보병사단 보병연대 2개, 예비 보병사단의 보병연대 1개, 정규 기갑여단의 전차대대 1개, 공수여단 3개가 빠진 서부전선의 공백을 메꿀 방법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이렇듯이 이날 경복궁 측은 명령과 지휘체계로 돌아가는 군조직의 모습보단 국익보다도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는 군벌의 모습을 더욱 띄었다고 볼 수 있다.
육본측 장성들은 어떻게든 사태를 진정시켜보고, 서울 시민들이 아군끼리의 충돌로 해를 입는 것을 막아보기 위해 신사협정에 동의했지만 이들은 여차하면 자살을 한다는 생각까지 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무슨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육본 측을 제압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병력을 출동시키고 있었다.
결국 12.12는 누군가의 주장처럼 ‘군조직과 군조직의 충돌’이라고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군벌과 군조직의 전투‘에 더 가까웠다. 다만 군벌 측이 군조직을 압도했다는 점이 여타 다른 군벌들의 결말과 다른 점일 것이다.
이들은 군벌을 군조직으로 키웠고, 다시 그 군조직을 국가로 만들어 통치했다. 그들은 군벌을 유지하던 식으로 군조직과 국가를 조종했고, 우리는 아직도 그 사이에 광주를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그에 맞서다 사그라져간 자들의 이름을 다 알지 못한다.
마지막은 정승화 증언록이자 조갑제의 저서이기도 한 <12.12 사건 정승화는 말한다>에서 나온 12.12 당시 진압군측이었던 한 예비역 준장의 말로 대신하고자 한다.
“지금도 걱정이 됩니다. 우리가 바른 말을 해도, 국민들은 너희들이 바보병신이지 왜 져놓고 그 따위 변명을 하느냐고 비웃을까봐 조심이 되지요. 정 총장과 우리는 국가가 군인에게 부여한 임무에 너무 충성했기에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웃을지도 모르지만 너무 착하기도 했고요. 착하고도 강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점이 우리의 죄입니다.”
[뻘글 집합소] 2015.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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