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대 국회의원 지낸 제8대사령관 해병대장 정광호 장군
- 8대사령관 대장 정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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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임기간 1969.7.1 ∼ 1971.7.1
- 생년월일 1922년 10월 25일
- 출 생 지 경기 화성
- 학 력
- 1948 해군특교 졸업(1회)
- 1958 육군대학 수료
- 1966 경희대학교 대학원 수료
- 1970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수료
- 1981 연세대학교 대학원 신학박사
- 1958 육군대학 수료
- 경 력
- 1948 해군소위 임관
- 1950 2대대 7중대장
- 1953 3대대장
- 1959 1사단 2연대장
- 1959 1여단장
- 1965 부사령관 겸 참모장
- 1966 1사단장
- 1969 8대 해병대 사령관
- 1971 해병대장 예편
- 1950 2대대 7중대장
- 상 훈
- 1952 금성을지 무공훈장
- 1953 무성충무 무공훈장(2회‚ ′54)
- 1954 미 동성훈장
- 1953 무성충무 무공훈장(2회‚ ′54)
대장의 계급으로 제8대 사령관을 역임(‘69.7.1~71.6.30)한 정광호(鄭光鎬) 장군. 예편 후(’73.3) 유신(維新)헌법이 탄생시킨 임기 6년의 제9대 국회의원 중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한 73명 중의 일원으로서 1기(一期) 3년간을 의정단상에서 활약한 바 있는 정광호 장군은 처세술에도 능하고 관운도 따랐겠지만 ‘48년 9월 1일에 소위로 임관한 해사 1, 2차 특교대 160명(해군 131, 해병29) 중 유일하게 4성 장군이 된 행운의 덕장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기도 화성 출신 (1922년생)으로 19세때까지 출생지의 시골 간이학교의 훈도로 있다가 전쟁 말기 조종사를 양성한 만주 항공회사에 취직했던 정광호 장군은 8․15 해방과 함께 귀국, 당시 동대문에 위치한 광복군 국내지대사령부(사령관 오광섭)에서 활동하던 중 명동 시공관에 자리잡고 있던 국군준비대(좌익단체)의 습격을 받아 운현궁(관훈동)으로 이동했다가 미 군정청의 해체명령으로 광복군 국내지대가 해체를 당하는 바람에 46년 5월 해군중위 황운서의 인도하에 이희정, 김광식, 채택현, 정봉익, 김세일, 임덕진씨 등과 함께 창군기의 해병병단에 입대하게 되었고, 그 후 준사관교육대와 해사특교대(제1차)를 거쳐 소위로 임관했던 정 장군은 인천 헌병대장을 거쳐 49년 3월 창설기의 해병대로 전입, 초대 헌병대장으로 임명되었으나 그 후 명에 의해 해군으로 복귀, 묵호경비부 참모장 겸 헌병대장으로 근무하다가 제1정대사령부 소속 302호에 승선하여 함장 실습교육을 받던 중 6․25전쟁이 일어나 제주도에서 해병대의 제2대대를 편성할 무렵 명에 의해 해병대로 복귀, 2대대 7중대장으로 임명되어 경인지구 작전을 비롯해서 목포 영암지구 및 원산 함흥 지구 전투에 참가했다.
포화 속의 옛일을 회고하는 정 장군은 특히 9월 26일 오후 7중대가 구세군 건물에 중대본부를 두고 서대문 뒷쪽 고지로부터 독립문 일대에서 잔적소탕을 할 때 조성준 소위가 지휘하는 1소대 대원들이 그때까지 아군이 서울시가지에 진입한 것을 알지 못한 채 민가에서 지은 김이 무럭거리는 주먹밥을 리어커에다 싣고 가는 1개 분대의 적 취사병을 몽땅 생포했던 일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제주도 출신 학도병들의 성실성과 충성심에 대해 전령의 경우 처음에는 의사 소통에 장애가 있어 불편했지만 상관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그들은 모두가 용감한 군인들이었다면서 그들이 해병대의 불패 상승의 전통에 이바지한 공로는 참으로 클 것이라고 했다.
사령부 인사국장 재임 시인 ‘62년 준장으로 승진했던 정광호 장군은 그 때부터 순풍에 돛을 달 듯 기획참모부장을 거쳐 여단장, 행정참모부장을 역임했고, 소장으로 승진하여 참모장겸 부사령관을 역임했던 그는 66년 3월 강기천 사단장의 뒤를 이어 제1사단장으로 임명되어 특히 파월 교체부대 병력에 대한 특수교육을 위해 불철주야 정진했다.
정광호 장군이 대장의 계급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제8대 사령관으로 취임했던 것은 ‘69년 7월 1일이었으며, 23년간의 군 복무기간 중 이날처럼 영광된 날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 주월 청룡부대는 6월초부터 전개 중에 있던 고 노이섬에 대한 한․미․월 연합작전(승룡 12-1호)을 수행 중에 있었으나 불과 한 달 후부터 주월 미군의 단계적인 철수가 이루어지게 됨으로써 월남전도 미국 정부의 월남화 계획으로 인해 서서히 종국으로 접어드는 상황이었다.
사령관 재임기간 중 2차에 걸친 미 해병대 방문을 통해 정광호 사령관은 국군의 장비 현대화 계획에 따른 신장비 도입과 최전방 진지의 요새화를 도모함으로써 유사시에 대비한 모군의 전투력 강화에 이바지한 공이 컸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군복무기간 중 학구적인 노력을 지속적으로 경주하여 국민대학 법과를 거쳐 경희대학원 정치학과 및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과 교육대학원 과정을 이수했던 정광호 장군은 ‘71년 6월 30일 대장의 계급으로 예편한 후 73년 9대 국회가 구성될 때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한 1기(3년) 의원으로 선출되어 소속분과인 건설분과위원회의 상임간사직을 맡는 가운데 소임 완수를 위해 성념을 다 했다.
해방 직후의 창군기로부터 25년간을 조국의 국방과 모군의 발전을 위해 몸바쳐 왔던 정광호 장군은 북한 정권이 핵 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데 대해 깊은 우려를 표하면서 우리 국민의 대북 경각심이 더 이상 해이해선 안 될 것이라고 말한다.
소문에 의하면 정광호 장군은 오래 전부터 어려움에 처한 옛 동료들을 돕는 일에 남다른 정성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덕불고(德不孤) 필유인(必有隣)이라 했거늘 황혼길에 그런 이웃이 있다는 것도 복된 일이고, 그런 이웃에게 은덕(隱德)을 베푼다는 것 또한 복된 일이 아니겠는가.
사령관 임기를 마친 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과거 한남동 공관에서 근무를 했던 부관들과 근무병들을 매년 잊지 않고 두 차례씩 초대하여 회식을 한다는 정 장군은 최근에 옛 동지 한 사람이 치매에 걸려 집을 나가 행방이 묘연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는 신문사에 광고를 내어 용케도 그 동지를 찾아 준 일이 있었다고 하니 전해 듣기에 흐뭇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 1 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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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급 및 보직신고하는 정광호 제8대 해병대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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