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역대 해병대사령관

4형제를 박사되게 한 제12대사령관 정태석 장군

머린코341(mc341) 2014. 7. 27. 09:19

4형제를 박사되게 한 제12대사령관 정태석 장군

 

12대 사령관 중장 정태석

  • 역임기간  1977.8.31 ∼ 1979.9.26
  • 생년월일  1927년 5월 19일
  • 출 생 지  경남 함양
학 력
1950  해군사관학교 졸업(3기)
1952  해군학교 수료
1956  육군보병학교 수료
1966  국방대학원 수료
경 력
1950  해병소위 임관
1955  1여단 1연대 중화기중대장
1957  3연대 2대대장
1965  1사단 1연대장
1971  5여단장
1975  1사단장
1977  12대 해병대 사령관
1979  해병중장 예편
상 훈
1952  4등 무공훈장
1964  국방부장관 표창
1965  4등 근무공로훈장
1966  충무 무공훈장
1971  보국훈장 천수장
1974  대통령 표창
1978  보국훈장 국선장
1979  미 근무무공훈장

 

청룡부대 초대 참모장. 해군본부 제3대 제2참모차장을 역임한 제12대사령관 정태석(鄭泰錫) 장군은 슬하에 둔 아들 4형제 중 어릴 적에 중이염(中耳炎)을 앓아 징병검사에 불합격 판정이 나 부득불 국방부체육부대의 방위병으로 근무한 막내를 제외한 3형제를 해병대에 입대시켜 자신의 뒤를 잇게 함으로써 영예로운 4부자(父子) 해병가족의 반열에 올랐을 뿐 아니라 근검절약하는 생활정신으로 아들 넷 모두를 미국으로 유학시켜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한 그와 같은 장한 아버지로 알려지고 있다.

 

경남 함안 출신(1927년생)으로 47년 진주중학교를 거쳐 해군사관학교 3기로 입교하여 임관 후 대위의 계급으로 해병대로 전입했던 정 장군은 도미유학을 거쳐(수료과정 미상) 해병대의 여러 단위부대에서 근무를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필자가 고인의 생전에 직접 대담을 통해 수집해 놓은 자료가 없는데다 사령부 인사기록부에 나타나 있는 자료마저 충분치가 못해 65년에 연대장, 참모장, 사령부작전국장, 2여단장, 1사단장, 해군본부제2참모차장 등으로 기재되어 있는 기록사항과 여러 단위부대에서 고인과 함께 근무한 적이 있는 분들(선후배)의 증언, 그리고 고인이 타계(他界했을 때 중앙일보에서 보도한 보도기사 등을 참고로 하여) 고인의 행적과 인물평에 대한 조명을 할 수밖에 없는 입장임을 미리 밝혀 둔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   년)한 후 하사관교육대의 분대장 근무를 한 적이 있었고, 52년 도미유학을 마친 후 해병대로 전입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장태석 장군은 김대식 사령관 재임기간 중(4.19혁명 전) 인재 양성에 뜻을 둔 한국전 참전용사인 미 육군대령의 부인 코린도 여사가 각군 총장 및 해병대사령관의 공식적인 협조를 얻어 한국군 장교들 중에서 약간명의 양자(養子)를 모집할 때 김한수(해간1기) 임동근(해간1기) 송덕순(해간3기) 김동우(해간3기)씨 등과 함께 지망을 하여 약 1년 간 한남동 막사에 적을 두고 서울대학교 문리대 또는 그 근처에 있는 미국인이 경영하는 영어학원에서 영어공부를 한 다음 시험을 치른 결과 그 5명의 장교들 중 김동우씨 만이 합격을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코린도 여사의 양자가 되어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한 다음 대학 교수생활을 했던 그 김동우씨는 작년 모국을 방문했을 때 염태복, 고광수, 장석원, 이춘식씨 등 왕년의 옛 동기생들과 그러한 얘기를 화제로 떠올리며 감개무량한 마음으로 회포를 풀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를 간직하고 있는 정태석 장군은 여단 작전참모로 있을 때 발생했던 5.16(61년) 군사정변 직후(여단장 김윤근 장군이 최고회의 교통체신 위원장으로 있을 때) 대한여행사 사장직을 맡았다가 원대복귀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65년 7월 한국군의 1개 전투사단의 월남 파병도 요청한 존슨 미국 대통령의 요청을 박정희 대통령이 수락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된 한국군의 월남 파병 때는 합참과 미 8군사령부에서 정 대령이 지휘하는 해병제2연대를 채명신(蔡命新) 소장이 지휘하는 육군 맹호사단에 배속시키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본인의 사기를 고무했으나 합참의 명령에 따라 맹호사단장(주월 한국군사령관 겸임)에게 배속신고를 한 상태에서 그러한 결정이 변경되는 바람에 결국 제2여단(청룡부대)의 초대 참모장(겸 연대장)으로 임명되어 청룡부대가 파월되기 약 1개월 전 선발대(기획단)를 이끌고 캄란만에 상륙, 캄란 북방 4마일 지점에 위치하는 미군기지에 도착하여 10월(65년) 9일 캄란만에 상륙한 청룡부대가 그 미군기지에서 미 제101공수사단과 502공수보병대대와 임무를 교대할 때까지 부여된 준비임무를 수행했고, 미군들로부터 그 기지를 인수한 청룡부대는 그 미군기지 내에 있는 비행장 및 항만시설 뿐 아니라 1번도로 및 철도 등에 대한 경비임무 외에 지역 내의 적 게릴라 소탕전을 전개하다가 66년 1월 투이호아지구로 이동했는데, 선발대 요원의 한 사람이었던 청룡부대 초대 정보참모 이병하씨(해사5기)의 증언에 따르면 남이 알지 못하게 겪었던 선발대 요원들의 고충이 막심했다고 한다.

 

그런데 여단장 이봉출 장군을 보좌하며 약 1년 간 참모장의 직책을 수행했던 정 장군은 특히 청룡1호작전 때(66.1) 포병대대 진지 앞으로 나 있는 통로로 남부여대한 수천 명의 피난민들이 몰려오고 있는 그 절박한 상황 속에 현장에 나와 있던 월남군 당국자와 지방행정관은 필시 양민을 가장한 베트콩들이거나 그들의 동조자들일 것이니 즉각 포격을 가하라고 종용을 하는 가운데 여단장 이봉출 준장의 입에서 “일일이 검색을 해서 통과시키라”는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그 조마조마 했던 순가니 잊혀지지 않는다고 언젠가 필자에게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정 장군은 만약에 그 수천 명의 피난민들에게 포격을 가했더라면 월남전 사상 유래 없는 양민 학살사건이 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월남전선에서 귀국한 후 정 장군은 사령부 작전국장 재임기간 중 준장으로 승진하여 제2여단장과 사단장(소장진급)을 거쳐 해군본부 제2참모차장을 역임함으로써 역대 사령관의 반열에 올랐으나 한편으론 그 모군의 수난기에 해사출신으로 제2참모차장을 역임한 장성 가운데 약 5개월 간이긴 했지만 후배기수(4기) 총장(12대총장 김종곤 대장)을 직속상관으로 받든 유일한 제2참모차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모두에서 언급을 했듯이 정 장군은(부인의 내조의 공이 컸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근검절약하는 정신으로 아들 4형제 모두를 미국으로 유학시켜 박사가 되게 했을 뿐 아니라 평족(平足)이 되어 부득불 해병대에 입대하지 못하고 국방부 체육부대에서 방위근무를 한 막내를 제외한 3형제 모두를 해병대에 입대시킴으로써 영예로운 4부자 해병가족이 되게 했으니 비록 고인이 되고 말았지만(2000년 11월에 타계) 장한 해병의 아버지라는 그 명성은 이 책과 함께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 2 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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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청룡부대 여단 참모장 정태석 대령


중앙: 여단 참모장 정태석 대령


좌: 여단 참모장 정태석 대령



좌 두번째 : 여단 참모장 정태석 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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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과 추억] 고 정태석 전 해병대사령관

 
중앙일보 2002.02.23 12:13에 입력된 기사

지난 17일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정태석(鄭台錫) 전 해병대사령관은 진정한 군인정신을 발휘한 무장이었다.


지난 21일 국군수도통합병원에서 치러진 장례식에서 김명환(金明煥)해병대사령관은 조사(弔詞)를 통해 "고인은 의롭고 정의로운 외길을 걸으면서도 주위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아왔다" 고 추모했다.


1927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난 고인은 50년 해군 소위(해사 3기)로 임관해 한국전쟁에 참전한 뒤 65년 해병 제2전투단 초대 참모장 겸 여단장으로 베트남전에 참가, 캄란.토이호아 전투 등에서 연전연승하며 '상승불패' 의 해병대 전통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 77~79년 제12대 해병대사령관으로 재직할 때는 전투력 향상은 물론 한.미 해병대간 협력을 공고히 하는 등 군사외교에도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고인은 타고난 군인이었다. 5.16 후 혁명정부가 "우리와 함께 일하자" 고 청했지만 그는 "군인으로 은퇴하는 게 가장 큰 꿈이자 영광" 이라며 군에 남았고, 이후 거듭된 정권의 부름에도 끝내 군복을 벗지 않았다.


전역 직후 신군부의 동참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 역시 이같은 신념 때문이었다. 제15대 해병대사령관을 지낸 박희재(朴喜宰.68)예비역 중장은 "본인의 공로도 모두 후배에게 돌려 승진이나 포상 등을 배려하곤 했다" 며 "틈틈이 후배들을 불러 쌀밥을 정성스레 지어주곤 했던 기억이 새롭다" 고 말했다.


73년 해병대가 잠시 해군에 편입됐을 때 세력이 미약했던 해사 출신 후배들이 "이제 뭉칠 때가 왔다" 며 반겼지만 "지금은 화합할 때인데 무슨 얘기냐" 며 되레 호통을 쳤다는 일화는 지금도 후배들 사이에 회자되는 얘기다.


고인은 가정에서도 근검과 교육을 신조로 삼았다. 둘째아들 연국(淵國.44.미 캘리포니아대 교수)씨는 "10년이 넘은 옷을 해질 때까지 입고 일흔이 넘은 나이에 직접 세차를 할 정도로 근검절약하셨다" 고 회고했다.


사령관 시절 휴가 나와 집 주위를 청소할 때는 워낙 남루한 옷을 입고 있어 고인을 청소부로 착각한 이웃들이 "우리집도 청소해 달라" 고 부탁할 정도였다는 것.


고인은 아들 네 명 모두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할 만큼 교육열이 대단했다. 막내아들 연인(淵仁.39.계명대 교수)씨는 "어린 자식들 연필 깎아주는 게 아버님의 유일한 낙이셨다" 며 "전역하신 후에도 '너희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교육뿐' 이라며 자식들 뒷바라지에 전념하셨다" 고 전했다.


군인 시절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던 고인은 권력을 휘두를 만한 위치에 있었지만 "군인의 자식이 국방의 의무를 소홀히 해서야 되느냐" 며 중이염을 앓던 막내를 빼곤 모두 해병대에 보냈다.


고인의 비서실장이었던 박종수(朴宗秀.60)예비역 준장은 "전형적인 외유내강의 무관으로 부하가 잘못해도 소명할 기회를 주곤 해 후배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며 진정한 군인의 사표(師表)를 남긴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박신홍 기자 jbjea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