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장 때 공수훈련에 앞장섰던 제11대사령관 이동용 장군
11대 사령관 중장 이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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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임기간 1975.7.10 ∼ 1977.8.31
- 생년월일 1927년 4월 27일
- 출 생 지 충북 보은
- 학 력
- 1953 서울대학교 졸업
- 1956 미 해군학교 A.T.U 과정 수료
- 1958 미 육군 참모대학 수료
- 1963 미 해군상륙전학교 고군반 수료
- 1964 육군대학교 수료
- 1969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수료
- 1956 미 해군학교 A.T.U 과정 수료
- 경 력
- 1950 해병소위 임관
- 1951 1연대 2대대 5중대장
- 1958 1여단 2연대 1대대장
- 1965 1여단 1연대장
- 1969 1사단 부사단장
- 1973 1사단장
- 1975 해군 2참모차장
- 1975 11대 해병대 사령관
- 1977 해병중장 예편
- 1951 1연대 2대대 5중대장
- 상 훈
- 1952 을지 무공훈장(2회)
- 1952 충무 무공훈장 (2회‚ ′70)
- 1962 4등 근무공로훈장
- 1967 대통령 표창
- 1969 3등 보국훈장
- 1971 을지무공훈장
- 1971 미 공로훈장
- 1975 보국훈장 국선장
- 1952 충무 무공훈장 (2회‚ ′70)
제4대 청룡부대장과 제2대 해군본부 제2참모차장을 역임한 이동용(李東用) 장군. 해병사령부가 해체된 그 해(73년) 7월 해병제1사단장으로 임명이 되었던 그는 비통한 심정을 가다듬으며 장병들의 저하된 사기와 침체된 부대 내의 분위기를 일신하고 전 사단 장병들의 특수요원화를 추진하기 위해 각 연대별로 1개 대대는 공수대대, 1개 대대는 유격대대, 1개 대대는 기습특공대대로 명명하여 최강을 목표로 한 강훈 일변도의 특수훈련에 매진했고, 그러는 과정에서 사단 내에 공수교육대(장, 라호원 대위)를 발족시켰던 그는 측근에서 위험한 일이라며 적극 만류를 했는데도 솔선수범하기 위해 그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부관(김인식 중위, 현 해병대사령관)과 함께 공수교육대에 입교하여 5주 간에 걸친 기본교육(토·일요일 제외, 13시~15시)을 충실히 받은 다음 공군에서 지원해 준 C-123 수송기로 6.25때의 격전장인 안강(安康) 상공 1,300피트 고공에서 2일간 2회 연거푸 점프를 했고, 그 후 비바(U-6A) 정찰기로 3회 영일비행장 상공에서 점프를 하는 기록을 세움으로써 그러한 소식을 전해 들은 미8군사령관이 그 어떤 사석에서 “제너럴 리(李) 넘버원”이라며 이 장군을 추켜 세웠다는 소문이 전해진 적이 있었다.
충북 보은 출신(1927년생)으로 청주상고를 거쳐 46년 4월 서울대학교 법대에 진학했던 이 장군은 해병대를 동경했던 나머지 50년 1월 하순경 제주도에서 해간2기로 입대, 임관(50.7.27)함과 동시에 8월 5일 모슬포에서 입대한 해병3기 신병교육대의 소대장 근무를 하다가 해병대가 제주도를 떠난 9월 초 진해에서 편성되어 9월 26일 수색에서 5대대에 편입된 23중대 2소대장으로 임명되어 수도탈환작전과 북한지역 작전에 참가했고, 특히 1.4후퇴 후(51년 9월) 해병대가 양구(楊口) 북방의 펀치볼 지구에서 924고지와 1026고지 탈환작전을 감행할 시에는 5중대장으로서 참가했던 1026고지 탈환작전에서 용맹을 떨쳤다.
휴전 후 2회에 걸쳐 도미유학(미 해군상륙전참모과정과 상륙전고급참모 및 지휘과정)을 했던 이동용 장군은 귀국 후 사령부특무대장, 해군본부 헌병감, 제1연대장을 거쳐 사령부인사국장 재임기간 중(66.8~69.9) 해간2기생으로서는 최초로 준장으로 승진하여 그 이듬해(70년) 2월 제4대 청룡부대장으로 임명되어 71년 8월 5일 제5대 청룡부대장 허홍 준장에게 지휘권을 인계할 때까지 철군기를 앞두고 있던 전술책임지역 내에서 황룡1호에서 황룡10-22호까지의 작전을 지휘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철군을 앞두고 있던 당시의 여단장으로서는 작전상의 문제 외에 다음과 같은 문제 때문에도 신경을 써야만 했다. 즉 첫째는 병력의 철수(1진 철수 71.12.4)에 대비하는 일이었고, 두 번째는 연합군의 철수시기를 전후하여 미군과 월남군의 도망병이 들끓고 살인사건 등 각종 범죄사고가 빈발하고 있는 다낭지구의 교민(수천 명에 달한 취업근로자들) 보호와 장병들과 교민들의 대민 사고를 방지하는 문제 등이었는데, 당시의 여단 헌병대장(태권도 반장 겸임) 김효정씨(해간36기)의 증언에 따르면 특히 여단장 이동용 장군은 자기에게 청룡부대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대민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엄명을 내렸다고 하며, 그러한 명령에 따라 그는 장병들과 교민들에 의한 불미스런 대민사고가 발생했을 때는 군량미를 이용한 충분한 보상과 설득으로 원성을 듣지 않도록 했고, 특히 죄를 범한 교민들이 월남 법정에 서지 않게 귀국시키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비상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여단장 이동용 장군은 후임 여단장(허 홍 준장, 해간2기)에게 헌병대장을 붙잡아 두라는 말을 하는 바람에 그는 최종제대(梯隊)의 철수가 완료될 때까지 끝까지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하는데 당시의 주월 한국군사령관 이세호 장군(예.대장)의 증언에 따르면 이동용 장군은 육군지휘관들과도 유대가 깊었지만 매우 사려가 깊고 유능한 지휘관으로 기억된다고 말했다.
한편 월남에서 귀국한 직후 이동용 장군은 역대 청룡부대장으로서는 최초로 약 250명에 달하는 해병대 중상자들이 함께 입원해 있는 3육군병원(부산)을 방문하여 월남전선에서 중상을 입은 환자들을 위로했는데,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본서(제2권)에 수록되어 있는 ‘박종렬’씨 편에 소상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동용 장군이 사령부 군수참모부장을 거쳐 제1사단장으로 임명된 것은 사령부가 해체되기 3개월 전인 73년 7월이었으며, 사령부가 해체되고 몸통만 해군에 통폐합된 그와 같은 시기에 그가 모두에서 언급한 전병(全兵) 특수요원화를 위한 기치를 내걸고 강훈에 매진했던 것은 제1사단의 발전사에 길이 남을 발자취를 남긴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러는 관정에서 특히 솔선수범을 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고공 낙하훈련에 앞장섰던 것은 불가능을 가능케하는 해병정신의 실체적인 귀감이 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당시의 사단 공수교육대장 라호원씨(해간45기)의 말에 따르면 3주 간의 기본교육이 끝난 후 김해 공군기지의 지원을 받아 안강벌 상공에서 고공점프를 할 때 사단장은 1일 1회씩 하게 돼 있는 것을 1일 2회씩 하는 기록을 세웠고, 두 번째 점프를 마친 후에는 기분이 좋아서 쓰고 있던 철모에 막걸리를 가득 부어 벌컥 벌컥 마신 그 모습을 지금도 있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사단장이 솔선수범을 함으로써 공수교육이 탄력을 받게 되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사단장 시절에 선견지명을 가지고 단지 내에 골프장을 개설했던 이 장군은 75년 7월 중장으로 승진하여 지휘권이 없는 숨이 막히는 해군 제2참모차장의 임기를 마치고 77년 8월 31일 예편했으며, 예편 후 울산석유화학(주) 대표이사 사장, 수협중앙회 회장을 역임했던 그는 그러한 운명을 타고 났던지 충북개발 사장 재임기간 중인 87년 6월 26일(당시 60세) 간질병을 앓고 있던 아들(장남)의 죽음과 관련된 일로 한강변에서 자살을 함으로써 세상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우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 2 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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