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 전투사

海兵戰鬪史(2) - 海兵隊의 創設期 (鎭海駐屯)

머린코341(mc341) 2014. 7. 5. 22:06

 

海兵戰鬪史(2) - 海兵隊의 創設期 (鎭海駐屯)

 

鎭海駐屯

 

1. 해병대의 진해(鎭海) 주둔 
해병대가 정식으로 창설되기 전에 해군에서는 앞으로 해병대가 반드시 창설될 것이라는 신념 아래 상륙전의 경험이 있는 안창관(安昌寬) 소위 및 김낙천(金洛泉) 소위외에 30명으로 편성된 작업선발대를 1949년 2월 21일 장차 해병대의 기지가 될 진해 덕산(德山)비행장에 파견하였다. 
 
선발대장 안창관 소위이하 파견대원들은 일치단결하여 조국을 수호할 강병을 육성하기 위한 터전인 연병장을 닦았으며 병사로 사용하기 위하여 파괴된 격납고를 수리하기 시작하였다. 동년 3월 28일 해군에서 전입된 장교 및 하사관 80명, 신병 300명, 총 380명으로써 병사수리, 연병장 건설작업 등이 점차 본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해병들은 숙련된 목공이 아니었고 물자도 보잘 것 없었으나 열과 성의로써 새역사를 창조한다는 기쁨과 보람으로 온갖 애로와 고난을 극복하였다. 해병들의 빈주먹과 단 하나 강인한 정신력만으로 시작된 작업은 문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지난한 작업이었다.
 
자재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하루 종일 휴식할 틈도 없이 계속된 작업에 시달려 심신의 피곤은 극심하였다. 더욱이 여의치 못한 식료품 공급과 충분치 못한 침구로 인하여 추위를 면할 길이 없었다. 또한 있으나 마나한 명색뿐인 병사의 지붕은 밤 하늘의 별을 쳐다보기에는 알맞았으나 스며들어오는 찬바람을 막을 수는 없는 그러한 일품(逸品)이었다. 
 
2.   해병대 창설기념일(1949년 4월 15일)
그러나 이 모든 곤경을 타파한 끝에 드디어 1949년 4월 15일 대망의 "해병대 창설의 날"은 왔다. 이 날 申鉉俊 중령은 사령관 훈시 제1성으로 "해병은 단결하여 온갖 고난을 이겨 유사 시에 대비할 최강부대를 이룩하도록 교육, 훈련에 정진하자"고 강조하는 한편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자유를 수호하는 역사를 창조하자"라고 그의 소신을 피력하였다. 이리하여 해병대를 국군 중에서 최강부대로 되고야 말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해병대의 질적 또하 양적인 확충 및 강화를 도모하였다.
 
(1)  창설 구성 인원 
창설일 당시의 해병대의 인원구성은 사령부(15명), 경리대(15명), 근무중대(70명), 정보대(10명), 및 소총 2개 중대(270명)로 총병력은 380명으로써 편성되어 있었으며 그 병력은 해군 신병 13기 중에서 303명을 인수하여 해병 1기생(1949년 4월 15일-7월 30일)으로 훈련시켰고 다시 신병 440명을 해군 14기 신병 중에서 특모하여 해병 2기생(1949년 8월 1일-10월 20일)으로 훈련시켰디. 
 
(2)  인원훈련 및 장비
이때의 훈련방식은 일본의 육전대와 해군의 훈련을 모방하였으며 거기에 미식(美式)을 가미한 미, 일의 절충식이었다. 장비는 대부분 일본군의 99식소총이었고 M1소총은 1정밖에 없었기 때문에 각중대에서 이를 공동으로 교육용으로 사용하였다.
 
훈련은 장병들이 단결되어 있어서 申鉉俊 사령관을 위시한 장교들이 직접 선두에서 시범을 보였으며 특히 건각육성(健脚育成)을 위하여 처자봉(天子峰)까지 완전무장을 하고 무휴식으로 강행, 등산을 하였다.
 
한편 사기진작을 위하여서는 오락회, 경기대회, 및 단체훈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와같이 맹훈련을 거듭하는 가운데 우수한 장교의 육성을 위하여 사관후보생 30명을 태능에 있는 육군사관학교에 파견, 교육케 하였다.
 
이리하여 1949년 8월 15일 서울에서 거행한 조국광복 4주년 기념식전에 해병대가 참가하여 서울시민에게 한국에도 해병대가 있다는 것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이같이 진해에서 창설된 해병대는 연일 맹훈련을 거듭하던 중 병력 일부를 '진주(晉州)'에 파견하여 지리산(智異山)을 근거로 이곳 일대에 출몰하는 공비토벌(共匪討伐)을 하게 되었다. 이때 이 임무를 수행한 부대는 김성은(金聖恩) 중령이 지휘하는 1개 대대였다.
 
(3)   해병대의 노래 제정
창설초기에 독특한 해병대의 노래가 있어야 한다는 간부들의 의견이 대두되자 참모장 김성은 중령을 위원장으로 하는 군가(가사)제정위원회에서 신영철 해병(후일에 해간 7기생)의 작사초고를 수정하여 '나가자 해병대'를 군가로서 제정하니 김형래(金炯來 경찰악대장) 씨가 이를 작곡하였으며 다시 군악으로 이병걸(李炳杰) 씨가 편곡하였다.
 
                                    - 나가자 해병대 -
       1.  우리들은 대한의 바다의 용사
            충무공 순국정신 가슴에 품고
            태극기 휘날리며 국토통일에 
            힘차게 진군하는 단군의 자손
            나가자 서북으로 푸른바다로
            조국건설 위하는 대한 해병대
 
                     2.   백두산 봉우리 폭풍이 불고
                          태평양 검은 구름 구비치여도
                          우국의 젊은 피가 약동하는 곳
                          원한의 38선도 무너지리라
                          나가자 서북으로 푸른 바다로
                          전장을 선구하는 대한 해병대
 
                                    3.   창파를 헤치면 무쌍의 청룡
                                          험산을 달리면 무적의 맹호
                                          바람아 불면 불라 노도도치라
                                          천지를 진동하는 대한 해병혼
                                          나가자 서북으로 푸른 바다로
                                          국방의 최강부대 대한 해병대  
 
해병대창설 당시의 편성 및 직위표

 

 

자료출처: 海兵戰鬪史 第一輯(海兵隊司令部發行)                                                                                                          
                                        
oldmarine
 
 
출처 : 해간3기 예비역해병대령 이근식 대선배님 블로그, 

          http://blog.daum.net/ksleemar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