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역대 해병대사령관

해사출신 최초의 사령관 제6대사령관 공정식 장군

머린코341(mc341) 2014. 7. 25. 21:24

해사출신 최초의 사령관 제6대사령관 공정식 장군 

 

6대 사령관 중장 공정식
  • 역임기간  1964.7.1 ∼ 1966.7.1
  • 생년월일  1925년 9월 3일
  • 출 생 지  경남 밀양
학 력
1943  마산 공립상업고등학교 졸업
1947  해군사관학교 졸업(1기)
1953  미국 해병 초급지휘참모반 수료
1958  미국 해병지휘 참모대학 수료
1961  국방대학원 수료
 
경 력
1947  해군사관학교 및 해양대학 교관
1948  해군 통영함(302) 함장
1952  연합참모본부 작전부 차장
1955  해병대 제3전투단장
1956  사령부 참모부장
1961  보급 정비단장
1962  해병대 제1상륙사단장
1964  제6대 해병대 사령관
1966  해병중장 예편
 
상 훈
1951  충무 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미동성훈장(′52)
1952  금성을지 무공훈장(2회)
1954  금성충무 무공훈장(′56)
1962  3등 근무공로훈장
1965  미국지휘관송로훈장‚ 중화민국 운마훈장‚
         태국백상훈장‚ 월남킨칸훈장
1966  미국금성훈장‚ 대한민국상이기장

 

육척 장신에 친화적인 포용력과 호걸스러운 풍모를 지닌 6대 해병대사령관 공정식 장군은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해병대로 전입한 장교들 가운데 가장 먼저 해병대사령관을 역임한 해군사관학교 출신 해병대 장교들의 대부격인 인물이다.

 

1925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하여 마산 상고를 거쳐 해군사관학교(1기)를 졸업했던 그는 소해정 302호 정장(대위)으로 근무 중에 있던 ‘48년 10월 중순 서귀포 근해에서 맥아더 라인을 침범한 일본인 어선 2척을 나포하여 서귀포 세관에 인계하고 여수함에 정박했던 바로 그날(10.19) 밤 여순지구에서 육군부대의 반란사건이 일어나자 즉시 해본에 타전하여 긴급상황을 보고하는 한편 함정을 해상으로 대피시켜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중 그 다음날 이른 아침 부두 일각에서 구원을 요청하고 있는 육군14연대장 등 소수의 장교들이 있기에 그들을 보트로 구출하여 명령에 따라 해본(부산항 제1부두)으로 호송한 다음 부산에서 출동하는 1개 대대의 육군 병력이 승선한 수송선을 여수까지 호위하는 임무를 수행한 데 이어 해군에서 긴급히 출동시킨 임시함대(사령관 신현준 중령)에 합류하여 해상으로 도주하는 반란군 소탕전에 임했다.

 

공 장군이 해병대에 전입했던 시기는 1.4후퇴 직전인 ’50년 12월 제1연대(초대 연대장 김성은 대령)가 편성될 때였고, 초대 대대장으로 임명이 되었던 그는 그로부터 영덕지구 전투와 영월지구 및 화천지구 전투를 거쳐 도솔산지구 탈환작전에 참가했는데 특히 도솔산 탈환작전에선 1대대장으로서 용명을 떨쳤다.

 

휴전 직후 도미유학으로부터 돌아왔던 그는 교육단의 교수부장으로 임명되어 신설부서인 상륙전작전처의 처장을 겸직하며 도미유학의 선두대열에서 미 해병학교의 기초반 과정을 이수한 조봉식 장대길 대위 등과 함께 상륙전 교육의 기반을 조성하는 데 기여했고, 휴전 후 처음으로 여단금 상륙훈련을 실시하기 위한 한‧미합동 준비회의가 오키나와에서 열렸을 때는 합동상륙군 여단장의 자격으로 그 회의에 참석했다.

 

국방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61년 5.16 새벽 그는(당시 준장) 혁명 주체로 거사(擧事)에 가담했던 김동하(예비역)소장의 전화 연락을 받고 육군본부 청사로 출두한 그 자리에서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박정희 소장으로부터 미1군단의 작전 통제 하에 있는 공석 중인(김윤근 여단장의 거사 가담으로) 김포여단장을 맡으라는 명령을 받고 그 명령을 거사에 동원된 해병여단 병력을 즉각 원래로 복귀시키라는 미 1군단장과 주한미해군사령관의 명령을 적절한 이유를 내세워 미루어 나가는 가운데 혁명이 성사될 때까지 차질없이 이행했다.

 

영웅호걸은 주색을 좋아한다는 말이 있듯 호걸스러운 기질을 타고난 공 장군은 삼국지나 수호지에 등장하는 주걸이나 주호들을 무색케 할 대단한 화제를 남긴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다. ‘65년 6월 하순경 청와대에서는 전투사단의 파월문제와 관련된 한‧미 고위군사회담이 개최되었는데, 그 때 박 대통령이 육군참모총장에 이어 공정식 사령관에게 파월에 대한 의견을 묻자 시원시원한 말투로 “한바탕 해야지요”하며 껄걸 웃었고, 박 대통령이 “언제쯤 갈 수 있을까”하고 되물었을 땐 육군참모총장은 “상당한 준비기간이 필요하다”고 답한 데 반해 공 사령관은 전략기동예비대의 최고사령관답게 “당장에라도 출동시킬 수 있다”고 답변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1개월 후 합참과 미 8군에선 해병대의 1개 연대전투단을 수도사단(맹호부대)에 배속시키라는 명령을 하달했는데, 그 때 그 명령을 받은 공정식 사령관은 자신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그 명령을 이행할 생각을 하지 않고 직접 박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애당초 자신이 합참과 미 8군에 건의했던 대로 독립작전을 수행할 장군이 지휘하는 1개 해병여단의 파월을 즉석에서 쾌락을 받음으로써 합참과 미 8군을 어리둥절케 했고, 박 대통령의 허락이 떨어지자 즉시 이봉출 준장을 제2여단(청롱부대)장으로 임명하여 그 해 9월 20일 제1사단에서 박 대통령의 임석 하에 역사적인 결단식을 거행함으로써 한‧미 해병대의 베리아반도 합동상륙작전이 입증하듯 월남전에서도 한미 해병대는 6.25전쟁 때 맺은 그 혈맹의 전우애를 발양하며 자유민의 전우를 위해 함께 싸웠다. 공 장군이 박 대통령에게 직접 건의하여 즉석에서 쾌락을 받았던 그와 같은 이야기는 공 장군의 신념과 용기가 대단했다는 것을 말해 주는 화제로 기억될 것이다.

 

‘66년 6월 제 6대사령관의 임기를 마치고 예편했던 공정식 장군은 ’67년 고향인 밀양에서 제 7대 국회의원 선거에 공화당 공천후보로 입후보하여 당선했는데, 그 때 특히 진해 해병교육단에서는 선거기간 중 많은 장교들이 휴일 날 자원봉사를 하듯 밀양을 다녀감으로써 마치 가족적인 행사를 치르는 듯한 분위기를 실감케 했었다. 한편 71년도에 시행된 8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박 대통령이 3선 개헌을 하기 위한 국민투표를 강행(69.10.17)한 데 반발하여 공화당 공천을 포기하고 무소속으로 입후보한 결과 낙선하고 말았으나 자타가 공인하듯 자신의 정치적인 신념을 지켰다.

 

정계에서 물러난 위 서정쇄신연구소와 한국바우엘흥산주식회사(재생공업분야)를 운행했던 공 장군은 70년대 중반 무역회사인 해경(海耕)을 설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행을 즐기는, 그리고 대동아전쟁사를 비롯, 광복20년사 제2차세계대전사 등 많은 사서(史書)를 섭렵(涉獵)한 독서가로 알려져 있는 공 장군은 부인 주영황 여사와의 사이에 태어난 3남 2녀 중 3남 모두가 자신의 뒤를 이어 해병대에 입대함으로써 ‘4부자 해병가족’이란 영예로운 타이틀을 지니고 있다.

 

한편 곡부(曲阜) 공씨(孔氏) 79세손인 공정식장군은 국내 곡부 공씨 대종회의 회장으로 추대되어 있는데, 공 회장의 말에 따르면 한․중 수교가 이루어지기 전인 86년 곡부 공씨의 본관(本貫)인 중국 산동성 곡부시장과 곡부시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인 공덕모씨(77세손)의 초청으로 곡부시를 방문했을 때(정부당국의 승인을 받아) 곡부시의 명예시장으로 추대되었다고 하며, 그 답례로 88년에는 그 두 분을 한국으로 초청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한국에는 고려(공민왕)때 공민왕의 비(妣)가 된(정략혼인으로) 명나라의 노국공주(公主)가 출가(出嫁)할 때 수행한 호위군사를 비롯한 시종들이 고려국에 귀화하여 퍼뜨린 약 8만명의 곡부 공씨 후손들이 살고 있고, 경기도 오산(烏山)에 있는 궐리사(闕理寺)에는 곡부시에서 보내온 시조(始祖․孔子)의 흉상(胸像)을 좌대에 안치하여 모셔놓고 있다고 한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 1 券" 중에서