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兵戰鬪史(3) - 海兵隊의 創設期 (晉州駐屯)
晉州駐屯
1. 해병대의 진주(晉州) 주둔
(1) 진주(晉州)에 부대 파견
麗順反亂事件 이래 잔여공비(共匪)들이 智異山에 집결하여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진주'를 위시한 주변일대의 도시와 촌락에 출몰하여 살인, 방화, 및 약탈을 감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관계로 인하여 이 지역일대의 민심은 극도로 동요하고 있었다.
진주(晉州)는 지리적으로 보아 군사, 정치, 및 경제의 중요도시인 馬山, 鎭海, 및 釜山을 연결하는 도시로 육군에서는 일찍부터 이곳에 부대를 주둔시켜 공비들의 발호(拔扈)를 극력 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비의 준동은 일익 심하여져서 '진주'를 점령한다고까지 호언하는 형세였다.
이런 가운데 1949년 8월 26알에 大邱에서 해병대 사령관 申鉉俊 대령과 육군 참모총장 丁一權 준장과의 사이에 맺은 협정에 의하여 해병대는 '진주'에 주둔하여 공비소탕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해병대는 金聖恩 중령이 지휘하는 1개대대가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8월 9일에 '진주'에 진주하여 사범학교 기숙사를 대대본부로 정하였다. 이리하여 安昌寬 중위가 지휘하는 선발대와 각중대는 '진주'에 도착하여 '진주'를 중심으로 晉州郡, 昌寧郡, 및 咸安郡 일대를 경계담당지구로 하여 공비토벌(共匪掃蕩)에 임하였다.
진주 주둔 金聖恩부대의 편성 및 직위표
(2) 晉州 주둔의 의의
해병대의 일부병력이 '진주'에 주둔하면서 수행하여야 할 임무는 智異山을 근거지로 하여 부근일대에 출몰하는 공비의 토벌만이 아니었다. 초창기인 이때 해병대 자체의 정신훈련과 아울러 전투훈련을 쌓아 강병이 되기 위하여 정진하였으며 또한 민심을 수습하는 선무공작에도 무척 노력하였다.
(3) 해병대의 활약
1) 정신훈련
손원일(孫元一) 해군참모총장은 해병대가 '진주'에 주둔하여 공비를 소탕함에 있어서 세가지 요지를 들어 훈시하였다.
1. 共匪의 조직 이상으로 세포조직을 강화할 것.
2. 군, 경, 민의 혼연 일체를 도모하는데 있어 해병대가 선봉이 될 것.
3. "일보가 백보다", "시작이 성공이다."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확고한 정신적인 토대를 구축하여 공비들의 허울 좋은 선전에 빠지지 않는 굳은 신념을 가질 것.
이것은 해병대가 공비토벌에 앞서 정신무장을 먼저 하여야 할 것을 강조한 훈시였다. 해병대 사령관 申鉉俊 대령도 "고금을 막론하고 술과 여인으로 인하여 영웅호걸이 그 신분을 그릇치고 불전자멸의 경우에 이른 자가 허다하였다. 해병대 장병들은 이러한 불미스러운 전철을 밟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훈시로서 각성을 촉구하였고 또한 "軍人이란 특권이 부여된 사람이 아니라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멸사봉공(滅私奉公)하는 의무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국민을 사랑하는 것이 군인 본연의 자세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훈시는 해병대의 정신무장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2) 민심 수습
해병대는 민심수습의 제일보로 민폐근절(民弊根絶)을 지상목표로 삼았다. 각자는 이를 깊이 명심하여 "한손에 총을 들고 또 한손에는 국민을 위하는 사랑을 가져라"고 하면서 나라와 겨례를 위한 군대가 되도록 훈련하였다. 이리하여 추호라도 민폐를 끼치지 않기에 노력하였으며 이러한 노력은 곧 상부에까지 보고되었다.
9월 28일 육군의 丁一權 준장과 해병대 고문 '하우스맨' 소령이 '진주'를 시찰하고 느낀바 소감으로서 "해병대는 일반민가에 대하여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않았을 뿐더러 진실로 국민을 애호하는 까딝에 '진주'의 일반시민들은 해병대에 대하여 높은 신뢰도를 갖고 있다."고 말하였으며 이를 상부에 보고한 것으로 보아도 '진주'에 주둔한 해병대는 완전히 부대장 金聖恩 중령을 중심으로 일치단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국방부장관 및 주한미군사고문단장'로버-트' 준장 이하 주한미군사단 간부들도 해병대는 국민을 위하는 군대로서 발전하고 있음을 칭찬하였었다. 이와같이 "민폐를 끼치지 않는 해병대"는 이 지방의 주민들로부터 절찬과 협조를 아낌없이 받았었다.
3) 선무공작(宣撫工作)
晉州 주둔에 있어서 해병대의 표어는 "백성없는 전투는 있을 수 없다" 라는 것이었으며 이는 단지 구호에만 끝인 것이 아니었다. 이 이념을 실천하기 위하여 부대장 金聖恩 중령은 민간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온갖 방도를 강구하였다.
이에 부대에서는 선무공작반을 조직하고 9월1일부터 약 2개월 간 각지방을 순회하면서 우선 강연대는 공산주의의 흑막을 폭로하므로써 국민에게 그것이 왜 그릇된 것인가를 알게 하고 영화반은 영화를 통하여 국민에게 공산주의의 폭학상을 알렸었다. 또한 한걸음 더 나가 해병들은 농번기마다 노동력이 부족한 농민들을 많이 도와주므로써 해병대에 대한 신뢰감은 더 한층 깊게 되었다.
이와 같이 '진주'에서 꾸준히 실천한 민심수습과 선무공작은 6.25 전쟁까지 이르는 동안 해병대의 정신무장의 주축을 이룩하게 되었다. 이같은 훈련의 효과는 한국전쟁의 발발 이후 해병대가 참가한 각종 전투에서 역역히 나타났다.
4) 훈련과 경비
해병대는 '진주'에 주둔 당시 외출을 극히 제한하였다. 그것은 민폐도 우려되어 그렇게 하였지만 그보다 백전백승할 수 있는 강병을 육성하기 위한 맹열한 훈련을 실시하기 위하여서는 촌시(寸時)도 아끼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맹훈련만이 전승을 얻을 수 있다는 신념하에 주야를 가리지 않고 훈련을 계속하였다. 밤 중에 한시나 두시경이면 당연히 진주사범학교의 뒷 고지로부터 공비가 내습한다는 가정하에 비상소집을 실시하는 등의 각종 훈련을 계속하였다.
이와같이 민폐를 근절하면서 훈련에 열중하는 광경을 자주 목격한 주민들은 해병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감을 갖게 되었으며 "다른 군대가 공비를 10명 잡으면 해병대는 수10명을 잡을 것이다."라고까지 확언하는 형편이었다.
그로 인하여 주민들은 이같이 신뢰할 수 있는 해병대와 함께 있다는 안도감에서 밤에 대문을 잠그는 것조차 잊어버리게 되어 점차 공비의 내습으로 인한 공포의 생활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러는 중에 가끔 내습하는 공비는 보이는 대로 해병들에 의해 사살되었다.
해병들은 주야를 불문하고 경비에 극력 유의하여 '진주시'의 치안에 만전을 기했으며 적정을 수색하기 위하여 수색조를 편성하여고 농민 혹은 노동자로 변장하여 부락에 1~2명의 해병을 잠복시켜 공비들의 세포조직과 그 동향을 탐지케 하고 공비의 내습을 미연에 방지하였다.
5) 적정과 배치
해병대의 '진주' 주둔으로 인하여 '진주'습격의 야욕을 이루지 못하는 공비는 '진주'습격을 기어히 감행해 보려고 그 병력과 장비를 매일같이 증강하고 있었다.
10월 11일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인 육군의 김백일(金白一) 대령으로부터 "경찰이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白雲山의 공비 약 300여 명이 '진주'를 습격할 것을 기도하고 있으니 해병대는 경찰과 협력하여 방어를 철저히 하라"는 통첩을 받았다. 해병대는 즉시 '진주'를 중심으로 병력을 재배치하였으며 견적필살(見敵必殺)의 사기는 충천하여 경계 및 방어에 임하였다.
(4) 共匪의 내습과 해병대의 활약
晉州市를 중심으로 1개 분대씩 경계초소를 배치한 해병대는 적정을 수집하는 동시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10월 12일 이중업이라는 자가 지휘한 공비 약 80명이 晉陽郡 水谷面 土谷里에 내습하여 지서에 위협사격을 하면서 일부 공비들은 면사무소에 방화하였고 10월16일 폭도 4명이 '진주'와 '하동'을 연하는 통로의 요지인 '평원'지서 부근에 출현하여 민보단원들에게 "우리들은 해병대이니 경찰에 보고할 필요가 없다"고 위협하였다. 또한 10월18일에는 해병대 제1분초에서 비무장공비 6명을 체포하였다.
이상의 적정과 입수된 정보를 종합판단한 결과 "공비들은 白雲山방면과 '협천'방면으로부터 내습하여 '진주'교외에서 합류하고 '진주'시내를 습격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이같은 적정판단아래 해병대는 제1중대를 '진주시' 외곽경비에 임하게 하고 하사관교육대를 병사 서북방고지에 배치하고 제5중대를 병사 및 '진주시'의 경비에 임하게 하였다.
해병대의 철통같은 경비 및 방어로 인하여 수차에 걸쳐 패배한 이들 공비들이 막대한 손실을 무릅쓰고 '진주'에 내습하려는 목적은 무기를 탈취함과 동시에 晉州刑務所를 파괴하여 죄수들을 석방, 포섭하므로써 병력을 증강하여 사실상 '진주'를 또다시 여,순(麗,順)화하려는 데에 있었다.
이들 공비는 예상한대로 10월 27일 01:40시 '진주'에 내습하여 왔다. 야음으로 인하여 적정파악이 매우 어려웠으나 적의 내습병력의 단위는 40~70명이었고 그 중에는 여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의 장비는 주로 M1소총, 99식소총, 및 칼빈소총과 약간의 중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복장은 일본 육군복이고 철모와 각반(脚絆)을 착용하였으며 신발은 일제 지가다비(地下足)를 신고 왼쪽팔에 흰 헌겁(白布)을 두루고 있었다.
적은 이미 초저녁에 공격목표에 가까히 접근한 후 02:00시에 공격을 감행하면서 방화와 약탈을 자행한 후 날이 새기시작하자 도주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행군은 산능선과 하천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부락주민들에게 발견되지 않았고 또한 도주를 전제로 한 내습이어서 사전에 집결지를 정해 놓고 행동하였기 때문에 공비들의 행방을 추적하기에 매우 어려웠다.
(5) 共匪들의 전투경과
晉州에 내습한 공비는 내부혼란반과 방화반으로 편성되어 10월 27일 01:40시 해병부대 주변에 접근하여 위병소서쪽 기지부근으로 침입하여 왔다. 이때 제1중대의 병사내에는 4명의 해병들이 있었는데 그 중 1명은 보초근무 중이었고 그외의 인원은 취침하고 있었다.
공비들의 총성으로 이들 해병과 하사관교육대원은 일제히 기상하였으나 이때는 이미 공비들의 내부혼란반은 병상에 누워있던 2등수병 이울우(李一雨)를 사살하고 방화반은 병사내에 휘발유를 뿌리고 방화하였다. 동시에 제2병사의 주력부대도 무장을 완비하고 혼전 중인 제1병사를 향하여 사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제5중대소속 2등수병 김희선(金熙善)과 제1중대의 3등병조 이우섭(李雨燮)이하 9명은 병기고에 침입하려는 적을 사격하여 영외로 격퇴시켰으나 이때 2수 김희선은 전사하였다.
한편 정찬교(鄭燦敎) 병조장 이하 8명도 이 공비에 집중사격을 가하여 그들을 완전히 격퇴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04:30시까지 계속하였다. 이렇듯 해병대 병사에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공비는 '진주'시내에 침입하여 '진주'군청, 재판소, 및 형무소 등에 방화하였다. 해병대는 곧 시가전에 돌입하였고 도주하는 공비를 추격하였다.
이때 사살된 공비(중대장급으로 추정되는 자)가 소지하고 있던 수첩에서 적의 기도를 알 수 있었다. 즉 河東방면에서 침입한 적 150명은 해병대를 담당하고 '산천', '협천'에서 내습한 공비 약 110명은 '진주'시내에 침입하여 각요소에 매복하여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려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해병대방면으로 내습한 적은 무력하였다기 보다 해병수색대가 그 동안 連日連夜 맹훈련을 거듭하여 쌓은 전투력의 증강이 이와같이 적의 내습을 격퇴할 수 있었다. 해병부대의 정면에 내습한 적의 주력은 여지없이 분쇄되었으며 이들은 '하동'방면으로 후퇴하고 일부병력은 '협천'방면으로 도주하였다.
'협천'방면으로 도주한 소수의 공비는 07:00시경에 實川지서를 습격하였다. 이는 해병대 병력을 '협천'방면으로 유인하고 또한 '하동'방면으로 도주 중인 적의 주력부대의 후퇴를 용이하게 하려는 양동작전(陽動作戰)에 불과하였다. 이와같이 해병부대로 내습한 적은 그때마다 완전히 격퇴당하고 말았다.
再次 있을 공비의 내습에 대비한 해병들의 임전태세는 항상 견고하게 되어 있었으며 공비들의 내습을 사전에 격퇴하기 위하여 해병대는 '진주'와 '하동'을 연하는 도로요소인 '신안리'에 1개 소대의 병력을 배치하고 '진주시'의 외곽요소인 '망운산', '조락', '개양', '상대리', '초전리', '왕봉', '비봉', '지내동', 및 '양곡' 등지에 분초를 설치하고 공비의 내습에 대비하여 철저히 경계하였다.
이같이 용전감투한 해병대의 공로에 대하여 국회의원을 비롯한 요로인사들이 내진하여 해병들을 위문하였다. 11월27일 주한 미군사고문단장 '로버-트' 준장이 해병대 사령관 申鉉俊 대령과 해병대 군사고문관 '파그레인'중위에게 해병대의 분투를 찬양하는 서한을 보내왔다.
'진주'습격의 뜻을 이루지 못한 공비는 11월 14일 약 150명이 '산청'경찰서를 습격하여 왔다. 이때 부대장 金聖恩 중령은 즉시 전투태세를 갖추고 '산청'으로 출동하였으나 적은 이미 도주한 뒤여서 명에 의하여 추격은 중단하고 철수하였다. 12월13일에 약 100명의 共匪가 河東郡 '목계리' 및 '옥종면'부근에서 약탈행동을 자행한다는 정보에 접하고 申鉉俊 사령관이 직접 출동하여 내습한 공비를 격퇴시켰다.
이와같이 해병대가 滿4개월 동안 '진주'에 주둔하면서 민심수습, 선무공작, 훈련, 및 공비소탕 등에 많은 성과를 거두고 '진주'시민의 哀惜裡에 12월 26일 '진주'를 출발하여 제주도(濟州島)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이미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陸軍 第14聯隊와 교대하기 위함이었다.
자료출처: 海兵戰鬪史 第一輯(海兵隊司令部發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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