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역대 해병대사령관

해군본부(초대) 제2참모차장 역임한 제10대사령관 김연상 장군

머린코341(mc341) 2014. 7. 27. 09:16

해군본부(초대) 제2참모차장 역임한 제10대사령관 김연상 장군

 

10대 사령관 중장 김연상

  • 역임기간  1973.10.10 ∼ 1975.7.10
  • 생년월일  1927년 7월 16일
  • 출 생 지  경기 안성

학 력
1949  해군 항해학교 수료
1956  육군대학교 수료
1960  국방대학원 수료
1965  미 해병대 MTT 교육 수료
1969  미 해군상륙전학교 고군반 수료
1972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수료
경 력
1950  해병소위 임관
1951  3대대 10중대장
1954  해병대사령부 본부대대장
1960  1사단 11연대장
1966  2여단장
1968  상륙전기지 사령관
1971  해군 2참모차장
1973  10대 해병대 사령관
1975  해병중장 예편
상 훈
1953  금성충무 무공훈장(3회)
1962  4등 근무공로훈장
1962  국방부장관 표창(′66)
1967  을지 무공훈장
1969  미 공로훈장
1971  대통령표창
1974  보국훈장 국선장

 

제2대 청룡부대장을 역임한 김연상(金然翔) 장군은 그가 제1사단장으로 있을 때 스스로 해병대의 황태자임을 자처하며 사령관으로 취임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행운의 여신이 그의 진로를 가로막는 바람에 73년 10월 10일 해병대를 탄압하려는 유신 독재정권에 의해 사령부가 해체되어 해군에 통폐합되는 조치가 취해짐으로써 그가 꾸어왔었던 그 황태자의 꿈은 산산이 깨어지고 말았고, 그런 사태가 발생한 후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해군참모총장을 보좌하는 지휘권 없는 신설된 제2참모차장 자리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또한, 해병대를 철저히 말살해 버리기 위해 육군의 공수단과 함께 전략군사령부로 흡수 통합하려는 군부(국방부와 합참)의 압력과 회유에 시달려야만 했던 비운(悲運)의 장군으로 기억되고 있다.

 

경기도 안성 출신(1927년생)으로 정부 수립 직후 국방부에서 확보한 군경력자의 일원(일본 해군출신)으로 해군항해학교를 거쳐 3조(하사)의 계급으로 신병 1기생들의 훈련에 기여했던 김 장군은 그 후 해간1기생으로 선발되어 육사9기생들과 소정의 과정을 수료한 다음(50.1) 당시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사령부에 복귀하여 하사관교육대의 전술교관으로 임명되어 전투력의 핵심적인 요소가 될 분대장급 하사관 육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으며,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3대대 작전장교로 임명되어 인천상륙작전과 김포지구 및 고성 마전 양덕(陽德·평남) 지구 전투에 참가했고, 1.4후퇴 직후에는 포병대대의 창설요원으로 선발되어 육군포병학교를 거쳐 휴전 전까지 포병대대의 제1중대장 대대본부 작전장교 및 부대대장을 역임했다.

 

휴전 후 국방대학원을 거쳐 해병학교 교장과 사령부 작전국장 등을 역임했던 김 장군은 한국군의 월남 파병기간 중(66.12.20) 제2대 청룡부대장으로 임명되어 약 1년 6개월 간의 재임기간 중 짜빈동 기습방어작전과 테로이 매복전 등 많은 작전을 지휘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1개 중대의 병력(3대대 11중대)으로 1개 연대의 월맹군의 기습공격을 격퇴시킨 그 짜빈동 기습방어전은 많은 기록과 화제를 남겼는데, 그 뒷얘기 중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청룡부대를 방문했던 대통령비서실장 김계원 장군(육사2기·전 육군참모총장)과 청룡부대장 김연상 장군이 나눈 다음과 같은 대화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즉 김계원 실장이 김 장군에게 평소 부대를 어떻게 운용하고 있는가를 묻자 김연상 장군은 특히 하사관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해병대에서는 주임상사 제도(미 해병대에서 도입한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고 하자 김계원 실장은 시종 고개를 끄떡이며 경청을 했다고 하는데 그 후 육군에서도 주임상사 제도를 운용하게 된 것은 바로 그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청룡부대장 근무를 마친 후(69년 말경) 미 해병대의 상륙전학교에 입교해있던 김연상 장군은 어느 날 아침 그 학교 행정장교의 전화연락을 받고 군용기 편으로 워싱턴으로 가서 백악관에서 수여하는 프레스 대위에 대한 십자훈장 수여식에 참석했는데, 청룡부대장 재임 시절에 전용 헬기 조종사로 근무했던 그 프레스 대위가 그 영예로운 십자훈장을 받게 된 것은 어느 날 김 장군을 목적지에 내려다 놓고 공중 대기를 하고 있던 중 지상포화를 받고 해변에 추락한 미군 수송기의 조종사를 구하기 위해 헬기를 몰고 적중으로 뛰어 들어 100여 명의 적을 해치우고 그 조종사를 구출해 낸 초인적인 전공 때문이었다고 하며, 또한 KMC의 박치기를 동경한 끝에 미군 장교클럽에서 박치기를 흉내 내다가 이마에 부상을 입기까지 했던 그 프레스 대위는 지상 포화가 있을 시엔 김 장군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는 희생적인 정신을 발휘함으로써 김 장군으로 하여금 진한 우정과 전우애를 느끼게 한 그런 사람이었다고 한다.

 

김연상 장군이 일생을 통해 가장 고뇌했던 일은 모두(冒頭)에서 언급한 그 사령부 해체 조치(73.10.10)와 그러한 조치가 취해진 후 마치 유배를 당하는 심전으로 해군제2참모차장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고, 또 제2참모차장 재임 기간 중 내내 압력과 회유를 받아왔던 그러한 일들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일들 가운데 김 장군이 현실적으로 가장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일은 합참의장 한신 장군 등 군부의 실세들이 박 대통령의 의도라면서 김 장군으로 하여금 총대를 메게 하여 해병대를 전략사령부에 흡수시킴으로써 해병대를 말살시켜 버리려고 했던 바로 그 일이었다. 그 일로 집요하게 김 장군에게 접근해 왔던 군부의 실세들로부터 김 장군은 김 장군이 원할 경우 4성 장군인 전략군사령관으로 갈 수 있다는 언질과 유혹을 받았으나 결국 그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李完用)의 길을 택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해병대를 되살려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다음과 같은 건의와 요구를 끈질기게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국방부 훈령에는 장교들의 계급구조를 해군사관학교 출신 3분의 1. ROTC 출신 3분의 1. 육군3사관학교 출신 3분의 1로 조정해 놓은 것을 ROTC 장교와 육군3사관학교 출신 장교를 끌어들이지 않기 위해 해군제2사관학교를 설치하여 해병장교를 양성해 줄 것을 건의 했고, 또 반란도 일으키지 않고 구데타도 일으키지 않을 테니 포항에라도 좋으니 규모가 작은 사령부를 설치해 줄 것을 일관되게 요청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런 일들 때문에 자신의 직무(제2참모차장)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던 그는 그가 자신의 임기를 마칠 때까지(75.7.25) 해군본부에서 개최된 그 어떤 회의에도 참석한 적이 없었고, 단 한 차례도 해군본부 장교식당에서 식사를 한 적도 없었을 뿐 아니라 ‘장군의 비망록’에 언급되어 있듯이 자신의 전역식에도 나가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75년 7월 중장의 계급으로 예편한 뒤 약 2년 간 동서석유화학주식회사 사장으로 재임했던 김 장군은 헬스클럽에 다니며 건강관리에 신경을 써왔으나   92년 12월 지병으로 인해 향년 6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 2 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